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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베 지온

파일:1611_418_1.jpg
[사진출처]
이름 가루베 지온(軽部慈恩)
출생 1897년
야마가타현 니시무라야마군
사망 1970년 (향년 73세)
학력 와세다대학 (국어한문학 / 학사)

1. 개요2. 생애3. 고고학 연구
3.1. 내용3.2. 비판
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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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일본인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 공주시에서 백제 고분 문화재를 연구해 펴낸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벌인 도굴과 문화재 반출 행위로 비판을 받는다.

2. 생애

1897년 야마가타현 니시무라야마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가루베 케이시로(軽部啓四郞, 경부계사랑)인데, 출생지인 사찰 지온지(慈恩寺, 자은사)의 이름을 따 가루베 지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와세다대학에서 국어한문과를 전공했으며, 192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한반도에 건너왔다. 그가 평양행을 택한 것은 낙랑 고구려 유적을 탐사하면서 고대사를 가르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미 유명해진 평양의 유적 발굴은 일제 최고의 학자들이 전담하고 있어 아마추어인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러던 중 충청남도 공주로 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가루베는, 1927년 공주고등보통학교[2]로 옮겨갔다. 공주에서 근무하면서 백제의 고분, 사찰, 문화재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했다. 공주 지역 향토사를 정리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 공주고등보통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충남향토지》(1935)를 만드는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대동고등여학교를 거쳐 강경고등여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패망 이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처가가 있는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에 정착했는데, 미시마에 니혼대학 분교가 생기자 그곳의 동양사 담당 교원으로 들어갔다. 《백제미술(百済美術)》, 《백제유적의 연구(百済遺跡の研究)》[3]등의 저서를 펴내는 등 백제와 관련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에서도 향토사 연구 및 지방 문화재 보존 등에 참여했다. 1967년 한국을 찾아 명지대학교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4] 1970년 73세로 사망했다.

3. 고고학 연구

3.1. 내용

가루베가 공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당시 일제는 조선 땅에서 가장 유적이 많은 오래된 고도인 평양 경주 일대의 발굴에 집중하고 있었고[5], 상대적으로 유적지가 적은 백제의 옛 수도 공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가루베가 공주에서 임의로 발굴 조사를 하는데 별다른 제약이나 경쟁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공주고보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남는 시간에 공주의 백제 고분을 발굴, 연구했다. 그가 1933년 무렵까지 조사했다고 주장한 공주 일대 고분만 무려 738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시기 공주의 백제 고분과 문화재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고고학잡지에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연도 제목
1929 백제 옛 수도 웅진의 서혈사와 남혈사 터(百濟の舊都熊津に於ける西穴寺及び南穴寺址) 1~2
1930 백제 옛 수도 웅진 발견 백제식 석불 광배에 관하여(百濟の舊都熊津發見の百濟式石佛光背に就いて)
1930 낙랑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고분과 벽돌(楽浪の影響を受けた百濟の古墳とせん) 1~2
1932 공주 출토 백제계 옛 기와에 관하여(公州出土の百済系古瓦に就いて)
1933~36 공주의 백제고분(公州に於ける百済古墳) 1~8
출처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평가받는 편이지만 총독부의 눈을 피해서 도굴에 가까운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다 1933년, 송산리 6호분 도굴 사건을 계기로 총독부는 가루베의 어설픈 발굴 작업에 제동을 걸었고 이 때부터 그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후 가루베는 직접 발굴조사 보다는 공주의 백제 유적지에 찾아오는 일본 여행자(그 중에는 일제 고위 관계자도 많았다)의 가이드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다만 조사한 유적의 보고서가 소략하였기 때문에 그가 조사한 유적이 과연 실존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녔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주 교촌리 전축분으로 한동안 사이토 타다시와 오구라가 교촌리에서 전축분을 확인하였다는 주장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있었다. 실제로 지표조사 상에서도 대략적 추측만 되는 곳이 있었을 뿐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2018년이 되어서야 국립공주대학교 역사박물관에서 해당 지점에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실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여 부여 나성에 대해서도 그 존부를 일찍이 거론한 바 있었다. 실제로 부여 나성의 내부는 생자의 공간, 외부는 망자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언급하였고, 실제로 후대의 연구결과 그런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나아가 공주에도 나성이 있었을 것이며, 부여 나성과 마찬가지로 송산리 고분군 웅진성을 구분하는 생자와 망자의 공간분할 및 도성의 기능을 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공주에서는 나성의 흔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라는 평가를 받지만 유적을 가장 먼저 살펴보고 가루베 개인적으로도 조선인 학생[6]을 데리고 지표조사를 나서는 등의 최소한의 학문적 열정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현장에서의 활동 및 공주 일대의 유적을 선점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는 점으로 인해 아마추어 연구임에도 학계에서 불가피하게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로인해 가루베의 행적에 대해서도 추적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다만 그의 개인적 열정 및 연구와는 별개로 엄연히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리 하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했어야 할 발굴조사를 임의로 하였던 것도 비판받아야할 부분이며 허술한 보고서 기재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한 것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3.2. 비판

가장 큰 비판점은 도굴에 가까운 발굴과 문화재 무단반출을 했다는 것에 있다. 그는 자신이 확인한 고분이 1,000여 기이며 중요한 고분 100여 기는 실측 조사를 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경우 공식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발굴 조사를 했으며, 특히 송산리 고분군 중 6호분에 저지른 짓은 당시 조사를 담당한 총독부 관리조차 맹렬히 비난할 정도였다.[7] 무덤에 들어가 남아 있던 유물들을 가져가 놓고는, 이상함을 느낀 조사관들이 그에게 캐묻자 원래 이랬다며 발뺌을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모은 유물들 대부분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도 비난거리 중 하나다. 가루베는 귀국하면서 유물들 대부분을 남겨두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에 상반되는 증언이 있었다.

일명 가루베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는 일찍이 알려져 있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협정을 위해서 만든 반환 요구 문화재 목록에 가루베 지온이 점유한 다량의 백제 미술품을 명시했다.[8] 이에 대해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무덤(송산리 6호분)을 발굴한 카루베는 출토 유물을 고스란히 자기가 챙기고 무덤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 말끔히 치운 다음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카루베는 강경에 있던 이 훔친 유물을 트럭에 싣고 대구로 가서 대구 남선전기 사장으로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렸던 오꾸라(小倉)와 함께 무슨 수를 썼는지 귀신같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카루베는 이렇게 도둑질, 약탈한 유물을 가지고 《백제유적의 연구》라는 저서를 펴냈다.
유홍준,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314쪽

실제 도쿄국립박물관 와세다대학의 아이즈 야이치 기념박물관에 가루베 소장품이라고 명시된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그리고 2019년 도쿄국립박물관의 '조선의 간석기와 금속기' 전시에는 가루베가 기증한 것으로 명시된 공주 출토 청동기시대 석제 화살촉이 전시되었다. #

2006년에는 가루베의 유족들이 그가 남긴 것의 전부라며, 백제 기와 4점을 국립공주박물관에 반환했다. # ##

현재도 그가 무단으로 가져간 유물들의 구체적인 목록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루베 지온의 문화재 약탈에 관한 내용은 2016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37회에서도 다뤄졌다.

4. 관련문서



[사진출처] 월간조선 칼럼 [2] 공주고등학교 [3] 사망한 이듬해인 1971년 발간되었다. [4] 이와 관련된 김태식 기자의 칼럼이 있다. 김태식 기자는 명지대 설립자가 공주고 출신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5] 경주의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식리총 신라왕릉급 무덤들이 이 시절에 일제 학자에 의해 조사되었다. [6] 위의 김태식 기자의 칼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유적조사 및 고고학자적인 태도 등에서는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교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7]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을 공포함과 동시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출범시키고, 1920년까지 5개년 고적조사 계획을 수립하며, 이런 제도 아래 허가 없는 조사 활동은 무조건 불법행위로 보아 제한하고 있었다. [8] 참고자료 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