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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년 국사조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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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같이보기

1. 개요

국사조칙(國事詔勅)

독일어: Pragmatische Sanktion
라틴어: Pragmatica sanction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6세 1713년 발표한 칙령. 독일어권에서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부정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여성 후손들의 계승 서열을 바꾸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어 차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2. 상세

카를 6세의 즉위 기간 중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존속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그는 젊었을 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없는 경우의 정치적 혼란과 국가 분열의 가능성을 직접 체험했고, 만 남긴 채 요절한 형 요제프 1세를 보며 합스부르크 제국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카를 6세는 즉위 직후인 1713년,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한 살리카법을 부정하는 국사조칙을 발표하고 재임 기간 내내 주변국들로부터 이를 인정, 승인받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다만 해당 국사조칙이 완전히 그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 계열의 대륙국가는 살리카법에서 모계 승계를 금지하는 관습법 적용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부계가 단절된다면 황제가 영지를 돌려받게 된다는 원칙이 있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 한정으로 이 규정을 비껴나갈 특권이 있었다. 11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격상시키면서 부계 후손이 끊길 경우 영지를 몰수하지 않고 당시 통치가문이던 바벤베르크 가문에서 계승권을 독자적으로 정해 이어나갈 수 있는 특권 프리빌리기움 미누스(Privilegium Minus)을 부여했다.[1]

1703년[2] 레오폴트 1세 차남 카를을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 주장하며 그를 스페인으로 보내기 전, 두 아들의 동의를 받아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에 대한 상호 계승 약관을 마련했는데, 요제프 및 그의 후손들은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카를과 그 자손들은 스페인을 계승하며 만약 한쪽의 부계가 단절되면 상대방의 집안을 계승할 수 있고, 만약 두 집안 모두의 남자 후손이 단절되면 여자 후손이 이를 계승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3]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여자 후손이 없으면 고모가 계승하는 것까지 인정했다. 이 덕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법은 살리카법에서 준살리카법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1713년 국사조칙은 이전의 상호 계승 약관에 내용을 첨가한 것으로, 합스부르크 영지의 불가분성을 천명하며, 즉 분할 상속 불가를 내세우며 모계 상속의 법률적 근거를 마련했다.

다만 과거의 협약에서는 여자 후손들 중 형 요제프의 후손이 남동생 카를의 후손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카를은 이를 국사조칙으로 대외에 공표할 때 살짝 수정해 통치자의 딸이 계승하도록 명시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에서는 직계에 어떠한 남자 후손도 남아있지 않을 경우 가문의 수장의 딸이, 딸도 없다면 누이가, 누이도 없다면 고모가 가문을 이어받도록 하는 예외조항이 생겼다.[4] 요제프 1세의 황후 빌헬미네 아말리아는 딸의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에 반발했지만 카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런 교묘한 내용 덕분에 요제프의 두 딸은 카를의 딸들보다 계승권에서 밀리게 되었고 그 덕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할 수 있었다. 다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 출생이므로 카를 6세가 그녀를 즉위시키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종의 보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자 후손의 앞뒤가 뒤바뀐 껄쩍지근함은 카를 6세를 내내 괴롭힌 듯하다. 그는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 거의 죽을 때까지 아들을 보려고 용을 썼다. 이 때문에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을 감안하더라도 후계자로서의 제왕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어릴 적에는 신부수업이나 받았다.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 초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해 고생했다.

국사조칙 발표에는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성국들 간의 알력이 크게 작용했는데, 헝가리 왕국이 딴지를 걸 것을 염려한 다른 구성국, 특히 크로아티아 왕국에서는 국사조칙을 열렬히 지지했다. 1720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영지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후백국, 티롤 후백국 신분의회에서 모두 통과되었고 1723년에는 헝가리에서도 통과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헌법적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여러 나라에 국사조칙 승인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승인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은 비록 그의 말년에 있었던 전쟁의 패배로 빛이 바랬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아들을 두지 못 하고 죽으면서 오스트리아 왕위를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승하는 기반을 닦았고, 그녀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존속, 유지시키는 밑바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사조칙은 현실적인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는데, 카를 6세 생전에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국사조칙을 승인했지만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의 차녀와 결혼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2백여년 전 다른 문서를 근거로 국사조칙 승인을 번복하고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계를 요구한 데다 황제 선거까지 출마했다. 게다가 기존의 계승 서열에서 가장 우선이었던 요제프 1세의 장녀와 결혼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카를 6세가 죽자마자 카를 알브레히트와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를 분할 상속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국사조칙은 현실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실력행사를 거쳐 승인받게 된다.

3. 같이보기


[1]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황제 가문이던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훗날 하노버 왕조로 이어짐)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바벤베르크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편을 들었다. 그러다가 여러 대에 걸쳐 애증의 관계였던 벨프 가문이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후대에 혼인관계가 있었고 벨프 가문 영지를 몰수했다가 바벤베르크 가문에 분봉한 바이에른 공국을 다시 돌려주면서 이에 대한 보상으로 바이에른 공국에서 오스트리아를 분리해 수여하고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이러한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바벤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공작 호전공(好戰公) 프리드리히는 후사 없이 전투 중 허무하게 죽어서 이 특권을 사용해보지도 못했다. [2]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년부터 벌어졌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카를 대공을 카를로스 3세로 주장한 것은 1703년이다.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라 동맹국 사이에서도 민감한 사안이 될 것을 고려하여 공표하진 않았다. [4]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계승권자가 여섯 명 있었는데 그 여섯 명이 전부 여자였다.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의 자매 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 마리아 엘리자베트, 포르투갈 왕비 마리아 안나), 요제프 1세의 딸 둘( 작센 선제후비 겸 폴란드 왕비 마리아 요제파, 바이에른 선제후비 겸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아말리아), 그리고 카를 6세의 딸 둘(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알렉산더의 아내 마리아 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