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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오날리가 참가 구단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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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리가 참가 구단 |
NOFV-오버리가 참가 구단 · |
FC 로트바이스 에어푸르트 | |
FC Rot-Weiß Erfurt | |
<colbgcolor=#e31818><colcolor=#fff> 정식 명칭 | Fußballclub Rot-Weiß Erfurt e.V. |
창단 | 1966년 1월 26일 ([age(1966-01-26)]주년)[1] |
소속 리그 |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오스트 (Regionalliga Nordost) |
연고지 |
튀링겐주
에어푸르트 (Erfurt, Thüringen) |
홈구장 |
슈타이거발트슈타디온(18,611명 수용) (Steigerwaldstadion) |
라이벌 | FC 카를 차이스 예나 - 튀링겐 더비 |
회장 | 라르스 푹스 (Lars Fuchs) |
투자가 | 프란츠 게르버 (Franz Gerber) |
감독 | 파비안 게르버 (Fabian Gerber) |
공식 웹사이트 | |
우승 기록 | |
튀링거 란데스포칼 (9회) |
1993-94, 1997-98, 1999-2000, 2000-01, 2001-02, 2002-03, 2007-08, 2008-09, 2016-17 |
★ DDR 오버리가 (2회) |
1954, 1955 |
클럽 기록 | |
최다 출장 | 위르겐 호인 (Jürgen Heun) - 400경기 (1976-1993) |
최다 득점 | 위르겐 호인 (Jürgen Heun) - 131골 (1976-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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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C 에르츠게비르게 아우에와 함께 1950년대 동독 리그의 강호FC 로트바이스 에어푸르트는 독일 튀링겐 주의 도시 에어푸르트를 연고로 하는 축구 팀이다.
2. 역사
에어푸르트의 정식 창단년도는 1966년이지만 그 시초는 1895년 창단된 SC 에어푸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1900년에 축구 프로 클럽으로 변경한뒤 1908-09시즌 리그 우승까지 거머쥐었지만 아쉽게 독일 챔피언은 되지 못한다.[2]또다른 클럽의 뿌리는 1904년 창단된 FC 브리타니아 에어푸르트이다. 제1차 세계 대전기간동안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심해지며 클럽명을 VfB 에어푸르트로 변경했다.
2.1. 동독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연합국 측에서 독일의 모든 스포츠활동을 금지시키며 잠시 해체되었다가 1946년 SC 에어푸르트와 VfB 에어푸르트에서 뛰던 선수들이 모여 SG 에어푸르트베스트로 재창단했다. 소련 점령지에서 치러진 임시 리그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며 1949년 DDR 오버리가에 참가한 첫 14개의 클럽중 한 클럽이 되는데 성공했다.오버리가 참가후 SC 투르비네 에어푸르트라는 이름으로 활동, 한스 카를 감독 하에서 1954년과 1955년 동독 역사상 최초의 2연패를 기록하며 강호로 이름을 날렸으나, 1956년 여러 선수들의 은퇴와 한스 카를 감독이 서독으로 떠나며 팀은 침체기를 맞았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2부리그로 강등당했다가 복귀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전환점을 맞기 위해 BSG 모터 옵티마 에어푸르트BSG Motor Optima Erfurt 와 합병되면서 구단명을 FC 로트바이스 에어푸르트로 변경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눈에 띄는 성적이 없었는데 1980년 FDGB-포칼 결승에서 같은 튀링겐주를 연고로한 라이벌팀 FC 카를 차이스 예나에게 패배해 준우승을 거둔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1980년대에 리가에서는 쭉 중하위권을 기록했지만 강등은 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동서독 통일후 오버리가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0-91 시즌 깜짝 3위에 올라 UEFA 컵 진출 및 다음시즌 2. 분데스리가 참가 자격을 얻어냈다.
2.2. 통일 이후
1991-92시즌 2. 분데스리가에 참가하는데 성공했지만 서독 클럽들의 막대한 자본력에 밀려 한시즌만에 최하위로 추락하며 3부리그로 강등되었고, 또 다른 동독클럽들이 그랬듯 재정난에 계속해서 시달렸다. 2001년엔 4부리그까지 강등될 뻔 했으나 같은 리그 소속이었던 SSV 울름 1846이 재정난으로 인해 라이센스 문제로 에어푸르트 대신 강등되는 행운을 겪기도 했다. 2004년에 레네 뮐러감독 휘하에서 잠깐 2. 분데스리가로 승격되었다 바로 강등된 뒤 쭈욱 3부리그에 소속되어있었다. 2008년 3. 리가 설립이후 2018년까지 유일하게 계속해서 3. 리가에만 남아있던 클럽이었다..가 2017-18시즌 3. 리가에서 최하위인 20위로 강등되었다.2018-19시즌 4부리그 강등의 여파로 재정위기가 닥쳤고, 파산절차가 시작되었다. 성적도 15승 9무 10패로 5위를 기록, 승격에 실패했다. 2019-20시즌엔 시작부터 부진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전반기가 끝난 현재 4승 7무 8패로 14위로 쳐졌다. 그러다가 2020년 2월 5일 재정문제로 독일 축구 연맹라이센스를 박탈당해 다음시즌 자동 오버리가 강등이 확정되었다.
2020년 드디어 투자자를 찾았다. FC 바이에른 뮌헨 등에서 뛰었던 프란츠 게르버. 2023년까지 구단의 의사결정에 함께한다고 한다. 그리고 2023년 11월 마침내 길었던 파산절차가 끝났다.
3. 최근 시즌
3.1. 2021-22 시즌
2021-22시즌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오스트 승격에 성공했다. 시즌 마지막 19경기 연승을 거두며 구단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3.2. 2022-23 시즌
레기오날리가 노르트오스트에서 시즌 초반에 잠시 휘청였으나 이후 연승행진을 달리며 베를리너 AK, FC 에네르기 코트부스와 승격경쟁을 하고있다.계속 리가1위를 수성중이었으나 막판에 미끄러지며 3위까지 떨어지며 마무리했다.
4. 팬 문화
4.1. 울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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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구 동독출신 팀답게 울트라스의 단체응원이 살벌한 팀들중 한팀이다. 특히 경기시작전 에어푸르트 대성당옆 계단에서 벌이는 장외응원이 장관.
가장 큰 울트라스 클럽은 Erfordia Ultras로 슈타이거발트슈타디온 R 블록과 S 블록에 위치한 슈타이거발트쿠르베 "Steigerwaldkurve"에서 응원을 펼친다.
1953-54 시즌 평균관중 22,714명이 관람했던 것이 가장 많은 관중이 경기를 본 시즌이었다.
4.2. 라이벌
자세한 내용은 튀링겐 더비 문서 참고하십시오.가장 라이벌리가 강한 팀은 같은 튀링겐주의 FC 카를 차이스 예나. 튀링겐주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타이틀로 인한 지역감정이 라이벌리로 번져있으며, 이는 동독시절부터 시작되었다.
FC 흐로닝언, 할레셔 FC 울트라스와는 돈독한 사이이다.
5. 여담
- 여담으로 가장 마지막까지 UEFA 컵에 남아있던 동독 팀이었다. 1990년 UEFA 컵 1라운드 FC 흐로닝언을 1대 0으로 이겼고 2라운드에 AFC 아약스에게 패해 탈락했다.
- 클레멘스 프리츠, 토마스 링케가 에어푸르트 출신이다.
6. 소속 선수
7. 출신 선수
8. 같이보기
1990-91 시즌 참가 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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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이때 독일의 축구리그는 여러개의 리그에서 우승한 팀끼리 겨뤄 독일 챔피언을 가려내는 방식이었다.
[3]
리투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이다.
[4]
세인트루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