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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칭위안

우칭위안
吳清源(오청원) / Go Seigen[1]
파일:오청원.jpg
직업 바둑기사
생년월일 1914년 5월 19일
사망월일 2014년 11월 30일
국적 파일:일본 국기.png 일본[2]
출신지 중화민국[3] 푸젠 성 푸저우
입단 1929년
단급 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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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자와 함께한 100세 생일 기념촬영. 린하이펑, 루이나이웨이와 함께.

1. 개요2. 생애3. 10번기4. 신포석5. 친일파 논란6. 기타

1. 개요

일본에서 활동한 바둑 기사. 기성 [棋聖] , 현대바둑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본명은 오천(呉泉)이며 우리가 아는 이름인 오청원은 일본 유학 전 중국에 있을 때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다. 중국 시절 ‘소년 오천(吳泉)’의 스승은 고수여(顧水如), 고수여는 북경 어느 기원에서 우연히 소년 오천의 바둑을 구경하게 되고, 소년의 재주에 반해 한판 시험기를 둔 후 제자로 삼았으며, 이후 자기집으로 출퇴근시키며 소년을 가르쳤다. 하루는 오천의 어머니가 소년과 같이 와서는 소년의 이름을 지어 주십사 요청했다. 그날은 마침 고선생의 형인 淵如(연여)가 함께 있었는데, 연여가 “샘물은 맑지(泉水是的)."라고 말했다. 이어 고선생이 말하기를, “샘물은 아득한 곳에서 솟아 멀리까지 흐르지(泉水是遠流長的).”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오천은 吳淸源(오청원)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고 이후 이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4]

바둑 역사 최강의 기사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이창호와 더불어 거론된다.

2. 생애

파일:오청원2.jpg
리즈 시절. 40년대로 추정
중국 푸젠성 출신으로 세고에 겐사쿠(瀬越憲作) 九단 문하. 그래서 역시 세고에 九단의 문하인 조훈현 九단의 사형(師兄)이 된다. 또한 린하이펑 九단은 우칭위안의 문하이니 조훈현은 나이가 10살 가까이 많은 린하이펑의 사숙(師叔)뻘... 개족보?

바둑광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두 형과 함께 바둑공부를 했다. 두 형과 달리 막내인 오청원이 특출난 기재를 보이자 부친은 오청원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시켰으나 오청원이 12세 때 세상을 떠났다.

소년 오천은 9살 꼬마 시절에 고수여 선생과의 시험기에서 5점으로 두어 패하고서 고수여 선생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후 지인의 소개로 북경으로 올라가 여러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며 불과 이삼 년만에 바둑계 강자 대열에 끼게 되었다.[5] 오청원이 12살 때, 일본에서 프로기사 이와모토 六단과 코스기 四단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소문이 자자하던 오청원과 지도기를 두게되었다. 먼저 이와모토 六단에게 석점치수로 두판을 연달아 이긴 뒤, 두점치수로 두어 패한다. 그리고 코스기 四단과 두점치수로 두어 승리한다. 이 대국의 결과가 일본에 알려지면서 바둑천재 오청원의 이름이 일본바둑계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이노우에 고헤이 五단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오청원은 정선으로 3판을 두어 1승1패1무를 기록한다. 단의 권위가 대단했던 당시에는 프로 四단 이상이면 바둑고수로 취급하던 시절이었는데, 프로기사를 상대로 고작 13살 소년이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는 소식에 일본 바둑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힌다.[6] 더구나 당시의 일본바둑계 시각에서 보면 중국은 바둑의 불모지나 다름없는데, 그 불모지에서 이런 '천연보물'이 불쑥 튀어나왔으니 일본 바둑계가 얼마나 법석을 떨었을지는 짐작키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일본기사들과의 대국이 오청원의 인생에 하나의 큰 인연을 만들게 되는데, 그의 평생 스승이 될 세고에 겐사쿠가 오청원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의 첫 번째 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四단을 중국에 보내 시험해 보도록 한 것이다. 1928년 오청원은 하시모토 四단과 정선으로 두어 4집승, 6집승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킨다. 오청원의 기재에 감탄한 세고에 겐사쿠는 그를 일본에 데려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고 결국 오청원은 14살에 일본으로 바둑공부를 하러 떠나게 된다. 자상하고 좋은 기사

일본으로 건너온 뒤 일본 바둑계는 오청원을 몇 단으로 인정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오가는데, 아무리 천재라도 초단으로 시작하는 것이 맞다는 대다수의 평에도 불구하고 스승 세고에가 三단 실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하여 三단격으로 간주하여 정식 단위인정 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그 해 승단대회 1위를 한 시노하라 四단을 포함해 혼인보 슈사이 명인, 무라지마 四단과의 대결을 모두 승리하면서 정식 三단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탓에 바로 승단대회에 참여하지는 못했고[7] 신문이나 잡지사가 기보연재를 조건으로 내건 임시 바둑대회에 주로 출전한다.

건강이 회복된 1930년부터 정식으로 승단대회에 참가하여 1930~32년까지 승단대회에서만 무려 44승 4패의 성적을 거두며 五단으로 순조롭게 승단하였다. 이 시기 오청원의 성적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1932년 시사신보에서 주최한 승발전(이기면 계속 두는 연승방식)에서 무려 18연승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1928~32년까지 4년동안 온갖 대국에서 기록한 통산 승률이 무려 9할에 육박했다. 천하의 이창호가 프로 데뷔 후 대회를 휩쓸며 가장 활발한 성적을 거둘 당시에 1년 승률조차 9할이 안 됐다.[8]

그 후 20대에 시작한 고수들과의 10번기 승부를 통해 모든 기사를 압살하며 일본 바둑계의 제1인자로 군림해 '쇼와의 기성(棋聖)'이라고 불렸다.

다만 전성기 시절 자타공인 일본 바둑의 1인자였음에도 현대적인 프로기전에서는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기 (구)명인전 리그에 참여하던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이 사고를 정점으로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하여[9] 몇 년 사이에 큰 대회 본선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고,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사실 이보다 훨씬 전인 본인방전에서도 우승 기록이 없었던 것을 보면 타이틀과는 인연이 어지간히 없긴 했던 모양.

이는 당시 일본 바둑계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신포석 등을 시험하던 오청원은 당연하고, 그 스승 세고에 또한 급진파로서 당시 일본기원과는 불편한 관계였던 것. 그 여파로 세고에는 자신의 제자를 본인도 모르게 일본기원에서 탈퇴시킨다.[10][11] 당시 불편한 관계로 인해 요미우리 신문사소속의 우칭위안은 본인방전을 비롯한 일본기원 기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12]

다만 당시 우칭위안의 지위가 너무 우월하여 본인방에 오른 기사들 스스로가 '본인방전에서 우승했으면 우칭위안에게 도전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고. 말로만 듣던 결승시드자. 코랜드 파일날? 슈퍼 한국시리즈?

1984년 현역에서 은퇴, 일본기원 명예 객원기사를 지냈다. 한때는 요미우리신문의 촉탁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문하생은 린하이펑, 루이나이웨이. 이 둘도 바둑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기사들로서 린하이펑은 70~90년대 일본 바둑을 휘어잡던 고수였고, 루이나이웨이는 여성기사계의 본좌급으로 자리잡게 된다.

2007년 그의 인생역정을 그린 영화 <기성 오청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4년 11월 30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3. 10번기

이 있는 현대적인 프로기전 제도가 정착되기 이전, 일본 정상급 기사들과의 10번기[13]에서 여러 차례 4판 차이로 이기며 치수를 선상선&정선으로 고쳤다. 선상선은 호선과 정선의 중간 치수로 하수가 3국 가운데 1,3국에서 흑을 쥐고 이는 一단 차이에 해당하며, 정선은 하수가 1,2.3국 모두 흑을 쥐며 二단 차이에 해당한다. 10번기를 통해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을 물리치고 바둑계를 평정, 일본 바둑계의 1인자로 모두에게 인정받기에 이른다.

  • 1939~41년 대 기타니 미노루. 오청원과 함께 신포석 개념을 정립한 인물. 6국까지 5승 1패
6국을 오청원이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상황에서 주최측이 고령이자 일본바둑계의 원로인 가리가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염려해 대국을 중지한다.
당시 오청원이 八단, 후지사와가 六단이었던 관계로 후지사와가 정선으로 두게된다.[14] 즉 오청원은 떠오르는 신예기사이자 훗날 최초의 九단이 되는 고수를 상대로 백번으로만 대결해 승리한 것. 당시 덤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내심 호선으로 둬도 자신있다고 생각한 후지사와는 비록 치수가 고쳐지는 사태는 막았지만 충격을 받고 후지사와 호사이로 개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지사와 굴욕 시리즈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 1949~50년 대 六,七단 선발 10번기에서 10명의 프로와 대결. 8승 1무 1패로 36세에 九단에 추천된다.
이 특이한 10번기는 오청원과 후지사와 쿠라노스케의 재대결을 추진하던 주최측이 먼저 九단이 되어버린 후지사와와 오청원이 호선으로 둘 수 있도록 오청원을 九단으로 만들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흑번이 단 두번뿐이 불리한 치수였음에도 완승.[15]
  • 1950~51년 대 하시모토 우타로 2차전. 1차전때 치수가 고쳐져서 하시모토가 선상선. 10국까지 5승 3패 2무.
결국 3차전까지 패배하며 후지사와의 치수가 정선까지 내려간다. 충격 받은 후지사와는 일본기원에서 탈퇴. 캐삭빵
참고로 후지사와 3차전은 오청원이 치른 10번기 중 가리가네전과 더붙어 최종 10국까지 가지 않은 유이한 승부였다. 6국 종료 후 보다못한 일본기원에서 주최측인 요미우리 신문에 대국 중지를 요청한 것. 6국만에 치수가 정선까지 내려간 후지사와는 멘탈이 이미 박살(...)난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행여나 또 한번 4승차가 날 경우, 즉 최종전적이 9승1패가 될 경우 후지사와가 선이선[16]까지 내려가게 되어, 명색이 프로와 프로의 대결, 그것도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九단과 九단의 승부에서 한쪽이 두 점 깔고 시작하는 희대의 개막장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일본기원 입장에서는 무조건 막아야 했던 것.
  • 1953~54년 대 사카타 에이오. 최초의 본인방&명인 타이틀 동시 보유자. 사카다가 선상선. 8국까지 6승 2패.

17년 동안 11번의 10번기 승부 전승.

가리가네 준이치를 제외한 모든 기사의 치수를 선상선 및 정선으로 수정.[19]

더 이상 오청원과 10번기 대결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고 판단한 주최사 요미우리 신문은 결국 10번기를 종료한다.

10번기 같은 장기 대국은 결국 백번을 누가 승리하느냐의 싸움이었는데 오청원은 불리한 백을 쥐고도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현재 한국, 일본에서는 6집반을 으로 주고도 흑이 유리하다는게 정론인데, 덤이 없던 오청원의 시대에 백번으로 저런 승률을 보였다는건 이미 평범한 바둑고수의 실력을 초월한 것이었다.

참고로 오청원의 10번기 승부는 승패가 갈린 뒤에도 마지막 10국까지 계속 두는 방식이었는데,[20] 번기승부 종료 후 최종 전적은 막상막하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4승 차를 달성해 상대의 치수가 고쳐지는게 확정되면 나머지 대국은 수정된 치수로 두는 방식과,[21] 치수고치기를 달성한 오청원은 나머지 대국에는 온 힘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4. 신포석

1933년 우칭위안은 기타니 미노루와의 10번기를 치르게 되었다. 여름에 시작된 10번기는 5국을 두던 도중[22] 30수가 진행된 상태에서 잠시 중지되었는데, 이 때 포석 관련 이론서를 쓰고 있던 기타니가 우칭위안을 나가노현 지고쿠다니 온천(地獄谷温泉)[23]에 초청하여 둘은 함께 포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당시 기타니는 중앙과 세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포석을 구상중이었고, 우칭위안 역시 기존의 소목(小目)으로 시작되는 포석을 벗어나 화점이나 3의 3을 두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공동 연구는 5국의 진행이 중지된 한 달여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약간 지난 후 우칭위안이 기타니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기원 편집부장인 야스나가 하지메가 우연히 동석하게 되었고, 그가 두 기사의 연구에 감히 딴지를 건 것이 계기가 되어 세 명은 밤새도록 논의를 진행, 이를 책의 형태로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그해 가을 오테아이(大手合, 승단 대회)에서 이를 실전에 옮겨 우칭위안이 1등, 기타니가 2등을 차지했고, 그들의 연구성과는 『신포석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24], 매진사태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신포석은 그때까지의 바둑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현대 바둑의 성립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우칭위안은 혼인보 슈사이[25]와의 대국에서 첫 수를 천원에 두는 포석을 시도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첫 수 천원 착점은 신포석에서 시도한 주요 포석이었는데, 하필 일본의 전통 바둑계의 상징이자 당시 바둑계 대원로로 대접받던 혼인보 슈사이 앞에서 두었다는 점 때문에 불경한 행동이라는 비난이 있었던 것. 당시는 소목이 아니라 화점이나 3의 3에 두는 것조차 변칙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으니...

5. 친일파 논란

워낙 민감한 출신 때문에 중국에서는 친일파 논란에도 자주 말려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옹호론자들은 우칭위안이 바둑 기사일 뿐이므로 정치, 역사적 문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판론자들은 우칭위안이 일본 군부의 인사들과도 친선 바둑을 두는 등,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물론 중국계(정확히는 대만)라고 해도 일본인이니 한간 어쩌고 하는 건 좀 억지스럽지만.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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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몇백년이나 되는 바둑역사 속에서도 불세출의 천재기사로 평가된다. 바둑은 보통 노력을 중시하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재능의 유무를 굉장히 크게 여기는데 타고난 기재가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대성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일명 '노력하는 천재'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 오청원으로 그의 사제 조훈현 九단의 이런 말을 남겼다.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되는 게 바둑이다.”

이런 천재를 제자로 둬서인지 그의 스승 세고에 九단은 어지간한 천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본기원에서 오청원의 뒤를 잇는 천재니, 신동이니 떠들어대면 가소롭다는 듯이(...) 위 이미지에 나온 대사와 비슷한 뉘앙스의 언급을 했다고.[27] 그리고 실제로 오청원 이후 30년 동안 제자를 들이지 않았으니 그로 인해 세고에 九단의 눈높이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오청원 이후 30년 만에 세고에의 세번째 제자가 된 천재가 바로 조훈현 九단.

[1] 일본식 발음 표기. [2] 본래 중화민국 국적이었으나, 중도에 공식적인 이민으로 국적이 변경되었다. [3] 중화인민공화국 [4] 이 일화의 출처는, 고수여의 훗날 제자인 진조덕(陳祖德 -전 중국기원원장, 2012년 작고)의 자서전인 초월자아(超越自我). [5] 당시 중국에는 프로기사라는 개념은 물론 정식 기전조차 없었고 바둑애호가나 부자들이 주회하는 일반 대회만이 성행했다. [6] 생각해보라. 2017년 현재 시점에 2004년생이 프로와 다이다이맞먹다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바둑기술의 조기교육'이 대세가 된 요즘 기준으로 쳐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7] 단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당시에는 승단대회가 모든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대회였다. 단위의 높고 낮음으로 그 신분의 높낮이도 결정된다고 할 만큼 중시되던 시합이었기에 기사들의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 제한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룰 덕분에 엄청난 초장기전이 대부분이어서 기사들의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 [8] 물론 이런 엄청난 성적은 당시 오청원의 단위가 기력에 비해 저단이었던 탓에 흑번으로 대국한 경우가 많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덤이 없던 당시에는 흑번이 백번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9]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었고 이후 천식이나 발작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10] 정작 우칭위안 본인은 이 사실을 20여 년 후에야 알았다고. ㅎㄷㄷ [11] 세고에의 다른 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九단 역시 일본기원을 탈퇴, 이후 관서기원을 창립했다. [12] 후지사와 구라노스케와의 10번기가 이와 관련이 있다. 후지사와는 사실상 일본기원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대국을 했으며, 이에 패하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13] 정상급 기사들 사이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당시 바둑계 최대 이벤트였고, 참여하는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대국에 임했다. 이는 당시에 '데드 매치'라 불렸는데 10번기 중 4승 차 이상이 나게 되면 상대를 '한 수 아래'로 대하는 규정 때문이다. 아래에서 나올 후지사와는 이 치수 고치기에서 세 차례나 패하며 이름을 바꾸고, 한동안 칩거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굴욕인 셈이다. 이 10번기는 초장기전에 체력전이라는 이유로 오청원 이후 사라졌다가 2014년 Mil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로 부활하게 된다. [14] 이후 10번기 도중 七단으로 승단하지만 마지막까지 정선으로 둠 [15] 묘하게도 이 대결에서 기록한 1무1패가 모두 관서기원 소속 기사들과의 대결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당시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오청원도 일본기원과 사이가 껄끄러웠기에 일부러 져주었는다 소문이 돌았다. [16] 三단 차이에 해당하며 하수가 2번 흑, 1번 두 점을 깔고 둠 [17] 훗날 조치훈 九단이 10연패를 하기전까지 본인방 최고 연패기록이었다. [18] 2패중 1패는 반집패. 이 반집패를 지면 우칭위안의 집에 가일수 해야 해서 반집패를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대국이었다. 우칭위안은 팻감이 많기 때문에 반집패를 이겼다고 했지만 당시 관례상 다카가와가 이을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입회인은 "다카가와 가쿠가 이긴 것"으로 선언하고 우칭위안을 설득해서 다카가와가 1승을 더 챙긴 것. 이 판은 '바꿔치기의 명국'으로 불리며 바꿔치기만 서로 다섯차례나 나오는 난타전이었다 [19] 가리가네마저도 승부를 계속했다면 치수가 고쳐졌을거란 의견이 거의 확정적이다. 단의 권위가 컸던 그 시절에 하수가 상수보다 높은 치수로 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는 이세돌의 승리가 확정되자 8국에서 종료했다. [21] 호선으로 시작해 한명이 1~4국을 연속으로 잡아 4승차가 될 경우, 바로 상대의 치수가 고쳐지고 나머지 5~10국은 상대가 선상선으로 둔다. [22] 당시 프로의 중요한 대국은 며칠에 걸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경우 그 날의 대국이 끝날 때 ' 봉수(封手)'를 하게 된다. [23] 지명의 뜻을 해석하면 지옥의 계곡. [24] 세 명이 공저자로 올라갔다. [25] 현대기전으로 바뀌기 전 세습 바둑가문이었던 혼인보 가문의 21대이자 마지막 당주. [26] 미디어 웹툰 ' 바둑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청원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의 천재에 대한 평 [27] 아마 세고에 九단이 일본기원과 굉장히 척을 지고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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