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2:24:15

계후 호이파나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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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건륭제의 계후
辉发那拉氏 | 호이파나라씨
파일:La Concubine.jpg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의 계후[1]
생몰연도 1718년 3월 11일 ~ 1766년 8월 19일
시호 繼皇后[2]
배우자 청고종 건륭제 아이신기오로 훙리
민족 양람기 만주⇒ 정황기 만주⇒ 양람기 만주
지위 측복진⇒ 한(嫻)비⇒ 한귀비⇒ 황귀비섭육궁사[3]⇒ 황후
자녀 황12자, 황5녀, 황13자
능묘 유릉비원침[4]

1. 개요2. 생애3. 전대미문의 황귀비섭육궁사4. 영총을 누리는 계후
4.1. 건륭 30년 남순에서의 일 4.2. 왜 유폐되었나
4.2.1. 추측1. 조선의 기록4.2.2. 추측2. 영귀비의 황귀비 책봉, 태자 문제4.2.3. 추측 3. 극심한 우울증 및 정신이상설
5. 자녀들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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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 양람기 사람인 좌령 나이포의 딸로, 건륭제의 2번째 황후. 건륭 30년에 총애를 잃고 북방으로 보내져 쓸쓸히 죽고 시호도 없이 장례도 황귀비의 예로 치러진 것으로 유명한 그 황후이다. 계황후의 계도 칭호가 아닌 계후라는 뜻의 계이다. 공식적으로 폐출만 안된 것이지 사실상 폐후 취급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사서에는 그저 나라씨라고 나온다. 어느 나라씨라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에 호이파나라씨(한국어식 독음으로는 휘발나랍씨)로 밝혀졌다.

2. 생애

해서여진의 휘발국주 왕기누의 자손이다. 아버지는 정4품 세습좌령이었다. 옹정12년(1734년) 11월 8일, 옹정제의 명으로 16세의 휘발나랍씨가 보친왕 아이신기오로 훙리과 결혼하였다. 휘발나랍씨가 보친왕 훙리의 측복진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휘발국주의 자손이고, 비록 아버지의 관직은 낮았으나 조부의 관직이 정2품 부도통이었고, 백부가 정3품 참령이었기 때문이다. 가세 자체는 중상급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왕부에 들어온 지 9개월 후 옹정제가 승하하고 보친왕이 제위를 이어받았고, 옹정 13년(1735년) 9월 24일 측복진이었던 휘발나랍씨는 비(妃)에 봉해졌고 봉호는 한(嫻)이라고 내무부에서 정했다. 한(嫻)은 <홍칭통용(鴻稱通用)>에서 만주어로 “elehun”, "평안하고 고요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건륭 10년(1748년) 정월 23일, 한귀비로 진봉되었고 11월 17일에 한귀비 책봉례를 올렸다.

3. 전대미문의 황귀비섭육궁사

건륭 13년(1748년) 3월 11일, 건륭의 정실황후 효현순황후 부찰씨가 병사하고 중궁황후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7월 초하루에 한귀비를 황귀비섭육궁사로 진봉하여 육궁을 통솔케 했으며, 같은 달에 일족을 양람기에서 정황기로 대기하였다.[5] 건륭 14년(1749년) 4월 5일 휘발나랍씨를 황귀비섭육궁사(皇貴妃攝六宮事)로 책립하였다.

휘발나랍씨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옹정제가 직접 사혼시킨 측복진이라 권위가 상당했고[6], 가장 지위가 높은 비빈이었기 때문이다. 한귀비는 휘발국주의 자손이나 가세 자체는 중상급인데도 엽혁국주의 자손이고 가세가 혁혁한 서비 예허나라씨를 제치고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옹정제 시대부터 예법이 확립된 탓이다. 강희제 시대에는 예법이 확립되지 않아 이례적인 경우가 자주 일어났고 강희제의 사촌인 본래 비의 대우를 받는 서비였던 각혜황귀비가 강희4비를 제치고 귀비로 오르는 등 후비의 출신 배경이 중요했으나 옹정제가 만주 명문세가들을 때려잡고 황권을 강화한 이후로는 후비의 출신 배경이 이전만큼 중시되지 않았고[7] 예법이 확립된 상태였기에 비가 귀비를 제치고 황후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륭제는 휘발나랍씨가 황후가 되기 전, 황후로 책봉하겠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황후는 효현황후뿐인데 황태후가 황후가 없어서 상심이 크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세운다며 칙서에서 밝혔다.
짐은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국사를 바쁘게 보내고 있으며 후궁의 내정은 이제껏 효현황후가 맡아왔다. 황후는 성모황태후를 극진히 모시면서 언제나 기쁘게 해드렸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정성껏 일을 처리하는 등 경중을 잘 가늠했다. 그리하여 빈부터 궁인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지키고 은혜를 고맙게 여겼으며 마음속으로 그를 잘 따랐다. 10여년 동안 짐이 국사에 전념하고 궁중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천하의 어머니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이는 천지가 융합되고 일월이 빛나는 것과 같다. 짐은 아직 나이가 젊어 궁내를 다스림에 후궁을 다스릴 황후가 필요하다. 한귀비 나라씨는 선친께서 정해주신 측실로, 단정하고 성품이 어질다. 응당 조상들의 규례대로 한귀비 나라씨를 황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짐은 효현황후에 대한 마음의 짐이 남아있어 황후가 별세한 지 27개월이 지나는 날에 길례를 올리고자 한다. 이렇게 해야만 짐의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에 어명을 내리는 바이다. 짐은 황후와 20여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깊은 은정을 맺었다. 그래서 새 황후를 책봉하려니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사실 27개월도 짐에게는 너무 이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성모황태후께서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짐이 자주 비빈과 손군들을 거느리고 문안을 올리지만 황태후께서는 중궁이 비어있는 터라 언제나 서글퍼 하신다. 이에 성모의 분부를 받들어 그 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후궁에 할 일이 태산 같아 확실히 이를 관리할 수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계황후가 받은 대우를 이해하기 어렵다. 황태후의 명으로 황후로 봉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후비 책문엔 황태후의 자애로운 명이라는 말이 다 붙는다.

조강지처를 그리워하면서, 휘발나랍씨가 황후가 되고 다음해, 건륭제는 효현순황후에게 바치는 시에 "어찌 새 금이 끝내 미치지 못하는가. 옛 검을 구해 서로 오래도록 맞네(豈必新琴終不及,究輸舊劍久相投)"[8]라며 효현순황후를 추켜올리고 계황후를 까내리는 표현을 썼다. 이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 시만으로 계황후를 폄하하기엔 계황후가 누린 총애와 대우가 전례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계황후가 받은 황귀비의 자리는 단순 황귀비가 절대 아니다. 그녀가 받은 작위는 "황귀비섭육궁사"로 사실상 황후의 자리에 가까운, 즉 정실에 준하는 자리이다. 황후가 가지는 권한을 모두 누리며, 복색도 황귀비의 복색이 아닌 황후의 것을 사용하는 자리이다. 오로지 "황귀비섭육궁사"만이 99% 황후를 대신 할 수 있으며[9] 그냥 단순 황귀비(특히 효의순황후)들은 다른 귀비나 비랑 권한을 나눠 받아야 했다. 대우도 정실보다 측실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보통의 황귀비와 구분되는 황귀비섭육궁사의 또 다른 예는 효전성황후가 있다.

또한, 건륭제는 청나라에서 나라씨의 황귀비 책립조서를 천하에 반포할 때 이렇게 말했다.
國朝順治十三年、冊立皇貴妃。 皇曾祖世祖章皇帝升殿命使翼日頒詔天下。典至崇重。今應仿效前規。
국조 순치 13년, 황귀비를 책립하였다. 황증조 세조 장황제께서는 승전(升殿)하시어 다음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게 하셨다. 존숭할 일이니 지금 이 전례를 응당 받들어야 한다.[10]

이런 사례는 청나라에서 동악비와 나라씨 둘뿐이다.[11] 동악비는 황귀비이면서도 책례를 치를 때 순치제가 황후 책례처럼 황태후에게 존호를 바쳤는데, 나라씨 역시 책례를 치를 때 건륭제가 황태후에게 존호를 바쳤다. 나라씨의 황귀비섭육궁사 책례는 황후와 동격이었으며, 후대의 황귀비섭육궁사도 같았다. 이는 동악비도 받지 못한 영예였다. 나라씨가 다음 중궁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황후에 준하는 대우를 미리 받을 이유가 합당하다는 것이다.

4. 영총을 누리는 계후

건륭 15년(1750년) 7월 초 10일 교지가 내려져 휘발나랍씨가 황후로 봉해졌다. 8월 초2일에 황후 책봉례가 거행되었고 16일에는 아버지 좌령 나이포가 1등 승은공으로 추서되었고 조카 눌소궁(訥蘇肯)이 1등후로 책봉되었다. 휘발나랍씨는 중궁에 오른 뒤 강남순행, 조상에 대한 참배, 목란사냥 등등 빠지지 않고 모두 건륭과 함께 했다. 황후에 오른 지 1년 반 만에 건륭 17년(1752년) 황12자 영기(永璂)를 낳았고 이듬해에 황5녀를 낳았으며 건륭 20년(1755년)에 황13자 영경을 낳았다.

이 시절, 계황후가 총애받지 못하고 박대받는 황후이며 영귀비가 실세라는 인식이 있으나 현재 밝혀진 기록들을 살펴보면 실상은 다르다. 계황후는 총애받는 황후였으며 영귀비가 아무리 총비라 할지라도 그 권위를 넘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영귀비는 어디까지나 건륭제의 총애 외에는 기댈 자리가 없는 총비에 지나지 않았다. 영귀비는 고관대작을 지낸 가족이 한 명도 없으며 건륭제가 이 집안의 빚을 탕감해줘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에 반해 계황후는 가문이 대단한 권세를 누리지 않았으나 엄연히 해서여진 4국의 자손이었으며, 조카 눌소궁이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후작위와 정2품 부도통을 지내고 있었다. 또한, 나라씨가 계후라 할지라도 황귀비섭육궁사로서 황후와 동격의 책례를 치른 뒤 황후 책례를 또 치르면서 생긴 권위를 어느 후궁이 이길 수 있겠는가? 나라씨의 아들 영기의 권위도 효현황후의 아들보다 뒤떨어진다고 할 수 없었다. 계황후의 아들 영기의 이름에 쓰인 璂는 천자의 관에 사용하는 피변 꾸미개를 뜻하는데, 이는 총 12개다. 영기가 12황자라는 점과 같이 보면 사실상 이름으로 다음 황위 계승자라고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기는 태어날 당시 적장자였으므로 건륭제의 기대가 컸다.[12]

건륭제는 이렇게 계황후를 존중하고 총애했으나 계황후의 가족사는 매우 불행했다. 1755년~1757년 사이 가족을 셋이나 잃었기 때문이다.[13] 이 이후로 청나라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계황후가 불교에 심취했다고 기록되어있다.

4.1. 건륭 30년 남순에서의 일

건륭 30년 정월에 계황후는 건륭과 함께 네 번째 남순을 떠났다. 남순 초기만 해도 부부생활에 문제는 없는 듯 보였다. 여행 도중에 건륭이 나랍황후의 48세 천추를 축하해줬다. 윤2월 18일 항저우에 와서 아침식사 때 건륭이 귀한 음식을 하사하였으나 저녁 식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황후의 얼굴은 볼 수 없었고, 건륭은 영귀비 위씨와 용비 화탁씨, 경비 육씨와 함께 지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윤2월 18일에 화석화가공주와 부마 복륭안을 시켜 황후를 수로를 통해 경성으로 보냈던 것이다. 청나라의 '상유당(上諭檔)'에는 "윤이월 18일 건륭이 복륭안에게 휘발나랍씨를 모시고 수로를 통해 경성으로 보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순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건륭은 황후의 책보 네 부(황후, 황귀비, 귀비, 비)를 거둬들였고 친정 가문을 정황기에서 옛 소속인 양람기로 강등시켰다.[14] 휘발나랍씨를 모시는 궁녀를 2명 두었는데, 이는 후궁 신분 중에서 가장 낮은 답응에 준한 것이었다. 계황후는 폐후되진 않았으나 유폐되었고 건륭 31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4.2. 왜 유폐되었나

留京辦事王大臣의 奏文를 보니 황후가 본 월 14일 未時에 薨逝하였다고 아뢰었다. 황후는 책립된 이래 지금까지 덕을 잃은 적이 없었다. 지난 봄 짐이 황태후를 모시고 江蘇, 浙江 지역을 巡幸하여 황태후를 모시고 즐거움을 나눌 때 황후의 성격이 갑자기 평소와 달라지더니 황태후 앞에서 삼가 효도를 다할 수 없었다. 杭州에 이르러서는 거동이 더욱 정상에서 어긋나고 행적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어 먼저 북경으로 돌아가 궁에서 조섭하게 하였다. 이제 일 년여가 지나 병세가 날로 극심하여지더니 마침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는 실로 황후의 복이 천박하여 聖母(성모)의 자애로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짐의 은혜를 기리 받을 수 없던 것이다. 황후가 저지른 일의 어그러짐을 논한다면 바로 내가 폐출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짐은 황후의 名號를 보존하게 하여 이미 격외의 용서를 하였다. 다만 장례의 의전이 孝賢皇后(효현황후)와 동등하게 따르는 것이 편치 않으니 喪禮는 皇貴妃의 예에 준하여 실행할 것을 내무부 대신과 협의하여 받들도록 하고, 이 유시를 적어 中外에 알리도록 하라
위위 전언은 건륭 31년 7월 5일 목란사냥 중이던 건륭이 나랍황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한 말이다. 여기서 건륭제는 황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미친 짓을 하였고 자신과 태후에게 불경하게 대했다고 욕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폐출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하지만 실제 계황후의 장례는 겉모습만 황귀비의 예였지 실상은 빈의 대우로 장례를 치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계황후의 사정에 대해서, 건륭제는 명확하게 얘기해준 것이 없었다. 황실의 얘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던 탓에 제대로 된 사관기록이 없으며, 황실 사람들 간의 비밀로 붙여진 듯하다.

이에 관해서 떠도는 이야기 중 하나가 건륭제의 여자문제 때문에 크게 싸워 계황후가 홧김에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이다. 건륭제가 남순 도중에 비구니와 동침했고 그걸 계황후가 발견하고 분노했다는 내용. 그러나 이런 여자문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우선 건륭제의 여성편력 이야기는 후대 한족들에 의해서 나온 이야기가 많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한족들은 한족의 우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던 건륭제를 까내리기 위한 야사를 많이 만들어냈다. 대만에서도 이러한 얘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후대의 얘기 중 하나가 건륭제가 전씨라는 한인 여성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역시 이 얘기도 야사에 불과한 이야기이며 사실이 아니다.

또 하나는 어느 황제든지 여성편력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에 비하면 여성편력은 심하지 않았다. 수녀선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후궁들이 들어오니 후궁은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건륭제는 89세를 살면서 자식을 26명 두었는데, 이 중에서 자식을 여러 명 낳은 후궁은 보친왕부에서부터 함께한 비빈들이 대다수였다. 효현순황후, 숙가황귀비, 순혜황귀비, 철민황귀비, 유비가 있다. 왕부 시절부터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아들을 낳은 사람은 서비 효의순황후 뿐이며, 공주까지 넓힌다해도 흔귀비 돈비가 추가될 뿐이다. 건륭제의 총애는 특정 사람에게 몰빵되었다는 걸 보면 여성편력의 이야기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4.2.1. 추측1. 조선의 기록

아직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하나, 대강 황제가 특별히 총애하는 귀비 하나가 있으니, 황후와 싸움하는 연고로 황제에게 죄를 얻어 장차 폐할 擧措(거조)가 있을 것이로되, 아직 결단치 아니 하였는지라, 방물 중에 황후에게 바칠 것이 있으니, 중국에서는 13성에 詔書(조서)하여 황후의 방물을 바치지 말라 하였으되, 외국은 미리 알게 함이 좋지 않다 하여, 예부에서 의논을 결단치 못하였는 고로 바칠 기약이 없다 하더라
조선 측의 기록에서 홍대용과 박지원이 전하는 소문에서 계황후와 건륭제가 총애하는 후궁(향비 혹은 용비)의 모함으로 쫓겨났다고 되어있다. 계황후가 귀한 구슬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구슬은 황후의 시위관의 집에서 나타났다. 시위관의 몸에서 황후의 필체와 같은 편지가 발견되고, 시위관은 죽었다. 건륭제가 계황후를 의심하며 유폐했고, 음식을 잘 주지 않았다. 이에 화난 계황후가 건륭제의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되어있다. 출처

4.2.2. 추측2. 영귀비의 황귀비 책봉, 태자 문제

중국에서는 계황후 문제에 대해서 태자 문제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고 여긴다. 조선의 기록에서 시위와의 불륜은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긴한다. 만약 황후가 바람을 폈다면 정말 폐출되어 죽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간에 전해지다가 이렇게 와전된 듯싶다. 홍대용과 박지원의 기록에서 한쪽은 귀비, 한쪽은 용비를 지목한 것으로 보아 후궁 간의 암투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시 후궁의 쟁패는 훗날 효의순황후로 추존되는 영귀비 위씨였다. 영귀비는 후궁이 된 이후로 연달아 4남 2녀를 낳을 정도로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15]

당시 영귀비 소생의 15황자 영염(훗날의 가경제)은 6세에 불과했고, 건륭제의 나이는 이미 50을 훌쩍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역대 청나라 황제들의 나이를 보면 건륭제가 죽을 때가 다가왔다는 거다. 계황후 유폐 사건 이후 30년을 더 살지만.. 당시 사람들은 건륭제가 이렇게 장수할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차기 황제를 누구로 고르냐가 당시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건륭제는 이미 효현순황후의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영기에게 후계자임을 암시하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더군다나 가경제가 황위를 이었을 때 건륭제는 위가씨를 두고 아들로 인해 황후가 되었을 뿐이라며 황후와 동격의 예로 추존해주지 않는 등, 귀천의 구분에 대해 지극히 냉정한 편이었다.

4.2.3. 추측 3. 극심한 우울증 및 정신이상설

건륭제가 밝힌대로 계황후가 정말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서 계황후를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정신건강에 대한 개념이 미약하기 그지없던 시대에 정신질환자는 가문과 일족의 수치였으며, 증세를 방치하고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왕가에서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 자가 나오면 군주가 유폐시키고 다른 가족들은 외면했다. 후아나 1세가 이러한 케이스다. 계황후와 동시대를 산 사도세자는 정신 질환이 방치되다가 극심한 수준으로 심화되어 결국 아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과거의 인물인 계황후가 정말로 정신병이 있는지 진단할 수 없으나 건륭제가 보기에는 계황후가 미쳤다고 판단할만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계황후는 1755년~1757년 사이에 둘째 아들, 막내딸, 친정 어머니를 줄줄이 잃었다. 이 시기부터 계황후가 불교에 의지하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남순 사건 당시 계황후는 갱년기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참고 참다가 결국 남순 중에 어떤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건륭제는 계황후 유폐 사건에 대해 일관적으로 당혹감을 내비치고 있다. 공식적인 기록 뿐만 아니라 그는 눌소궁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서도 계황후가 출가하겠다면서 머리를 잘랐다며 자신이 받은 충격을 토로하고 있다.

이 설을 따른 작품이 《 연희공략》과 《 화광여인》이다.

5. 자녀들

  • 황12자: 애신각라 영기(건륭 17년 4월 25일 출생 ~ 건륭41년 정월 28일)
    계황후가 낳은 첫 아이이자 당시 유일한 적자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은 후 처지가 불우해졌고 아버지 건륭제보다 먼저 죽었다. 동생인 가경제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형제들끼리 우애가 깊은건 좋은 일이지만, 아버지의 냉대를 받았다는 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유일한 적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자식이 혼인해서 나가면 무릇 친왕이든 군왕이든 패륵이든 지위를 올려주기 마련인데, 12황자는 죽은 후에도 건륭제가 시호도 주지 않고 추봉도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 건륭제가 죽은 후 가경제가 다라패륵으로 추봉해주었다.
  • 황5녀: 건륭 18년 6월 23일 출생 ~ 건륭 20년 4월 22일 - 요절
  • 황13자: 애신각라 영경(건륭 20년 12월 31일 출생 ~ 건륭 22년 7월 4일 - 요절

6. 미디어 믹스

  • 황제의 딸 - 황후
    1부와 2부의 메인 악역. 제비와 자미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심복인 용상궁과 함께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두 사람을 괴롭힌다. 2부 마지막에 그녀의 악행이 모두 밝혀져 황제에게 내쳐질 뻔하나 황후를 용서한 두 공주에 의해 벌을 면한다. 이후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두 사람의 혼례복을 준비하며 화해한다. 3부에서는 황제의 총애를 잃어버렸지만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조용히 살아간다. 이후 항주로 갔을 때 기생 하영영에게 홀딱 빠진 황제를 염려하지만 분노만 사고 역사대로 머리를 자르며 항의하자 빡친 황제에 의해 궁으로 강제귀환당하고 낡은 처소에 구금된다. 구금 생활 중 점점 건강이 악화되다가 후반부에 병에 걸려 사망하고 용상궁은 황후가 죽고 자살한다.
  • 연희공략 - 휘발나랍 숙신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인이라서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며 극중에서 잠깐이지만 어머니로 나오는 배우 대춘영 씨는 황제의 딸에서 계황후 호이포나라씨로 나오는데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딸이나 연희공략과 비슷한 시기의 방영된 여의전과 비교하면 불우한 말년을 잘 알 수 있다.
  • 화광여인 - 황후
    계황후의 초상화(위 참조) 그려준 프랑스인 궁정화가 장 드니 아티레와의 금지된 사랑을 다룬 프랑스 중국 합작영화이다. 판빙빙이 계황후를 연기했다.
  • 궁정계
    주인공인 소사월이 계황후다

[1] 해당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이자 예수회 선교사였던 장 드니 아티레[17]가 그린 "La Concubine"[18]이다. 유귀비의 초상화라는 설도 있다. 건륭제의 황후들과 빈 이상 후궁들의 초상화를 보면 효현황후와 고귀비는 명황색 황포를 입고 있고, 비는 이보다 짙은 황색 용포를 입고 있는데 이 초상화가 그러하다. [2] 계(繼)자가 바로 이을 계라는 뜻으로 제대로 된 시호도 없으니 그냥 효현순황후의 뒤를 이은 황후라는 의미일 뿐이다. [3] 한황귀비가 아니다. 책문 모두 황귀비섭육궁사, 섭육궁사황귀비라고 칭하지 한황귀비라고 칭하지 않는다. 봉호 따위가 붙을 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순혜황귀비 소씨와 함께 합장되었다. [5] 청의 황후는 만주족 상3기여야 했기 때문. 양람기는 하5기에 속한다. [6] 일반적으로 황족의 측복진, 첩들은 그 황족의 속인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옹정제는 본래 양백기 옹친왕이었기 때문에 옹정제와 잠저시절부터 함께한 후궁들은 양백기 속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황자의 측복진을 선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렇게 사혼된 측복진은 일반적인 측복진보다 지위가 높다. 그렇기에 건륭제가 휘발나랍씨를 황후로 책립한 이유로 매번 이를 강조한 것이다. [7] 옹정제의 효경헌황후부터가 명문세가 출신이 아니라 내무부 포의에서 출세한 케이스다. [8] 효현순황후가 서거한 후 삼 년이 되어 쓴 시다. [9] 100%는 아니다. 건륭제와 공물을 바쳐야 하는 조공국은 나라씨가 황후의 권위는 누려도 아직 황후는 아니므로 황후로서 진행하는 일부 행사와 조공국의 하전 등은 명실상부한 황후가 된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10] 건륭제가 이 조서를 반포한 해도 등극 13년째다. 그러니 이를 기념해서 동악비의 전례를 본받겠다는 뜻이다. [11] 동악비는 청나라 최초의 황귀비지만 황귀비섭육궁사 외의 황귀비들은 동악비만한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황귀비섭육궁사>동악비>황귀비라고 보면 된다. [12] 청나라가 적서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선처럼 서자의 출세를 막지 않을 뿐이지 초기부터 적서를 따졌다. 적서를 따지지 않는 나라가 적출 공주와 서출 공주의 대우를 구분하겠는가? (서출 공주가 고륜공주로 봉작받을 때도 있으나 적출 공주와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는다) 또한, 건륭제는 7황자 영종이 죽었을 때 황실에 오래도록 적자가 계승한 일이 없음을 한탄한 바가 있을 정도로 적자를 중시했다. [13] 황5녀는 1755년 요절, 생모 낭가씨와 영경은 1757년 졸하였다. [14] 청나라 황실에서 황태후와 황후의 친가는 원칙적으로 황제 직속의 정황기 또는 양황기 출신이어야 했다. 이 때문에 새로 황후가 되는 사람과 황제의 생모가 후궁 출신이면 황제는 이들의 일족을 정, 양황기에 편입시켰다. 계황후의 친정을 양람기로 강등시켰다는 건 그녀를 황후 취급을 안 하고 후궁으로 되돌린 꼴. [15] 사실 1759년에 임신을 한 번 했으나 유산했다. 즉, 총 7번의 임신을 했으며, 첫 임신부터 유산한 아이까지 연속 임신이었다. 당시 영귀비가 얼마나 총애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16]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극중에서는 옹정제의 황후 효경헌황후의 조카로 설정되었다. 또 앞서 언급했듯 실제로는 효성헌황후의 추천으로 입궁했으나, 극중에서는 오라나랍 의수의 뜻에 따라 입궁한 것으로 나왔다. 또 극중에서는 대단한 명문가 출신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엄청난 집안 출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권세가들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