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06-22 18:47:11

관우/정사


1. 초기 생애2. 서주에서
2.1. 관장이 만인지적으로 불린 이유는?
3. 관도대전4. 삼고초려부터 남군공방전까지5. 청니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6. 익양대치부터 한중공방전까지7. 번성 공방전
7.1. 번성 공방전 초기의 승리7.2. 위나라의 반격7.3. 관우의 최후
8. 사후

1. 초기 생애

정사에 서술된 관우의 초창기 행적은 매우 부실한 편이다.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1]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정사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장비는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고 한다.

관우의 초창기 군사적인 기록 역시 부실하긴 마찬가지이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2],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과 동탁토벌전 그리고 공손찬 휘하 마지막으로 서주에 있었을 때부터 주변 군벌들로 부터 유비 휘하의 장수들에 대한 높은 평가를 들었던 만큼 관우에게는 무척이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촉한의 개국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들의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이 불가하다.

다만 사서상으로 몇 가지 짐작가는 사항들이 있다. 유비의 초창기 행적을 따라가면 관우는 다음과 같은 공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선주전, 화양국지)
  • 추정의 군에 합류해 황건적의 난 진압.
  • 하진이 보낸 관구의와 함께 하비의 적을 물리치는 데 일조.
  •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한 후, 원소와 대적할 때 일조.

이런 사례를 몇가지 살펴보면 동탁 토벌전에서 조조군이 서영군에게 궤멸당했을 때 소수의 병사들만 조조 휘하에 남았는데, 서영이 하루종일 싸워서 조조군을 끝내 절멸시키지 못하고 산조를 공격하기 어려우리라 여겨 군사를 물린 행적이 있다. 이때 조조군 휘하에는 유비 일행이 들어가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유비 일파는 끝까지 여기서 살아남았고 이후 고당현을 거쳐 유비는 평원상이 되었다. 또 공손찬군에서도 유비 일행이 수차례 공을 세운 것이 확인되며,유비가 원술과 싸울 때에 장비는 남았으니 관우는 유비를 따라 원술과 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 이기고 짐을 되풀이 했다고 하니 관우도 종군했다면 승리도 했을 것이고 패배도 했을것이다. 또,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소패성으로 돌아가 흩어진 병사를 모으고 있을 때, 여포군의 명장인 장료, 고순이 유비군을 공격하여 유비군이 3월부터 9월까지 반년간 소수의 병력으로 버틴 행적이 있다.

당시 유비 휘하에 있던 장수는 관우, 장비와 더불어 간옹이 있었고, 공손찬이 유비에게 증원으로 보냈던 부장 조운, 그리고 전예가 있었다. 그러나 전예는 참여했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유비, 관우, 장비 삼인방이 각지를 돌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인상깊은 활약을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여기서 우리는 간옹이 이 난리 판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익주까지 간 것으로 보아 절대 간옹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관우는 본래 고우였으며 폭리를 탐한 소금 상인을 죽여 관리에 의해 쫓겨나 유주로 달아났다고 한다.
  • 관우가 어떤 마을에서 숨어있던 가운데 성문을 지키던 보초병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했다.
    • 그러자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관우에게 옆에 있는 연못에서 세수를 하라고 권했다. 관우가 노인의 권고에 응했더니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그러자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관우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우더니 이를 냅다 두들겼다(!) 그 때문에 관우는 코피가 터져 그 피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이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얼굴을 보더니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인물이 아니네~"라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관우라는 이름을 자칭했다.
  • 관우가 어느 도성의 관문을 지나가야 할 때였다. 그 때 관문의 경비병들은 위의 사건의 범인을 찿기 위해 고우라는 사람을 찿기위해 검문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이름을 묻고있었는데. 경비병들이 관우의 체격을 보고 의심하여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관우는 급한 김에 자신이 지나려고 하는 관문을 보고 "성은 관(關)이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시간을 끌던 가운데 관문 위를 날던 새에서 깃털이 떨어지기에 "이름은 우(羽)요."라고 둘러댔다. 그가 하늘을 보자 긴 구름이 둥둥 떠다니기에 "자는 운장(雲長)이오."라고 대답했다.
관우가 고향을 떠난 뒤 호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중조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호씨는 마을에서 이름난 명의가 되었고, 장성한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관우와 재회할 때도 호씨는 중조산에 남았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당시 소금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소금은 주요 수입원이자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염호는 마을 제일의 재산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소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과 의리가 중요했고, 이러한 환경이 관우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19세의 관우가 악덕 지주를 죽이자 관리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관씨 성을 가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씨 성 사람들은 살기위해 하나 둘 마을을 떠났지만 힘든 피난길을 가기에 관우의 부모는 너무 연로했다. 결국 아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운 노부부는 집 앞마당에 있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이후 관우 사당이 조성되어 사람들의 관우를 향한 마음은 그의 부모에게까지 닿았고, 그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탑이 세워져서 현존하고 있다.

송락의 균량우필에 관우 할아버지의 묘비에 대한 기문인 관후조묘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한다.
강희제 17년(1678년)에 관우의 고향 해주 상평촌의 선비 우창(于昌)이란 사람이 탑묘(塔廟)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묘는 관후(관우)가 살던 옛집이었다. 그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관후가 비석을 바꿔 세우라(易碑)라고 쓴 커다란 글자 2개를 주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우물을 파단 사람이 커다란 벽돌을 주워 깨뜨렸는데 벽돌 위에 글자가 있었다. 우창이 급히 주워 모아 판독하니 바로 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양대의 이름과 자, 생몰년의 간지(干支)가 대충 씌어 있었기에 산을 두루 헤매어 무덤을 찾아냈다. 그래서 급히 해주 태수 왕주단(王朱旦)에게 알리자 주단이 관후의 조부 묘비기를 지었는데, 기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후(관우)의 조부는 석반공(石磐公)으로 이름은 심(審), 자는 문지(問之)이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2년(90년) 경인생(庚寅生)이고 해주 상평촌 보지리(寶池里)에 살았다. 공은 충목(沖穆, 온화하고 씩씩함)하고 도(道)를 좋아하였다. 《 주역(周易)》과 《 춘추(春秋)》로 아들을 가르쳤다. 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 정유(157년)에 죽으니 향년은 68세이다. 아들의 이름은 의(毅), 자는 도원(道遠)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환제 연희(延熹) 3년 경자(160년) 6월 24일에 후(侯, 관우)를 낳았다.[3] 후는 커서 호씨(胡氏)에게 장가들고 영제(靈帝) 광화(光和) 원년 무오(178년) 5월 13일에 아들 관평을 낳았다.[4]

2. 서주에서

초기기록이나 계한보신찬 등에서 나오듯 유비를 따라 기세가 호랑이 같이 장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던 관우와 장비는 어느새 주변으로부터 만인지적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를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 의탁해 예주목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 정욱전에 보면 정욱으로 나온다.)이 유비는 영웅이므로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곽가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를 현명한 이를 해쳤다 할 것이므로 죽이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뒤 이은 곽가전 부자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 일행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에 적을 놓아주었다가 수세(數世)에 걸쳐 우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배송지는 위서와 부자가 다르다 하였는데 아마도 곽가가 유비를 몇번 응대하여 생각이 바뀐것일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일찍부터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리었다.

이후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소패로 돌아가 여포의 장수 장료, 고순과의 전쟁을 열세인 상황에서 반년쯤 진행하다가 조조의 도움을 받아 서주에서 여포를 잡아 죽일수 있었다. 관우도 이 전쟁에서 이들을 상대로 싸웠는데 이 때 일화로 명제기 주석 헌제전, 관우전 주석 촉기&위씨춘추에 두씨 일화가 있다. 여포의 휘하 장수 진의록이 여포의 사자로 원술에게 갔을 때, 한나라 종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진의록의 전처 두씨는 하비에 남았다. 조조가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하면서 관우도 종군했다. 관우가 조조에게 여쭈길, 여포가 진의록을 시켜 구원을 청했다며 그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맞겠다고 하니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때, 관우는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여러 차례 청하자, 조조는 두씨가 얼마나 미인인지 관심이 생겼다. 여포가 막 격파되려 할 때 또 여러 번 청하자 조조는 그녀가 남다른 미색이리라 의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확인했다.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녀를 머물게 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화양국지의 기록에서는 관우가 두씨를 청하면서 자기 처가 자식이 없다고 덧붙인다. 즉 당시 관우는 아내가 있으면서 자식을 얻으려고 두씨를 원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화양국지 기록은 여포가 포위된 곳이 복양이고 여포가 진의록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사람도 장양이라고 잘못 적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다 아내로 원한다고 적어 배송지가 아예 인용하지 않았다. 이해 대해 삼국지집해 관우전에서 청나라 학자 반미(潘眉)가 '화양국지에선 관우가 처가 자식이 없다고 하는게 다르다'라고 언급한 것이 나오나 이는 위에 나온 관우조묘호기와 모순되는데 거기에는 관평은 178년생이므로 이미 관우에겐 자식이 있었던게 된다. 애시당초 배송지도 주석을 추가하면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어넣지 않은듯 하다.[5][6]

촉기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허도에 있을 때 조조와 함께 사냥한 적이 있는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조를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유비는 동승과 함께 헌제의 밀조를 받아 조조를 암살하려 하고 있었는데 관우의 발언은 이 계획이 배경이 되었던것 같다. 이후 원술을 토벌하러 동쪽으로 떠난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200년, 조조가 동쪽을 치자 유비는 대패해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조조는 이전부터 관우를 매우 인상깊게 보았는지 그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7]

2.1. 관장이 만인지적으로 불린 이유는?

유비는 제외하고 관우와 장비가 만인지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로는 이들이 유비의 기병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보병 중심의 청주병을 운용한 조조 입장에선 오환 기병을 이끌고 조조와 맞싸운 유비는 껄끄러운 존재였고 유비의 기병대장으로서 양익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것이 바로 이 만인지적 칭호를 받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오랜기간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공손찬 밑에서 싸워온 전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기병 전술을 습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공손찬 밑에서 조조와 싸웠고 서주로 올때도 천여기의 기병을 가지고 남하해 왔다. 그렇다면 관우와 장비의 초기 커리어에서 이들이 기병대장으로서 빼어난 활약을 하여 조조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것이 초창기 그들이 만인지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라고 보는것은 확실히 타당성이 있는 시각이다.[8]

다만 무작정 관우와 장비의 활용에 있어서 기병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양익에 국한하지 않고 기병의 활용처를 폭넓게 해석해서 분견대로서의 활용, 양익을 둘 경우의 전기 함기 유기로서의 역할 부여 등 다양성을 넣어서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 않는가 하는 부분도 있고 더 넓게 보아 양익에 둘 수 있다면 기병에 한정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사유의 범위를 제시할 수는 있다.

일단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몇 가지 요소가 나눠지긴 하는데 말의 수급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그 외의 요소들을 살펴보자면 첫번째로 육성과 관리(유지비를 포함하여)가 쉽지 않은 기병을 활용할 전장인가? 하는 부분이 있다. 서고동저인 중국의 지형을 고려해볼 때 보병 대비 기병의 비율이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은 지역별로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다름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만인지적'이 최초 언급 유포되던 시점까지다. 그 이후부터는 평은 평대로 날았을거고 사람은 또 다른 사정이 있었겠을 터. 서주로 끌고 간 군마가 상하면 보충이 안 될 환경이니 사람보다 말이 픽픽 죽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전중국을 떠돌아 다니는 유비군에서 항상 기병 비율이 일정 이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커리어 내내 기병의 비율이 분명 적었으리라 추측되는 상황에서도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렸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관우와 장비는 유비가 평원상으로 있을 무렵부터 별부사마로 임명하여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으므로(先主為平原相, 以羽, 飛為別部司馬, 分統部曲), 공손찬이 유비를 별부사마로 임명하여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게 한 것처럼(瓚表為別部司馬, 使與青州刺史田楷以拒冀州牧袁紹.) 유비가 자신에게 관우와 장비를 온존히 종속시켜 부장처럼 활용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별부사마는 그 병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별영에 두는 관직이므로(其別營領屬爲別部司馬, 其兵多少各隨時宜 - 후한서 백관지) 관우와 장비의 경우 그 나름의 지휘권이 보장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분견대라는 의미다.

별동대(분견대)는 작전 수행을 위해 부대를 나눠 운영하는 형태지만 양익은 큰 틀에서는 주공(主攻)과 주공(助攻)에 있어서 조공의 역할을 수행할 때 표현되는 형태인지라 다르게 말하자면 본대를 돕는 군대다. 이곳에서 활약한 관우와 장비가 만인지적이란 표현을 얻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가 되는가? 기병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그 역할을 집중해서 관우와 장비를 이해할 때 그들이 별부사마로서 부여받은 지위와 함께 고려하면 기병의 운영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양익지휘에 있어서 큰공을 세웠을수도 있고 따로 떨어진 적을 요격하는 요격부대로 사용했을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9]

또 삼군 체제 하에 양익의 운영은 기병보다는 보병에 더 적합한 부분이 있다. 기병의 활용은 대체로 축구에서 좌우에 윙 포워드로 배치된 플레이어가 수비수들을 해집으며 그들의 수비 진형을 교란시키듯 짜여진 진영을 흐트러트려 보다 쉽게 공격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다만 별동대로서 기병을 운영할 경우 꼭 양익일 필요는 없고, 양익으로 기병을 운영할 경우(포위를 제외한 경우에 한해서) 기병의 기동력을 적극적으로 살려 교란 작전에 집중하진 않는다는 것.

어쨌거나 만인지적이라는 평가는 항우본기에서 언급된 '書足以記名姓而已. 劍一人敵, 不足學, 學萬人敵.'라고 하여, 병법에 대응되는 비유다. 용맹스러움에 보다 방점이 찍혀 있는 관우와 장비의 만인지적에 대한 칭호에는 분명 그들의 군사 운용에 대한 칭찬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부간의 평에서 '劉備寬仁有度,能得人死力。諸葛亮達治知變,正而有謀,而為之相;張飛、關羽勇而有義,皆萬人之敵,而為之將:此三人者,皆人傑也' 이라 하여 유비에게 관인유도, 제갈량에게 달치지변, 관우와 장비에게 만인지적이라고 한 부분은 이와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곽가의 평에 있어서 유비와 관우 장비를 비유하는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부간의 평과 곽가의 평을 살펴볼 때 유비에게 만인지적의 칭호가 가지 않은 것은 유비에게 기대하는 혹은 유비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곽가는 유비가 웅재가 있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였고 부간은 유비가 관인유도하여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한다고 하였다. 관우와 장비를 만인지적을 말한 곽가와 부간 모두 유비를 평하는 기준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 이에 반하여 관우와 장비를 호신이라 평가한 진수의 평까지 아울러서 볼 때, 관우와 장비는 장수이고 장수로서 요구되는 용맹함이나 의리나 군사부림 등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3. 관도대전

관우는 조조 휘하에 있을때 장료, 서황 등과 친했는데 처음에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생각해 장료에게 의중을 묻게 했다.

당초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말했다.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조조)께서 후히 대우 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10]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이를 의롭게 여겼다.

부자에 따르면 장료는 조조에게 고하려니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웠고, 고하지 않으려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공(조조)은 군부(君夫)이고 관우는 형제로다!
결국 조조에게 이를 고했다. 조조가 말했다.
주인을 섬김에 그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천하의 의사(義士)로다. 언제 떠날 것 같소?
장료가 말했다.
관우가 공의 은혜를 입었으니, 필시 공을 세워 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입니다.

관우는 관도대전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맡는다. 순유전에 따르면 순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했다. 순유는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자 조조는 경기병을 파견하여 백마를 습격하고 안량을 죽였는데 원소가 대장 안량을 보내 동군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하자,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11]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들 중 관우를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12]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조는 관우가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조가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배송지가 이를 논평하길 "조공은 관우가 머물지 않을 것을 알고도 마음으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떠나는 관우를 추격하지 않아 그의 의(義)가 이루어지게 했다. 스스로 왕패의 도량(王覇之度)을 품지 않고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조공의 훌륭한 행동이다."라며 관우의 의와 조조의 도량을 칭찬하였다.

사실 여기서 관우가 유비에게 버림받은 만큼 관우가 다른 주군을 찾았어도 그렇게 욕을 먹지는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관우는 한날 한시에 죽을 약조를 했다면서 끝내 옛 주군을 찾아서 다시 길을 떠난다. 조조는 관우에게 은상과 벼슬을 무겁게 베풀었으나 관우는 단순히 옛 주군을 찾아 떠난것 뿐만 아니라 지금 아낌을 주고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그가 주는 보물과 포상을 모두 거부하고 떠난다. 만약 관우가 두씨일로 조조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관우는 굳이 그렇게 하고 떠났다. 배송지가 굳이 촉기등을 인용해서 두씨 일화를 소개 했음에도 조조와 관우의 관계를 고금의 아름다운 상례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파악하고 말한듯하다.

4. 삼고초려부터 남군공방전까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를 따라 유표에게로 나아갔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가 삼고초려 이후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13]

208년,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니, 유비는 번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선주전에 따르면 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 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파견해 배 수백 척에 타게 하고, 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조조가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렀고, 유비는 한진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이렇게 관우가 처음으로 수군을 운용한 시점을 사서는 장판 퇴각전으로 기록한다.10만의 형주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퇴각 속도가 느려지자, 유비는 배 수백척을 따로 편성해 정예 병력과 피난민 일부를 싣고 군사 거점이었던 강릉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 선단의 책임자가 바로 관우였다. 즉, 장판 퇴각전은 어느 시점부턴 육로의 유비 본대, 수로의 관우 분대가 하나의 도착지를 향해 도망하는 2개의 국면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후 상상을 초월한 조조군의 추격 속도 때문에 유비 본인부터가 처자를 버리고 빤스런(...)했고, 핵심 장수진이었던 장비, 조운은 제각기 흩어져 후방을 맡거나 유비가 버린 처자를 구하러 역주행하는 등, 전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강릉으로 향한다는 초기 목표는 철저히 분쇄되고, 유비는 간신히 요인들만 추슬러 강릉과도 제법 떨어져 있는 나루터 '한진'으로 퇴각해야했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 이처럼 전황이 예측불허로 흘러갔음에도, 수로에서 강릉을 향하던 관우는 유비가 그를 필요로 하던 매우 정확한 시점에 한진에 도착했고, 생존한 유비와 무리들을 무사히 선박에 태워 피난 작전에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제 시각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유비군이 고립무원의 나루터에서 어떤 최후를 맞았을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장판 퇴각전을 성공으로 이끈 1등 공신은 장비도, 조운도 아닌 관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우가 형남 평정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봉작을 수여받은 것은 이 당시의 공로가 컸다 보는게 맞을 것이다.

제아무리 서로 연락을 취했다한들, 전화는 물론 선박용 수신기조차 없던 그 시절, 퇴각전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더불어 초기 목표가 긴급 수정되는 돌발 상황에서 육로와 수로의 보조를 맞추며 아군의 무사 퇴각에 성공한 역량. 이것이 사서에 기록된 관우의 첫번째 수군 운용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 이후 관우는 커리어 후반기의 거의 모든 전투에서 수군을 대동하게 된다.

촉기에 따르면 이때 하구(夏口)에 있으며 강가를 전전함에 이르자 관우가 분개하며 말했다.
지난날 사냥 중에 만약 저 관우의 말을 따랐다면 가히 오늘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그때는 또한 국가를 위해 그를 아꼈을 뿐이다. 만약 천도(天道)가 보정된다면 이것이 복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느냐!

적벽대전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는 번구에 주둔하며 주유를 혼자 만나게 되었는데 주유는 자신의 일이 바쁘다며 유비가 자기네 진영으로 알아서 오라고 통보해버린다. 이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동맹으로서 가봐야 동맹의 뜻이 맞다고 말하고 주유의 진형으로 떠났다. 아마도 이 둘에게 이런 대접에 납득이 필요했다는 간접증거일 것이다. 주유에게 겨우 3만명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실망한 유비는 이후 주유의 태도에 심히 부끄러움과 기쁨을 느꼈다. 강표전에선 여기에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말을 집어넣었으나 손성은 유비가 이미 도주했는데 훗날의 계책을 품을 마음이 없을것이라며 이가 오인들이 아름답게 꾸미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배송지는 손성의 이 말을 덧붙였다. 자치통감 역시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였다. 산양공재기 등에는 이후 유비가 조조의 군세를 격파하면서 진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관우 역시 유비 휘하에서 참전했을것이다.

이후 선주전을 보면 유비군과 주유군은 조조를 뭍으로 이어가며 추격하였고 마침내 조인이 지키는 남군을 포위하였다. 이를 남군 공방전이라고 하는데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놓았다. 조인이 도주하면 그냥 유비군과 주유군은 남군을 접수하면 그만이니 굳이 조인의 퇴각로를 끊어놓을 목적은 아니었을테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조인의 구원군을 막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는 다른 위나라 장수들의 전에 보인다. 서황전, 문빙전, 악진전 등 각각의 전에 따르면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에 올랐고, 봉역장군의 관위가 더하여졌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했다. 기록을 보면 이들 장수들은 관우뿐만 아니라 유비와 주유의 포위망 자체를 공격하여 와해시키려는 목적이 있음을 할 수 있다. 관우는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얻어맞아가면서 북쪽에서 이들의 본디 목적인 남군포위망 와해를 막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육지인 강릉과 해안인 형성의 양 전선을 동시에 관리하며 적을 상대한 경험은 관우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주를 관우가 맡게된 이유 역시, 단순히 그가 유비군의 2인자라서라기 보단, 한수를 끼고 있는 형주 전역에서 중요한 수륙양용의 역량을 어느정도 증명했기에 이뤄진 인선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강릉전투는 관우의 미래를 앞서 보여준 점도 있는데, 조위의 내노라하는 장수진을 상대로 홀로 분전한 모습이 그렇다. 특히 관우가 맡은 퇴로 차단 임무는, 적의 후방 지원이 있을 경우 차단하는 아군이 도리어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몰살 당할 위험 부담도 큰 양날의 검이다. 이 위험한 임무에서도 관우는 설령 적장의 목을 베진 못했을지언정 벌떼처럼 밀려든 조위 지원군의 협공을 격퇴하며 무사 귀환했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주유와 여몽이 모두 그 용맹에 대한 남다른 평을 남길만큼, 이 날의 관우는 소위 졌지만 잘 싸웠던 것이다.

이러기를 1년, 결국 조인은 이통의 구원을 받아 도주한다. 이통전에는 이통이 관우를 공격해서 조인을 구출했다고 나오는데 이건 국내 인터넷상에 퍼진 사서 번역본의 오류이다. 원문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그것(之)라고 말할 뿐, 이게 관우라고 직접 적어놓지는 않았다. #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관우가 아니라 포위(圍)라고 적혀있다. # 어쨌거나 이통 역시 조인을 구출했을뿐 포위망을 와해시키는데는 실패했고 마침내 남군공방전은 유비-주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하니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5. 청니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

선주전에 따르면 212년, 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조가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선주전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청니 대치인데, 여기서는 단지 유비가 관우의 대치 상황, 승패의 결과 예측만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청니에서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악진전, 문빙전에서는 악진(+문빙)이 관우를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시기가 209년 남군 공방전 때 기록인지, 아니면 212년 청니 대치 때 기록인지 정확하게 적혀있지 않아서 혼란을 준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서는 이를 청니 대치 시기로 보았고, 중국군사통사(1998년 출판)에서는 이를 남군 공방전 시기로 보았다.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선 남군공방전의 시기로 보는 듯 하며 본 위키도 이쪽 기록에 따른다.

한편 이때 관우는 의외의 인물을 받아들에게 되는데 바로 양의 였다. 그는 부군(傅群)을 저버리고 양양태수였던 관우에게 나아갔는데 관우가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양의를 사자로 보내 서쪽으로 유비에게 나아가게 했다는 기록이 양의전에 있다.

유비의 입촉당시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했다. 이때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유비는 촉으로 들어올 때, 반준을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남아 지키면서 주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선주전에 따르면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다만 여기서 임저는 형주 남군 임저현을 말하는 것으로 관우의 관할 구역이었고 마초가 잠시 형주로 왔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온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만났을 가능성도 높고 잠시나마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로 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진 않다.

6. 익양대치부터 한중공방전까지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는 좌씨전( 춘추좌씨전)을 좋아하여, 이를 암송하면 거의 모든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여몽전에 따르면 노숙이 맡은바 임지에 떠나니 여몽이 노숙에게 충고하면서 일렀다.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이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 했다. 이로 인해서 노숙을 위해 5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해당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임무를 맡으셨는데, 그곳도 게다가 관우와 인접한 곳으로 말입니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관우와 마주보게 되었으니까, 간단하건 복잡하든 뭔가를 준비해서 그를 맞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여몽은 은밀하게 노숙을 위해서 세 개의 책략을 말했고, 노숙은 공손하게 그것을 경청해, 비밀로 삼아 발설하지 않았다.

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선주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상여하겠습니다.
이에 손권이 격분하여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長) 오탕과 중랑장 원룡 등이 관우와 결탁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다. 오탕은 유현을 점거하고 있었고, 원룡은 예릉에 있었다. 손권은 횡강장군 노숙을 파견하여 유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탕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여대는 예릉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룡을 붙잡아 참수시켰다.

감녕전에 따르면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이라 칭하고, 직접 정예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수경 역주에서 이르길 현에 관우뢰(關羽濑)가 있으니, 소위 관후탄(關侯灘)으로, 남으로 감녕(甘甯)의 옛 보루와 마주했다. 관우가 밤에 감녕이 배치하는 소리를 듣고 이르길 "(이것은) 흥패(興霸)의 소리구나."라고 한 이후 마침내 건너지 못했다.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는데 주석 오서에 따르면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있어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치 않으면 아니 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관우는 주군인 유비가 오림에서 갑옷을 벗지 않으며 열심히 싸워 얻은 땅을 왜 강탈하느냐는 관우의 항의에 그 자리에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아 관우가 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즉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고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는 관우의 질문인 "우리도 형주에서 같이 위군이랑 싸웠는데 형주에 지분이 있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피땀 흘려 얻은 땅(특히 유비네가 먹은 형남 4군)은 왜 침범한것인데?"의 대답은 되지 못하며 오히려 '형주는 모두 오나라땅'이라는 억지 주장에 가까웠다. 이는 노숙 문서 익양대치 부분에 잘 나와있다.

노숙이 이렇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관우는 이 사람을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유비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이후 217년 노숙이 죽고 여몽이 이 지역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여몽전에 따르면 당초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으며 그 동안 오나라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결속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서주를 공격하는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14]하여, 상대적으로 형주를 공략하기 쉬울거라 여기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으며 강릉성을 새로 수축하고 둔영과 관측소를 준비해 놓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 이렇게 관우가 대비를 철저히 하니 당초 예상과 달리 여몽은 관우의 방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게 된다.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15]과 자신의 아들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유비와 손부인과의 일과 익양대치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라 사신을 상대로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고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한 일이 있었다. 이전부터 계속 형주를 노리던 오나라였기에 익양대치로 종결시킨 노숙도 없는 마당에 오나라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218년, 경기, 위황, 김의가 허도에서 난을 일으켜 전자와 조정을 장악하고 마침내 유비를 불러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그를 치려고 했다. 이때 관우가 강성했으므로 조조는 업에 머물게 왕필에게 허도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이 왕필을 죽이고 관우를 부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219년, 유비가 한중공방전의 승리로 한중왕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 가절월로 삼았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비시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비시를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

"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의 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7. 번성 공방전

7.1. 번성 공방전 초기의 승리

한편, 219년 촉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조인은 관우를 토벌할 목적으로 형주 번성에 진수하고 있었으나 218년 10월 남양인들이 요역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이 태수 동리곤을 붙잡고 관원,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하고 관우와 연합했다. 이후 219년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이는 무제기의 기록인데 이에 관우는 후음과 연계하여 북진을 하여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손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 패배로 위왕 조조는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 허유[16]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17] 어쨌거나 조조는 급히 오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의 7군을 주어 구원토록 하고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당시의 전투에서 위군과 우금, 방덕은 번성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으며 방덕전에 따르면 이렇게 번성 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관우와 방덕은 직접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으나 관우는 죽지 않았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당시 번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방유)이 한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의심하였다. 이른 의심에 방덕은 이렇게 거듭 말하면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온회전에는 아예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 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수몰로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금전에 따르면 그 말대로 이해 가을, 큰 장맛비가 내렸다. 열흘동안 비가 내렸고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이미 군사를 빼고 배로 대기하던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한다.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18]에 타서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때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19]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이 있다. 남향태수가 잡혔다는 것은 이 지역을 이끌던 행정관과 그 휘하 병력들이 관우에게 사로잡혀 해당 지역이 공백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된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괜시리 관우가 유봉 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것이다.

방덕전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여러 위군들을 사방에서 큰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공격하고 일출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고 치열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다.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빚나가는 것이 없었다할 정도로 손수 활을 쏘아 분전했지만 결국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결국 방덕이 장수 한명과 오장 두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20]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사로잡히게 된다.

관우는 방덕의 형제가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는다.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방덕은 이렇게 욕을 퍼부었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7군이 주둔한 번성 북쪽은 면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남양군 등현 북서쪽 인근이다. 즉 관우는 배후에 있는 번성의 공격을 차단하면서 7군과 육전으로 홍수가 날 시기까지 격렬히 싸움을 벌이면서 잡아두다가 홍수가 나자 싸우고 있던 육군을 위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잡아두며 은근히 빼고 배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육지가 물에 잠긴 타이밍에 면수에 있던 수군을 보내 홍수를 피하지 못한 위군에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는 의미가 된다. 전술적 운용에서 관우가 천시를 이용해 조인, 우금, 방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관우 인생 최고의 전성기는 바로 번성 전투였다. 그가 이룩한 커리어 하이인 우금 7군 포획, 방덕 참수의 원동력 역시 다름 아닌 수군이었다. 성이 물에 잠기는 역대급 장마 속에서, 우금을 비롯한 7군은 그대로 수몰된 반면, 10여년간 형주 일원에서 복무한 경험을 살려 수백척의 전선을 준비한 관우는 승리했다. 그는 이 선박만으로 양양을 포위했고, 불어난 물의 흐름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등, 그야말로 수전 스페셜리스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물에 익숙지 않은' 북방 위군을 농락했다.

관우에게 있어선 드디어 공격전에서도 자신의 수전 능력을 입증한 최초의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설령 상대가 수전의 강자들이 아니라한들, 조인, 우금, 방덕은 모두 천하의 내노라하는 장수들이었다. 그 중 방덕을 베고 우금을 생포하며 조인을 포위했다, 이미 이 시점에선 관우 아빠가 아니라 할배가 와도 그를 자제시키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예주 양국, 예주 영천군 겹현, 낙양 인근 사례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21]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성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공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만총전에 따르면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이미 겹 아래에 있어, 허도로부터 이남의 백성이 어수선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또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하였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관우는 면수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후일 오나라에서 양양까지 당도조차 못하고 후퇴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완벽한 적기로 인식했을지도. 번성은 5,6장 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미터에 가까운 높이다. 구원을 보낸 최정예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고, 총사령관은 사로잡혔으며 그의 무리들은 수도 근방을 위협했다.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관우에게는 방덕에서 이마를 화살에 적중당한 일화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 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대야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7.2. 위나라의 반격

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물론 한창 북쪽 업에 있던 조조가 본인의 신병 걱정으로 압박받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22] 여기 있던 헌제가 관우에 호응해 들고 일어난 반란군들에 의해 사로잡힐까 걱정해서였다.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며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조는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에 주둔했다. 8월, 조조는 서황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서황은 조인을 구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서황전에 의하면 이 때 마침 한수가 크게 범람하여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에서 장군 여상을 포위했으나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로 나아가 주둔했다. 오주전 기록으로는 이때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조조는 이에 동남방면의 장료를 관우쪽으로 전진배치시킨다. 당시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온회는 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

218년 김의, 경기, 위황, 길본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들이 호응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관우라는 점에서[23]조조 입장에선 도저히 편안히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번성이 뚫리면 그 다음은 완까지 일사천리고 만약 한중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유비까지 가세한다면? 그렇게 될 경우 어떤 꼴이 날지 모골이 섬뜩했을 것이다.

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24]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 오군의 침공으로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

이렇게 번성 전투의 국면은 자연히 육전의 기량과 세력의 우열로 접어들었다. 우금을 대신해 투입된 서황은 앞뒤로 12영에 달하는 지원 병력이 가세하면서 세력의 우위를 점했고, 이 병력의 지휘관인 은서, 주개 역시 모두 관중과 하북에서 잔뼈가 굵은 부장들이라는 점에서 기량 또한 앞서나갔다. 조조가 거병한 이래 30년간 단련되어 천하 최강으로 성장한 위군이 서황을 철벽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 맹달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군악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25] 미방 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병량고의 군량을 사용해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26]
한편 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크기가 소만큼 한 검은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27][28] 이 돼지 꿈 내용은 연의에서도 나오지만 부하들이 길몽이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전략에서 이르길 관우가 번을 포위하여, 손권이 사신을 보내 그를 도움을 청하며, 사신이 급히 나아가지 말도록 권하고, 다시 주부를 파견해 먼저 이르러 관우에게 알리게 했다. 관우는 그가 느린 것에 성냈고, 또한 스스로 이미 우금 등을 잡았기에, 곧 욕하면서
담비새끼(옥편玉篇, 여우와 담비)가 감히 이와 같은데, 만약 번성이 함락되면, 내가 너를 멸할 수 없겠는가!

손권이 이를 듣고, 그가 자신을 가벼이 여김을 알아, 거짓으로 손수 편지를 써 관우에게 사과하며, 몸소 가는 것을 허락했다.

배송지는 '이미 형주와 양주는 서로 겉으로는 가깝지만 속으로는 사이가 나빠서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며, 군대를 숨겨 몰래 출발했습니다. 여몽전(呂蒙傳)을 살피면 정예병을 배 안에 숨겨, 범인에게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옷을 만들게 했다고 이르니, 이를 근거로 말하자면, 관우는 손권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도 필시 관우에게 마땅히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서로 도와주는 것을 허락했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의 거동을 숨겼겠습니까?'라고 이 기록을 비판하였다. 자치통감의 경우 관우의 손권에 대한 외교적 모욕에 대해선 혼인사자 모욕만을 기록하였다.
10월, 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은 다시 조인의 구원을 꾀한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조엄은 당장 싸우자는 서황 휘하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고 조엄전에 전한다.

촉기에 따르면 서황은 관우와 싸움 도중 사사로이 만나 평상시같이 이야기했다. 이때 서황이 외치길
관운장의 목을 얻는자는 천금을 내리리라!
관우가 놀라고 당황하여 물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앞서 말했듯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서황전에 따르면 이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면서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조조는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지만 환계의 조언에 따라 은서 주개를 파견하고 12영(營)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서황전에 따르면 이때 관우의 군대는 위두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급히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여기에 항복했던 호수와 부방도 죽었다.

동시에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마침 서황(徐晃)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29] 만총은 (이들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으며 만총은 승진하여 안창정후(安昌亭侯)로 봉해졌다. 이렇게 밖에서는 서황, 번성 안에서는 만총이 안팎으로 공격하여 관우는 결국 번성포위망을 걷어내 버릴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관우의 군사가 번성에서 물러났으나 전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관우가 이끄는 촉나라의 배는 면수를 점거하여 양양은 완전히 포위되어 연락이 끊겼다. 아직 위군은 관우를 완전히 몰아낼수 없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오히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의 수군이 면수를 장악하였고 (번성포위망에 있던 병력이 양양으로 물러간 탓인지) 양양은 완전히 위군과 연락이 끊겨 굳건히 포위되었다. 이 상황에서 위군이 정면에서 관우를 격파하려면 3가지의 단계를 겨쳐야만 했다. 우선 1차적으로 면수의 수군을 격파해야 하며 그 후에는 성공적인 도강 작전을 펼쳐서 건너서 군사를 반대편에 주둔시켜야 하고 그 다음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군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작전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가만 놔두었을시 양양이 관우의 손아귀에 들어갈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 손권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고 남군을 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7.3. 관우의 최후

이렇게 서황과 만총이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어내고 있을 무렵, 후방에선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몽전에 이르길 이때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병을 많이 남겼는데 관우가 자신의 뒷치기를 두려워 한다고 알아챈 여몽은 계책으로 병 치료를 명목으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이를 믿고 점차 병사를 번성으로 보냈다. 당초 여몽을 대신하여 육구에 도착한 육손이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30]

이때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삼국지집해 여몽전에 수록된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서 상관은 익양대치 시 서쪽 촉한이 취한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옆이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양측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 상관과 번성은 수백리가 넘으니 관우가 직접 취하진 않았을것이며 관우 휘하의 관리들이 이를 취했을것이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미방과 사인의 투항이 없었다면 관우가 오의 기습을 알았을리라 평가했다.

당시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전 오록에 따르면 사인은 본디 항복할 마음이 없었고 오군의 항복사자인 우번을 내치기까지 했으나 우번이 편지를 보내 내응이 있었으니 이렇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으로 포위된 것이며 이대로 있어봐야 살길은 없고 죽도록 싸워봤자 당신의 일족만 멸살될 것이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협박하니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우번이 이는 속이는 병사이니 사인을 응당 끌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남군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고 하며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자 소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저항없이 항복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여몽을 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번은 한참 미방에게 받은 기물로 주변사람들과 성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여몽에게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인데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는가?'라고 진언했고 여몽은 그제서야 남군으로 들어가 마침 반격을 준비하던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관우가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했다며 조엄전에 전한다. 한편 오나라의 장수 장흠은 함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갔다. 단 장흠전에는 면수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만 있어 실제 관우의 수군과 교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동시에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손에 넣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오주전에 전한다.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관우군의 처자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었는지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31]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했다.[32]

이때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아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를 참수했다. 이는 촉기의 기록인데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리나 거리가 된다며 그르다 평가했다.

이후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내고 제후의 예로 그 시신을 장사지냈다.

8. 사후

장남 관평 관우와 같이 죽었기 때문에 차남 관흥 관우의 후사를 이어 작위를 계승했고 약관의 나이에 시중, 군감군이 되었지만 일찍 죽었다. 관흥의 적자 관통이 후사를 이었지만 또 요절하고 관통이 후사가 없어서 관흥의 서자 관이가 후사를 이었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관우의 시호는 장목후(壯繆侯)라고 했다. 시법에서 장(壯)은 뛰어난 무장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목(繆)의 의미가 좀 나쁜데 명분과 실리가 없다는 의미다. 명나라 학자 정민정은 목(繆)이 곧 화목할 목(穆)과 의미가 통하고 옛 시호에서 둘을 혼용한 예가 많으니 화목할 목(穆)의 시법인 덕을 펴고 의로움을 지켰다는 뜻으로 보았다.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 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로 관월을 낳았다.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지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오나라에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후 서진의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이어져왔다. 다만 강릉현지는 위의 관후조묘호기와 같이 너무 후대의 기록이라는 문제가 있으며 그나마 금석문 기록인 관후조묘호기보다도 신뢰성이 높다고는 볼 수 없다.

당나라 시대의 익주명화록에 따르면 촉왕이 조충의에게 명하여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2001년,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이 나타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족보에 따르면 관중진은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이다. 익주에 있던 차남 관흥의 자손들은 방회에 의해서 몰살되었지만 형주에 남아있던 관평의 자손들은 계속 대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호북성 공안현에 관우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 족보는 내용이 충실해서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된 흔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1] 관우의 고향은 중국 최대의 염호인 해지(解池) 근처이기 때문에 소금의 밀매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 관우의 고향에서 전승되는 관우 관련 일화엔 소금에 관련된 일화가 많다. [2] 조조가 관우를 처음 본 것은 영웅기 기록에 따르면 영제 말년인 188년 경이었을 공산이 크다. 유비가 그때 조조와 함께 패국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조조 역시 관우를 꽤 오랜기간 본 사람이란 뜻이다. [3] 유비는 161년생이니 이 기록대로면 관우는 유비보다 1살 더 많았던 것이다. [4] 그러나 관후조묘비기는 너무 후세의 책이라서 신빙성이 낮다. [5]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조운이 번씨를 취하지 않은 예를 두고 남의 여자를 탐내는 관우보다 도리가 맞았다며 관우를 디스하는데 후한말에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새 아내를 들이는 경우가 많았고 전란 중 멸망한 세력의 아내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경우가 흔했기에 관우 역시 그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할 듯 싶다. 그만큼 조운이 당대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는 얘기도 되고. [6] 진의록은 두씨를 버린것을 후회했는지, 처를 빼앗아간 자를 섬기느냐는 장비의 말에 유비네를 따라갔다 중간에 마음을 돌려 도망하다가 장비에게 죽었다. 진의록의 기록을 보면 조조와 두씨와의 관계를 애매하게 끊으려다가 갈팡질팡하게 되어 살해당한 케이스로 보인다. [7] 이때 무제기에서는 관우의 투항에 대해서 降(항복)이란 글자를 쓰고 있으나 관우전과 선주전에서는 禽(생포)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관우는 고립된 상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패배하여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8] 사실 양익은 전쟁의 핵심인고로 양익 기병의 지휘관으로서 훌륭하다는 것은 대단한 찬사다. 이 시기 특정 방면을 이끌 수 있었고 실제로 성과를 낸 지휘관은 삼국을 모두 합쳐도 대단히 희귀하다. [9] 한편 이에 대해서, 후한말 별부사마의 운용을 보면 본래 유연성을 위해 독립적인 작전권을 얼마간 인정해주던 별부사마라는 직위를 세력 내 자신의 핵심 라인에게 수여하여 다른 인물들과 급을 나누고, 이들에게 '별부', 즉 지속되는 군사적 기반을 부여함으로서 수여자 자신의 안정적 입지를 도모하는 인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 [10] 복숭아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은 후대의 창작이지만 적어도 같이 죽기로 맹세했다는 것만큼 역사적 사실이다. 즉 관우의 목숨은 관우만의 것이 아니며 자유의 몸도 아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만약 유비를 꾸준히 보좌하지 못하고 관우 혼자 일찍 죽어버린다면 이는 오히려 유비에게 불충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우는 잠시 조조에게 의탁하지만 그 조조에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피력한다. '자신은 조조가 아닌 유비의 사람이며 당신이 내게 준 은혜를 갚는대로 떠날 것'이라고. 그럼에도 조조가 그런 관우를 참수하지 않고 대접해준 것이지 관우가 진정 조조를 섬겼던 게 아니다. [11]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 안량을 찌르고서 그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이 휘개를 파성넷의 번역문에서 “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라고 해놨는데, 호삼성이 휘개는 융거(병거)의 덮개라고 주석에서 해석해 놔서 그렇다. 휘(麾)는 군진(軍陣)에서 사용하는 대장기이고, 개(蓋)는 그 대장기의 꼭대기 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니, 즉, 휘개라 하면 높다란 대장기 꼭대기이다. 삼국지사전 (산동교육출판사), 고대한어사전 (상무인서관) [12] 보통 형주 무릉군의 속현 중에 한수(漢壽)현이 있으므로 이 한수(漢壽)현의 한 정(亭)을 식읍으로 받은 것으로 보는 설이 많은데, 정후(亭侯)의 명칭에 현 이름을 붙이는 것은 통례에 어긋나므로 한수정(漢壽亭)이라는 별개의 정(亭)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3] 연의에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를 소재로 하여 아예 제갈량이 자기 실력을 보여줘 둘의 불만을 직접 가라앉히는 걸로 각색한다. [14] 정작 여몽이 죽고나서 손오는 이전과 같이 합비를 공략해 서주, 예주를 지속적으로 노렸다. [15]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민간 전승에선 관은병이라고 한다. [16] 두습 문서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사실은 옮기기가 귀찮아서… [17]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8] 번성 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위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떤일로 없었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이다. [19] 물에 빠져 죽거나 관우의 공격에 죽은 위군은 제외한 수치다. 원래 7군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병제를 적용해 10만 1500명 정도의 대병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20] 연의에선 주창에게 자맥질 싸움 끝에 사로잡힌다. [21] 육혼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위와 대적하게 했다. [22] 아직 한나라의 명맥은 남아 있었고 여기서 말하는 도읍은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수도 허창'을 뜻한다. [23] 삼보결록주에선 경기, 위황의 난 당시 아예 관우가 강성하여 조조는 업에 가 있고 왕필에게 허도의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까지 있다. [24] 관우는 배를 타고 공격하였다고 한다. [25] 계획대로 지원군이 이뤄졌으면 한창 기세가 강한 시점에 원군이 합류해서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봉의 원군은 관우군을 구원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군 개념으로 서황에게 맞설때 관우가 겨우 5천의 군사로 맞섰는데, 그만큼 관우에게는 군사력 보충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설령 유봉의 원군이 늦었다해도, 관우의 혈로가 형주 남부쪽이 아니라, 상용쪽으로 열렸을수도 있었다. [26] 당연하지만 번성에 있던 관우가 직접 털었을 가능성은 낮다. 관우 휘하의 부하들이 했던지 후방의 미방이 했던지 였을것인데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당시 보급담당자인 미방이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약탈의 시점에 이미 오나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건 아래에서 얘기하자. [27] 삼국지집해에서는 이 꿈의 의미를 여몽의 이름자 몽(蒙)이 돼지(豕)를 포함하기 때문에, 여몽이 뒤를 습격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28] 결과적으로 흉몽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꿈의 해석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답이 없으며, 연의가 아닌 정사인 이상, 관우가 죽었다는 결과로 이 꿈이 어떠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역추정 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29] 서황측이 몇번 화살로 편지를 보내 지원군이 온 사실을 알렸다. [30] 본디 육손이 소속된 육씨 가문의 가문의 가장이었던 육강이 손책에게 죽었으므로 관우는 육손이 손씨가에 별 달리 협력하는 입장이 아니라도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31] 촉의 장수였던 마충과는 동명이인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으로 역사서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아 하급 장수로 추측된다. [32] 이런 기록을 보면 나관중 가정본 삼국연의나 신삼국을 비롯한 몇몇 매체에서처럼 관우가 저항을 포기하고 신선같이 태연하게 죽었다기 보단 창천항로나 삼국지 13 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끝까지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고 주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군세를 몇기의 기병만으로 돌파하려다가 오군에 둘러싸여 처절하게 난투전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잡혀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