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6년 10월 28일 뉴욕 근방 화이트 플래인스에서 영국군과 대륙군이 맞붙은 전투. 조지 워싱턴은 뉴욕을 탈환하기 위해 화이트 플래인스에서 요새를 건설하고 영국군에 대항했으나 끝내 패배했다.2. 배경
1776년 8월 27일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패배한 조지 워싱턴은 8월 29~30일 밤에 민병대 9천 명을 맨해튼 섬으로 철수시켰다. 윌리엄 하우 소장은 뉴욕에 입성한 뒤 9월 15일 맨해튼 섬에 병력을 상륙시켜 워싱턴을 추격하게 했지만 9월 16일 할렘 하인츠 전투에서 선봉대가 패퇴하자 추격을 중지하고 한달 간 대치했다.10월 18일, 하우는 일부 병력을 펠스 포인트에 상륙시키고 맨해튼 섬에 있는 워싱턴의 군대를 허드슨 강을 장악한 영국 해군과 함께 포위하려 했다. 하우는 뉴로셀에 숙영지를 세웠고, 그의 척후병들은 화이트 플레인즈에서 11km 떨어진 마마로넥 인근까지 진군했다. 마마로넥엔 대륙군 보급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대륙군으로서는 실로 중대한 위기였다.
워싱턴은 적의 이같은 움직임을 감지하고 주력군을 화이트 플래인스로 철수시켰다. 하지만 상당수 병력은 맨해튼 섬 북부의 워싱턴 요새에 남겨졌다. 이후 워싱턴은 브롱스 강과 크로튼 강 사이의 지점에서 요새화 작업을 실시했다. 먼저 브롱스 강 건너편 채터튼 언덕에는 스펜서 대령, 맥두걸 대령이 지휘하는 민병대 4천 명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워싱턴 본인은 화이트 플래인스의 엘리야 밀러 하우스에 본부를 설치하고 최전선에 2줄의 참호를 파게 했다. 참호들은 브롱스 강 근처 늪지대에 의해 우측면이 보호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대륙군의 퇴각로는 보다 가파른 언덕들이 있었다. 이러한 대륙군 방어선의 총 길이는 3마일이었다.
10월 24일 뉴로셀에서 출발한 하우의 군대는 다음날 스카스데일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브롱스 강 동쪽 둑 부근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하우는 우익에 헨리 클린턴 장군 휘하의 영국군을 배치했고, 좌익엔 헤이스터 장군 휘하의 헤센군을 배치했으며, 자신은 중앙을 맡았다. 이후 적의 방어 상태를 살펴본 하우는 10월 28일 아침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렸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윌리엄 하우 소장
- 병력: 13,000명
3.2. 대륙군
- 지휘관: 조지 워싱턴
- 병력: 14,500명. 그러나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4,000명에 불과했다.
4. 전투 경과
10월 28일 아침, 한창 지형을 조사하고 있던 워싱턴은 영국군이 전진하고 있다는 전령의 보고를 받자 즉시 본부로 돌아와 조셉 스펜서 휘하 코네티컷 2연대를 출동시켜 영국군의 진격을 늦추게 했다. 또한 일부 병력을 채터튼 언덕에 보내 그곳의 수비를 강화하게 했다. 스펜서의 부대는 영국군 좌익의 선봉에 있던 요한 라흘 대령 휘하 헤센군과 조우해 사격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헨린 클린턴의 부대가 그들의 측면을 위협하자, 스펜서의 코네티컷 부대는 등을 돌려 브롱스 강으로 퇴각했다. 이에 영국군은 용기병 부대를 투입해 그들을 추격하게 했고, 스펜서의 부대는 적 기병대의 출현에 대경실색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이후 라흘 대령의 헤센군은 채터튼 언덕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맥두걸 대령 휘하 민병대의 거센 저항으로 무위에 그치고 가까운 언덕으로 후퇴했다. 이후 영국군 포병대가 언덕을 향해 포격을 가하는 동안, 영국군 제 2여단이 체터튼 언덕 정면으로 올라갔고 라흘 대령의 헤센군은 전장을 우회해 대륙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대륙군은 채터튼 언덕을 버리고 브롱스 강을 건너 본대와 합류했다.
한편 하우는 중앙군을 이끌고 워싱턴의 본대와 대치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별다른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워싱턴은 그 사이에 채터튼 언덕에서 퇴각한 민병대와 합세한 뒤 크로튼 강을 건너 안전한 곳으로 퇴각했다. 하우는 적은 철수하는 걸 보면서도 매복이 있을 것을 우려했는지 추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화이트 플래인스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