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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바우두의 클럽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2. 데뷔
데뷔하자마자 26경기 16골의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준 그는 바로 모지미링을 거쳐 코리티안스로 간다. 또 21경기 11골을 넣은 그는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다. 총 3시즌 동안 97경기에서 60골을 넣으며 브라질 주립 리그 우승 2회와 전국 리그 우승 1회를 경험했고 브라질리그를 떠난다.2.1.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그가 이적한곳은 스페인의 데포르티보였다. 데포르티보는 당시 그래도 라리가에서 꽤 먹어주는 중상위권 팀이었고 히바우두는 그에 걸맞은 활약을 했다. 그 결과 데포르티보는 리그 3위로 번쩍 뛰고 만다. 유럽 특히 스페인 내에서는 난리가 났고 모든 빅클럽들이 그를 노렸다.물론 당시 라리가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데포르티보에서는 차기 시즌을 히바우두 중심으로 구상했기 때문에 히바우두를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호나우두를 인테르로 이적시키고 호나우두의 대체자를 찾던 바르셀로나가 히바우두의 바이아웃을 질렀고, 그로 인해 히바우두는 데포르티보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다.[1]
2.2. FC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히바우두는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린다. 바로 전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승점 2점차로 리그 우승을 빼앗겼기에 바르셀로나는 독기를 잔뜩 품고 있었고, 히바우두 -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 루이스 피구로 이어지는 스리톱[2]을 형성하고 뒤에서 과르디올라가 킬패스를 쭉쭉 질러주는 공포의 스쿼드를 갖추게 된 바르셀로나는 이듬시즌 4년만에 라리가 챔피언 자리를 탈환함과 동시에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 한 시즌 더블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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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후에는 루이 반 할 감독과의 불화로[5] 결국 주전 스쿼드에서 점점 빠지게 되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5골 득점+호나우두의 득점을 대부분 어시스트했는데 활약의 정도를 보면 호나우두, 올리버 칸과 함께 대회 세 손가락에 들정도였다.[6] 만 30살의 나이에 AC 밀란으로 이적한다.[7]
2.3. AC 밀란
히바우두는 주전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전술상에 녹아들지 못했다. 당시 AC 밀란은 셰브첸코와 인자기가 주전 공격수로 뛰고 있었고, 미드필더에도 후이 코스타가 지키고 있었는데다, 피를로가 포텐이 제대로 터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그의 인생의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경험한것이다.2.4. 이후
하지만, 2003-04 시즌부터는 AC 밀란이 영입하자마자 뛴 연습경기에서부터 돋보였던 카카를 두고[8], 이미 30대가 넘어간 히바우두를 기용할 이유는 없었기에, 벤치신세가 되며 주전 선수로 뛰기 위해 떠돌다 크루제이루를 거쳐 2004년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올림피아코스로 이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올림피아코스에서의 맹활약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혼자 미쳐 날뛰면서 레알 마드리드나 리버풀 등 온갖 강팀들을 압도하는 활약을 보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거의 리버풀을 누르고 2라운드에 진출할 뻔했으나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의 극적인 중거리포가 터지면서 고배를 삼키게 된다. 그리고 2007년에는 올림피아코스 생활을 마치고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AEK 아테네로 이적해 1시즌 동안 활약했다.그리고 2008년 또다시 이적을 감행했는데, 새로 입단하게 될 팀은 우즈베키스탄의 분요드코르. 당시 분요드코르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아시아 축구계의 신흥강호로 올라서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고, 히바우두 영입에 이어 감독으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를 앉히며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세로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렸으나 포항 스틸러스와의 8강전에서 2차전 연장 혈투까지 가는 끝에 결국 4-5로 패해 좌절되었고, 2010년도 알 힐랄에게 밀려 중도하차했다. 이후 팀에서 방출되었다가 2011년 상파울루와 1년 단기계약을 맺었다.
2011년, 커리어 내내 영혼의 파트너라 불렸던 호나우두가 은퇴함에 따라 이제 히바우두 역시 은퇴를 준비하는 듯했으나 페이크였고 2013년 기준으로 자신의 커리어 15번째 팀인 브라질 1부 리그 상 카에타누에서 뛰었다. 2014년 브라질 3부 리그 모지미링으로 이적하였다.
저니맨이라고 하지만, 이미 발롱도르 수상, 챔스 우승, 리그 우승, 코파 아메리카 우승, 월드컵 우승까지 이룰건 다 이룬 선수가 여자, 술, 담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축구선수 생활을 은퇴하고도 남았을 40대임에도 축구를 계속하는걸 보면 축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수인것 같다.
끝내, 브라질 리그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이 경기도 뛰어본 히바우두는 2015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팀원들은 저를 보고 할아버지라 부릅니다. 저도 그게 그리 싫지는 않아요. 저는 현재 경기를 뛰기 보다는 애들에게 조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요... 그래도 귀를 잡아 땡겨가며 억지로 조언을 해주지는 않죠. 은퇴...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선수에게 있어 은퇴는 첫 번째 죽음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하지만 저는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선수는 자신이 언제 은퇴해야 하는 지에 대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전 아직 아닙니다."
2013년 상 카에타누에 있을 당시의 인터뷰 中
2013년 상 카에타누에 있을 당시의 인터뷰 中
하지만 결국 한국시간으로 3월 16일, 은퇴를 선언했지만, 2015년 7월, 모지미링 구단주 히바우두는 팀의 성적이 좋지않자 스쿼드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 그리고 경기에 출전해 팀의 시즌 첫 승을 이끌었다. #
2015년 7월 8일 나우티쿠와의 11라운드 경기에서 공격포인트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환상적 프리킥을 보여주는 등 2:1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7월 15일, 페널티킥으로 현역 복귀 후 첫 골을 넣었다고 한다. 원래 자신이 안 차려고 했으나 관중이 히바우두의 이름을 연호해서 찼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기에서는 히바우두의 아들인 히바우지뉴가 멀티골을 넣었다. 결국 팀은 그 날 3:1로 승리했다.
2015년 8월 14일, 히바우두는 왼쪽 무릎 통증이 재발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2번째 은퇴를 선언한다고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
[1]
데포르티보 팬들은 이 사건을 두고 통칭 '히바우두 사건'이라 부르고 있으며, 히바우두를 바르셀로나로 이적시킨 것에 크게 분노한 렌도이로 회장은 이후
알베르트 루케의 바르셀로나 이적설이 나오자 바르셀로나 이적을 차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루케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결국 팀을 떠난다.
[2]
사실 이때의 히바우두는 자신의 최적의 포지션인 세컨드 스트라이커가 아닌 바른발 윙어로써 왼쪽 윙포워드에서 뛰었다. 원톱 롤도 소화하는 전천후 스트라이커인 클라위버르트와 프리롤에 가까운 오른쪽 윙포워드였던 피구가 있었기 때문에 반 할식 쓰리톱을 세운다면 윙어로 뛰기엔 어정쩡한 위치였지만 측면에 있는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10.5번에 가까운 롤. 그럼에도 득점력이나 파괴력 자체는 죽지 않아서 바르셀로나에서 맹활약 하긴 했다. 반 할이 사임하고 나서 투톱 체제로 전환했을때 AC 밀란으로 이적.
[3]
참고로, 당시 트레블을 달성한 괴물 스쿼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유일하게 못 이기고 비긴 팀이 히바우두의 바르셀로나다.
[4]
발렌시아는 당시 4위였고 바르셀로나는 3점 뒤진 5등이었다. 비록 원정에서는 발렌시아를 잡아내 이 경기에서 이기면 무조건 자력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2년 연속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른 강팀을 꺾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5]
반 할이 킥이 좋은 히바우두를 아예 크로스용으로 쓰려고 했지만, 히바우두는 중앙에서 공격을 도맡는 프리롤을 원했다.
[6]
수상은 호나우두, 칸, 홍명보가 받았다.
[7]
참고로, 당시 최고 에이스인 히바우두를 내친 바르샤는 그해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바르셀로나는 팀을 망친 반 할 감독을 데려온지 1년도 채 안되어 경질시켰다.
[8]
웬 미션스쿨 학생처럼 생긴 녀석이 수비를 다 뚫고 골을 넣어서 가투소가 쌍욕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