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역사의 숙가황귀비 김씨는 효의순황후와 더불어 건륭제가 매우 총애했던 후궁으로 유명하다.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며 그에 걸맞게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가(嘉)의 봉호를 받고,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연달아 4명이나 낳으며 순탄하게 가귀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가귀비가 낳은 4명의 아들들도 모두 황족의 작위 중 최고위인 친왕으로 책봉되었다. 그만큼 건륭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으나 병에 걸려 황귀비로 책봉할 틈도 없이 죽어 사후에야 추증되었다. 그래도 숭경황태후 뉴호록씨도 가귀비를 좋게 보았던 모양인지 그녀가 죽은 직후 황귀비로 추존시키게 하였다.
- 숙가황귀비의 친정 가문도 범상치 않다. 숙가황귀비의 친정인 김씨 일가는 조선계 포의라고 무시당하기는 커녕 건륭 연간보다도 훨씬 이전인 강희 시절부터 정황기 포의로 시작했고, 이름없는 아무개도 아닌 무려 순치제의 유모를 배출하고[1] 이를 통해 황실 일가와 친분을 쌓으며 대를 이어 상서를 배출하던 가문이였다. 그래서 조선 연행사들이 청에 올 때마다 김씨 일가에 대한 로비에 신경쓰며 뇌물도 많이 주고받았고, 조선으로 보내는 사신단에도 많은 김씨 일족을 역관 등의 직책으로 끼워넣던 신흥 명문가였다.[2] 심지어 이 모든게 조선 출신의 김씨로서 쌓은 명성이었다![3] 이후 숙가황귀비 소생의 아들들은 가경 연간에 친왕과 군왕에 책봉되었으나 모계가 명문가라고는 해도 어쨌든 포의 집안 출신인지라 황족으로써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이런 이복형제들의 신분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가경제는 숙가황귀비의 일족을 긴기야씨로 사성하여 기분 니루로 대기시킨다.[4]
- 숙가황귀비의 막내아들인 11황자 영성은 건륭대에 친왕으로 책봉된 황자 3명[5] 중에 하나로 이복형 5황자 영기가 죽은 이후 이복동생인 영염과 황태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영성은 문무중에서 문(文)에 능했는데, 만약 무술에도 능했다면 태자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무술에는 큰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질이 뛰어나 청나라 친왕들 중에서도 서예로 유명했다.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했다고 하나 영염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영염이 가경제로 즉위한 후에는 건륭 말기부터 희대의 권신이였던 니오후루 허션을 함께 제거하면서 가경제를 보필했다. 가경제도 동복동생인 영린보다 이복형인 영성을 더 가까이 하고 등용했다는 기록이 있다.[6] 그러나 점점 권력욕이 났는지 나중에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는데, 가경제에게 질책을 받고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니오후루 허션을 제거하는 데에 도움을 준 가장 큰 인물이 영성이었던 만큼 가경제도 영성에게 큰 벌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성은 가경제보다 오래 살았는데 하버드 대학교 청나라 역사연구로 유명한 마트 C. 엘리엇 책에 의하면 말년에 정신병을 앓았다고 한다.
- 또한 11황자 영성은 부찰 부항의 딸인 부찰씨를 적복진으로 맞이하였는데 꽤나 짠돌이였던 모양이다.[7]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한 영성의 적복진이 시아버지 건륭제를 찾아가 불만을 토로했고, 건륭제도 그런 며느리가 불쌍했던지 11황자를 불러 질책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영성과 그의 적복진과의 금슬 자체는 좋았는지 슬하에 꽤나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 참고로 영성은 건륭제의 아들들 중 가장 좋은 명문가 출신의 적복진을 맞아들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건륭제의 유력한 태자 후보였던 것은 아니다. 강희제의 8황자 윤사가 안화친왕의 외손녀로 당대 청나라 최고 명문가 출신인 곽락라 씨를 적복진으로 맞아들였다고 해서 강희제가 윤사를 태자로 생각한 게 아니듯이 말이다.[8]
- 실제로 숙가황귀비 김씨의 여동생도 건륭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며 역시 조선족이다. 그러나 큰 총애를 받아 귀비까지 올라간 언니와는 달리 총애를 받지 못해 품계는 귀인이었다.
[1]
숙가황귀비의 증조할머니가 순치제의 유모였다. 이때부터 김씨 일가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2]
포의는 팔기의 명문가에서 일하는 시종 내지 하인들에게서 비롯된 신분으로 팔기 중에서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팔기 소속이라서 기외의 민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덕분에 입관 이전 누르하치, 홍타이지 시절부터 잘 먹고 잘 살던 고관대작 기성 명문가보다는 불리한 자리에서 시작할지언정, 능력을 보일 기회는 충분히 주어졌고 그 기회를 잘 잡으면 출세도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관운까지 따라주면 팔기의 정식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기분 니루로의 대기도 노려볼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포의 출신으로 시작해 고위 관직에 이름을 올리거나 이런저런 공을 세워 집안을 일으키고 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의외로 많다.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 역시 정백기 포의 출신(이었으나 옹정 연간에 숙청당해 몰락한) 중상류층 권세가 출신이다.
[3]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예부상서 김상명의 도움을 크게 받았고 김상명에게 조상 묘소에 묘비 하나 세워달라는 부탁도 받아왔다는 연행사들의 보고가 전해진다. 이보다 전인 경종 시절에도 김상명이 조선을 편들어주지 않았다면 연잉군이었던 영조는 세제 책봉을 받기 어려웠을 정도. 대략 김씨 일가에 대해 '저 오랑캐가 그래도 제 뿌리는 안 잊었네요 ㅋㅋㅋㅋㅋ' 하는 즐거운 뒷담화(?)인데 이런 뒷담화을 하면서도, 청나라에 들락거리는 사신들과 청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예조 대신들에겐 이들 김씨네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강건성세 내내 FM으로 자리잡았다.
[4]
포의에서 기분 니루로 승급되면서 편입된 기가 양황기였냐, 정황기였냐로 기록이 살짝 엇갈리기는 한다. 구범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에서는 정황기로 대기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5]
5황자 영기, 11황자 영성, 15황자 영염
[6]
가경제의 동복동생인 경희친왕 영린은 영성과 함께 허션을 제거하는 데에 기여했지만 기록을 보면 늘상 주색에 빠져 살면서, 사람들까지
폭행하고 다니는 바람에 동복형인 가경제에게 수차례나 꾸중을 들어도 행동을 고치지 않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가경제가 상대적으로 개념있는 이복형 영성을 더 가까이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7]
연희공략에서도 11황자가 인색하다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8]
오히려 윤사는 한미한 모계 혈통에 이복형제들과 당파를 형성해 노골적으로 태자 자리를 노리는 행태 때문에 강희제에게 냉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