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1-09 04:12:16

롱아일랜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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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대륙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6년 8월 27일 뉴욕을 공략하려는 영국군과 이를 막으려는 대륙군이 뉴욕 남동쪽 롱아일랜드 브루클린[1]에서 맞붙은 전투. 미국 독립 전쟁의 첫번째 대규모 회전이자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어 뉴욕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은 뉴욕을 영국군에게 내준 후 영국군의 추격을 피해 롱아일랜드에서 본토로 후퇴해야 했다.

2. 배경

1776년 3월 17일 보스턴에서 영국군이 철수한 뒤, 조지 워싱턴은 윌리엄 하우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이 대륙회의가 개최된 뉴욕을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군대의 상당수를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이동시켰다. 그의 예상대로, 윌리엄 하우는 1776년 여름 뉴욕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영국 함대는 1776년 6월 29일 허드슨 강 입구에 닿았고, 하우는 7월 3일 뉴욕 남서쪽의 스태튼 섬에 상륙했다. 대륙회의는 다음날인 7월 4일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영국군과 대륙군 양측 모두 병력을 증강시켰다. 영국 측에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공격하던 헨리 클린턴 장군 휘하 영국군이 하우와 합세했고, 대륙군 진영에서는 뉴욕 주 일대의 민병대가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워싱턴은 영국군이 맨해튼으로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해 바다와 내륙을 마주하고 있는 브루클린 고지의 요새에 약 1만 명을 배치하고 벙커힐 전투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한 이즈라엘 퍼트넘 소장이 이들을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는 해안을 따라 요새화된 지역을 장악해 영국군의 다가올 공세에 대비했다.

8월 22일, 영국군은 대륙군이 설치한 요새의 남쪽 지역인 롱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이후 닷새 동안 공세를 준비한 영국군은 8월 27일부터 공격을 감행했다. 이리하여 미국의 주요 요충지인 뉴욕 시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윌리엄 하우 소장
  • 병력: 20,000명

3.2. 대륙군

4. 전투 경과

8월 26일, 영국군 본대는 대륙군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고지 바로 아래 지역을 향해 북동쪽으로 행진했다. 그러던 중 영국 정찰병들이 고지대를 가로지르는 3개의 길 중 가장 북쪽의 길에 대한 적의 경계가 허술하다고 보고했다. 이에 하우는 8월 27일 아침 헤센 병사들에게 적을 정면에서 공격하라고 지시한 뒤 일부 영국군으로 하여금 그 길을 통해 적 좌익 사단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설리번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 좌익 부대는 헤센 병사들과 한창 전투를 벌이던 중 갑작스런 영국군의 측면과 후방 공격에 당황해 전의를 상실한 채 브루클린 요새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헨리 클린턴 장군이 이끄는 소규모 영국군은 대륙군 우익을 향해 공격했다. 스털링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 우익은 몇 시간 동안 분전했지만, 대륙군 좌익을 격파한 영국군이 그들의 후방에 이르자 역시 브루클린 요새 후방으로 패주했다. 8월 28일, 워싱턴은 뉴욕에서 롱아일랜드로 증원군을 데려왔지만 영국 해군의 위협이 갈수록 강해지자 8월 29일 브루클린 요새를 포기하고 전면 철수했다. 하우가 이끄는 영국군은 곧바로 브루클린 요새를 공격하는 대신 다소 신중하게 참호를 구축하며 포위망을 짜고 있었는데, 이 때를 틈타 대륙군은 철수할 수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철수 병력들이 배를 타던 부두를 지키며 끝까지 남아 있다가, 브루클린 요새에서 후위를 지키던 미플린의 부대와 함께 철수했다.

사실 이때의 철수 작전도 워싱턴과 대륙군에겐 기적과 같은 행운들이 연달아 겹쳐서 가능했다. 철수 작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마침 심한 비바람이 불어서 영국 해군의 함선이 허드슨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었고, 철수 작전을 개시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잠잠해져서 철수 병력이 탄 배들이 순조롭게 항해가 가능했으며, 마지막까지 교두보를 지키던 토머스 미플린[2]이 이끄는 후위 부대가 철수를 시작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우 짙은 안개가 끼어서 철수를 은폐한 것. 영국군은 다음날 아침 안개가 걷힌 뒤에야 대륙군이 무사히 철수한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후 9월 15일, 워싱턴은 뉴욕에서 철수했고, 하우는 뉴욕을 점거했지만 9월 16일 할렘 하인츠 전투에서 패해 대륙군이 철수하는 걸 막지 못했다.

5. 결과

영국군의 사상자는 400명 안팎이었고, 대륙군은 2,000명의 사상자, 포로, 그리고 대포 여러 문을 상실했다. 이는 대륙군에게 있어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뉴욕을 잃은 것은 실로 큰 타격이었다. 워싱턴은 뉴욕을 어떻게든 탈환하려 애썼지만 연이은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이로인해 대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전쟁은 곧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고 트렌턴 전투 프린스턴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자신이 리더로서의 자질을 갖췄음을 입증한다.

한편 영국군이 점령한 뉴욕은 이후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대륙에서 활동하는 영국군의 주요 기지이자 영국 본국에 충성하는 왕당파와 노예 신세를 피해 영국군으로 도망쳐온 친영파 해방노예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그러나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그해 11월 25일 영국군이 뉴욕에서 철수하였고, 영국군이 철수하던 그날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이 뉴욕에 입성하면서 뉴욕은 다시 미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 이 당시 뉴욕은 맨해튼 섬 남부만 차지하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작은 도시였으며 브루클린은 뉴욕과 별개의 한적한 시골이었다. 브루클린이 뉴욕으로 편입된 것은 브루클린의 도시화가 진행되고 브루클린 대교를 통해 맨해튼과 연결되어 연담화가 이루어진 1898년이다. [2] 미플린은 이 브루클린에서 퇴각해야 한다고 가장 강하게 주장하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겁쟁이라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후위 부대의 지휘를 자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