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2:13:09

그랜드 슬램(지진폭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ritish_Grand_Slam_bomb.jpg
1. 개요2. 개발3. 실전4. 평가5. 여담

1. 개요

22,000lb MC bomb ' Grand Slam'.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지진폭탄. 톨보이의 설계상 원형이기도 하며, 안 그래도 흉악했던 톨보이보다 2배 이상 강력한 폭탄이다.

2. 개발

이 폭탄의 설계자인 반스 월리스는 '지표를 뚫고 들어갈 정도로 큰 폭탄을 투하하면 지반을 뒤흔들어 건축물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영국군에 바로 이 그랜드 슬램을 제안하였으나, 영국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국군이 바보거나 머리가 굳어서가 아니고, 그런 걸 써먹을 운송·투발수단이 딱히 없었던 게 문제였다. 길이 7.7m, 중량 10t에 폭약 6t에 달하며 정상고도에서 투발 시 추진체 없이도 폭탄이 표적에 도달할 때의 자유낙하속도가 음속에 가까운 마하 0.94에 이르는 물건을 어떻게 나르려고?[1] 원안에도 해당 폭탄 전용 폭격기인 빅토리 폭격기를 개발해서 투하하자는 소리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영국군 입장에서는 비현실적인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저 무게가 감이 안 온다면 한국에서 군용버스로 자주 쓰이는 25인승 미니버스인 카운티에 사람을 꽉꽉 채우면 무게가 이 폭탄 정도 된다. 물론 폭탄이니 버스보다는 훨씬 얇고 가늘겠지만, 그래도 그런 폭탄을 제트기도 아니고 1940년대 기술로 만든 프로펠러기에 탑재해서 이륙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무사하게 적진에 홱 던지고 오기엔 기체에 너무 부담이 크다는 건 예상하기 쉽다.

사실 그랜드 슬램을 제작하기로 한 뒤에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당시 영국군이 보유한 폭격기 중 가장 적재 중량이 컸던 랭커스터 폭격기에 달려고 했는데 수납이 안 되고 중량 문제도 있어, 결국 그랜드 슬램을 장비하기 위해 불필요한 장비 떼고, 연료도 적게 싣고, 아예 외부에 폭탄을 매달 수 있도록 별도의 장비를 만드는 등 이거 하나 매달려고 아득바득 기체를 개조해야만 했다. 쉽게 말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만 갖추게 만든 상태로, 비행기를 구성하는 부품이 동체+엔진+외피+조종계통+폭탄설비+연료가 끝이다. 이딴 마개조를 해대서 띄우는 대삽질을 한다 해도 설계상의 투하고도는 커녕 중저고도에서도 빌빌대니 이 폭탄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크고 무거운 물건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보통 폭격기가 노리는 장소는 당연히 중요시설일테니 대공망이 갖춰져 있을 것이고 주변에 출격가능한 공군이 있을테니 가능하면 높게 날려고 하기에 대부분의 폭격기는 폭격 시작시 정밀도를 위해 고도를 낮추기 전까지는 쭉 고고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랜드 슬램을 장착하려고 갖은 개조를 하고 나면 고고도로 날기가 힘들었기에 가다가 대공포나 전투기에 요격당할 위험이 크다. 따라서 무작정 폭격기의 희생을 감수하고 들이박든가, 아니면 좀 안전하게 운용하고 싶다면 사전에 주변 대공진지랑 적 요격기나 공군 기지를 싹 다 날려버리고 제공권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전략적인 노력이 선결과제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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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슬램을 위한 랭커스터 B I 스페셜 모델. 그나마 리틀 보이 팻 맨은 폭탄창 안에도 들어갔고, B-29의 기본 폭장량(폭탄창 한개당 4.5톤으로 도합 9톤)으로도 탑재가 가능했지만, 이건…핵무기에도 그랜드 슬램과 비슷한 사례가 있다. 소련의 실험용 폭탄이며 지금까지 실기폭실험에 동원된 폭탄 중 가장 위력이 강한 수소폭탄인 차르 봄바.

그랜드 슬램을 만들기로 한 뒤에도 이랬으니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폭탄 하나 쓰겠다고 이렇게까지 오버를 해야 하는 거냐 소리를 듣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설계자가 어느 정도 신뢰를 쌓은 인물이었기에 5.4톤짜리 축소판 제작으로 타협을 봤고, 그렇게 나온 물건이 톨보이다. 역시 세상 흉악한 건 전부 영국이 만든다 이게 떨구는 족족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2] 영국군을 흐뭇하게 만들자 월리스는 "얘들아 이래도 10톤짜리 안 만들어볼 거니?" 라며 슬슬 영국군을 꼬드겼고, 실전 투입을 통해 폭탄 하나 쓰겠다고 오버할 가치가 있었음을 제대로 확인한 영국군은 군말 없이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마침 톨보이에 정신이 번쩍 든 나치 독일이 콘크리트 벽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등 대응을 시도하기 시작해 슬슬 톨보이의 약빨이 안 받기 시작한 참이기도 했으니 이 시점에서는 영국군 입장에서도 정말 더 강한 폭탄이 필요하기도 했다.

3. 실전

그 이름답게 데뷔전부터 화려했다. 첫 상대는 독일 베스트팔렌(Westfalen) 지방의 도시인 빌레펠트(Bielefeld) 인근 실트에셰(Schildesche) 지역의 육상 철교(Schildescher Viadukt)였다. 톨보이 폭격도 견뎌냈던 튼튼한 놈이었던만큼 첫 실전 목표로 낙점되었고 투하된 폭탄은 철교에서 수 미터나 벗어난 곳에 떨어졌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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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미터 빗맞은 건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랜드슬램은 자비심 없는 폭발력으로 지반까지 무너뜨려 철교 교각까지 동시에 폭삭 주저앉혔다. 위의 사진을 보면 큰 웅덩이 주변에 상대적으로 아담한(?) 물웅덩이 몇 개가 보이는데, 그게 이전에 톨보이가 떨어진 흔적이다. 물론 이후 다른 철교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폭탄 투하 장면을 찍은 1945년 뉴스 영상.
뉴스 영상에서는 상대적으로 아담한(?) 톨보이의 폭발 이후 그랜드 슬램이 폭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런 초대형 폭탄을 하늘에서 투하하자 땅 속 깊숙히 박힌 뒤 폭발했고, 그러자 지반을 지탱하던 기반암층이 부분적으로 부서지면서 지반까지 약해져버렸다. 이러니 그 위에 구조물을 세워도 지반이 버티지 못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복구하려면 저만한 강도의 지반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퇴적물이 쌓여 물기가 빠지고 높은 압력을 받아 단단한 암반이 되어야 하는 기반암 특성상,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땅에 파이프를 박고 콘크리트를 채워넣어 보강해야 하는 돈도 시간도 자원도 제법 잡아먹는 힘든 작업이니 전쟁 중이었던 당시에는 정말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보면 된다.

독일군도 이 사실을 알았기에 1944년 12월 1일 이 구간을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임시 복선철도(The Gummibahn)를 만들어 놓았고, 폭격 후 다리가 끊어졌을 때도 이 쪽으로 운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구간이 복복선이었기 때문에 복선으로 건설된 임시선로의 운송량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 육상 철교는 종전 후인 1947년 목재와 철재로 무너진 부분만 복구하여 열차가 다녔는데, 임시복구 형태라 두 개의 복선 철교 중 하나만 복구하여 이 쪽은 가벼운 열차만 운행했고 무거운 열차는 한동안 임시 우회선로로 다녔다. 그러다 복구가 안 된 다른 쪽 복선 철교를 1964년에 콘크리트교로 다시 만들면서 우회선로는 폐지되었다. 이어 임시복구했던 철교도 종전한지 무려 40년이나 지난 1985년에서야 완전히 복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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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슬램에 직격당한 브레멘의 발렌틴 U보트 생산기지. 철근이 뭐 멀쩡하게 남은 게 없다. 사진 출처

독일군은 톨보이에 온갖 공들여 만든 군사용 강화구조물이 싸그리 다 박살나기 시작하자 콘크리트를 더 처발라 방어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책을 마련했는데, 기껏 없는 살림에 돈을 퍼부어가며 톨보이를 막기 위해 강화했더니 그랜드 슬램 맞고 쿠크다스마냥 박살나서 흔적도 없이 엎어지는 어이가 터지는 상황에 몰렸다. 저 기지도 작정하고 톨보이 폭격도 견딜 수 있게 설계해 1945년 3월 폭격 당시 90% 완공된 상태였다. 동쪽 구획에 7m의 철근 콘크리트를 떡칠해놨는데, 하필 4.5m를 발라놓은 서쪽 구획에 그랜드 슬램이 떨어져 지붕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4.5m 두께가 옆 구획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다곤 하지만 이 두께면 이미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동물원 대공포탑보다 훨씬 두꺼운 떡장갑인데 말이다! 그랜드 슬램이 관통하기 전에 기폭된 탓에 시설 내의 인부들은 살아남았지만 결국 기지는 완공되지 못한 채 버려졌고 4주 후에 영국 육군 제30군단이 점령했다. 이 폭격으로 21형 유보트의 최종조립라인이 끝장난 탓에 종전까지 투입가능한 21형은 4척밖에 완성되지 못했다.

2차대전 중 투입된 그랜드 슬램은 총 41개로 주로 교량과 항구의 고가교(Viaduct) 폭격에 사용되었다. 덩치와 무게, 그리고 무유도폭탄이라는 한계상 특정한 건축물을 정확히 명중시키는 정밀타격은 무리였지만 파괴 가능 범위가 상당했던 그랜드 슬램에게 그딴 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역으로 그 덩치와 무게 덕분에 정타를 내지 못한다 해도 적당히 근처에 떨어지기만 하면 교량이나 고가교를 최소한 일시적으로, 잘 박히면 반영구적으로 사용 불가능할 정도로 지반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한 폭발력과 지진효과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1945년 4월 25일 히틀러의 별장 중 하나인 베르크호프(Berghof)를 산사태마냥 뒤엎어버렸는데,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영국 공군은 폭격할 만한 중요 시설이 하나도 없는 뉘른베르크를 단지 나치당 전당대회가 열렸던 유명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폭격한 전력이 있다 보니 아마 이 곳도 단지 히틀러의 소유라는 이유로 얻어맞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히틀러의 소유인 데다 특별한 상징성으로도 폭격할 이유가 없진 않다. 운이 좋아서 마침 히틀러가 거기 피신해 있거나 했다면 잭팟을 터뜨리는 거고. 참고로 히틀러의 별장은 히틀러가 유독 튼튼하고 오래가도록 만들라고 지시하고 감독한 데다 국가원수가 이용하는 곳이므로 나름대로 방공설비를 갖춘 곳으로 일반 폭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렇게 방비를 갖춘 설비면 가끔 피신이나 휴가를 위해 와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쯤 폭격할 값어치는 확실히 있었다.

미국 역시 그랜드 슬램의 활약을 보고는 T-12 클라우드메이커라는 더더욱 흉악한 폭탄을 만들었다. 개조한 B-29에 탑재해서[3] 태평양 전쟁에서도 사용하려고 했지만 개발 완료 직후에 원자폭탄이 개발되면서 실전 투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평가

폭탄 하나 던진다고 전용 폭격기까지 만들어야 되냐는 의문에 충분히 제 값을 하는 것으로 답해주었지만, 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주 고객(?)인 독일과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오래 써먹지는 못한 병기. 허나 적은 실전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에 맞는 위력을 통쾌하게 보여준, 그야말로 짧고 굵게 뚫고 간 병기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지표면이나 방벽을 뚫고 들어가 안에서 터뜨린다'는 개념은 이후에도 유효한 전술로 남아 현대의 벙커버스터로 계승되었으니, 이름답게 그 족적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5. 여담

2022년 대한민국이 고위력 현무 탄도미사일을 공개했는데 이쪽은 탄도미사일 주제에 탄두 중량이 무려 9톤에 육박하는 물건으로, 그랜드 슬램보다도 흉악한 물건이다. 왜냐하면 그랜드 슬램은 폭격기가 제 고도까지 못 올라간 채로 떨어뜨리던 거라 착탄 속도가 음속을 넘지는 못 하지만[4] 이쪽은 마하10으로 적 시설을 향해 돌진하기 때문.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람보 4: 라스트 블러드에서 람보가 M18A1를 사용한 부비트랩으로 땅 속에 박혀있던 톨보이 불발탄을 기폭시켜서 개를 풀어서 추적해오던 정부군 병사 십여명을 폭사시킨다. 다만 전체적인 생김새는 그랜드 슬램을 닮았다. 커다란 폭발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로 주변의 나무가 쓰러지는 묘사를 볼 수 있다.

대체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 영국이 천황이 숨어있는 벙커를 갈아엎을 때 1발을 투하해 흉악한 성능답게 벙커에 숨어있던 천황과 시종들을 벙커째 매몰시켜 몰살시킨다.

나치 독일 대신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대체역사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리텔리에이션에서는 탱크 버전으로 소련군의 M.A.D 탱크가 존재한다. 아마 현실보다 유럽에서의 대전쟁이 10년 늦게 개전된데다 해당 세계관의 태평양 전쟁이 그냥 미국을 위시한 서방 연합군 VS 일본제국 구도의 우리 바다 쟁탈전에 그치다 보니 뒤늦게 소련에서 만든 듯 하다.
[1] 지금이야 C-5 갤럭시 B-52 같은 대형 군용기들이 있지만, 저때 시대를 생각해보자. 1900년대 초중반이다. [2] 유보트 기지를 완파하는 것도 모자라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티르피츠도 주변 지반까지 뭉개버리며 격침시키는 괴물같은 전과를 올렸다. [3] 실제로 그랜드 슬램을 운반중인 B-29사진 [4] 그래도 음속에 한참 못 미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