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9 15:26:06

호조 우지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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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야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9px-Ujiyasu_Hojo.jpg
호조 우지야스의 초상화
출생 1515년
사가미(相模国)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사망 1571년 10월 21일 (57세)
사가미(相模国)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clearfix]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 호조 우지츠나의 아들. 부자도 3대면 망한다라는 속담도 있지만, 후호조씨 3대째인 우지야스는 후호조씨 당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전국시대 제일의 민생가로 유명하다. 메야스바코(目安箱) 설치[1], 화폐 통일, 탄력적인 조세 정책, 관료 제도 개혁 등 제도적으로도 앞서간 한 편, 일본 최초의 상수도망 구축, 지역 문화 개발을 위한 직공, 문화인 초빙 등, 민중의 생활에도 큰 관심을 가진 군주였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동으로 전봉된 뒤, 이 지역 주민들이 여전히 호조를 그리워하여 고생을 많이 했다.[2]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 등을 수비전에서 물리치곤 하여 왠지 수성의 명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후호조 씨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시기가 이 때였다.[3]

1546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의 수장 노리마사,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의 수장 토모사다, 코가 쿠보[4]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관동 연합군 8만을 8000명의 병력으로 무찌른 ' 가와고에 성 전투'는 일본 3대 기습중 하나로까지 일컬어진다. 그 대활약 때문인지 이명사가미의 사자(相模の獅子). 이 승리로 토모사다를 죽여 오기가야츠 가문을 멸망시켰고, 야마노우치 가문과 코가 쿠보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호조 가문을 관동의 패자로 만들었다. 이때의 패배로 관동관령이었던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그 세력을 상실하고 에치고의 나가오 카게토라[5]에게 의탁한다.

전국 시대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군임에도, 주위의 다이묘들이 임팩트가 강해서 인지도 면에서 손해가 막심하다.

어렸을 때에는 굉장히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별것 아닌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서 주위 사람들의 애를 태웠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가 되던 1531년에 첫 출진하여 대승을 거두고, 우에스기나 코가쿠보(古河公方) 아시카가, 사토미(里見) 등의 주위 세력과의 싸움에서 공을 쌓아나갔다.

1541년에 부친인 우지쓰나가 사망, 가독을 상속하여 후호조씨 3대 당주가 되었다. (죽기 수 년 전에 은거, 미리 당주가 되었다는 설도 있음)

우지야스가 당주가 되었을 무렵에는 점점 세력을 신장하는 '굴러온 돌' 호조가에 대하여 관동 다이묘들의 감정이 좋지않을 때였다. 이런 배경 하에서 1545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 우에스기 노리마사, 아시카가 하루우지 등이 반 호조 연합을 형성하게 되나(제2차 카토의 난), 다케다 신겐의 중재로 화해하게 된다.

이런 어지러운 마당에 우지야스가 위에서 언급한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쳐부수자, 노리마사는 우에스기 겐신(당시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의탁하였고, 겐신이 관동 출병을 시작하면서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호조도 힘들어지게 되었다.

특히 오오타 씨와 사토미 씨가 최대의 난적이었는데, 사타케 요시시게가 용맹을 떨칠수 있었던 것도 다 호조 씨가 오오타와 사토미를 상대로 싸우느라 사타케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오타가 망하고, 사토미의 가세가 기운 뒤에 호조 씨가 사타케에 공격을 시작하자 사타케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더불어 동맹을 맺었던 우츠노미야는 아예 호조 가에 항복하였다.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조 토벌군이 도착하여 사타케는 멸망을 면했다.[6]

우지야스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다케다, 이마가와와의 삼국동맹이다(1554년). 그러나, 다케다로부터 인질로 받은 공주는 장남 우지마사의 아들을 수없이 낳았음에도 불구, 다케다가 후에 약속을 깨고 이마가와를 침공하자 바로 돌려보냈다.

병학과 지휘에 있어서도 가중 제일의 맹장, 호조 쓰나시게(우지쓰나의 데릴 사위이므로 우지야스와는 형제뻘)마저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관동 연합군에 쳐발릴 무렵, 스스로 기습 한번에 싸움을 끝낸 바 있다(위에 얘기한 가와고에 성 전투).

전투에도 직접 참전하여 싸운적이 많은데 이로 인해 외모도 초상화와 달리 얼굴에 큰 칼빵 2개, 전신에 수십개의 칼빵이 있는 인생 굴곡을 겪었다고 한다.[7] 얼굴의 상처는 가와고에 성 전투 당시에 참전하여 싸우다 입은 상처인데[8] 이후 칼이 날아와도 적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용맹함을 칭송하는 의미로 우지야스 상처라는 말이 생겨났다. 하지만 우지야스 본인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일개 무사가 아닌 일국의 당주가 얼굴에 상처를 입을 정도의 전투는 자랑할 만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9]

흔히 닌자로 알려져 있는 '풍마중'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입임무를 맡는 닌자라기보다는 호조 우지야스가 조직한 특수 부대(유격대 + 치안 유지 + 정보 수집)라는 것이 정설.

우지야스가 45살이던 1559년에 영지에서 발생한 기근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우지마사에게 가독을 상속하였으나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고, 이후 죽기까지 십수년에 걸쳐 우지마사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절차를 밟았다. 만년에는 중풍에 걸려 거동이 힘들었다고 하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가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등 경도의 치매 증상을 보였던 듯 하다.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다 1571년 10월 3일에 오다와라성에서 사망했다. 유언으로 '우에스기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케다와 동맹을 맺도록 하라'고 하는데 진의는 불명이다.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중 호조 우지마사는 차남이고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가 된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7남이라고 한다.

3. 창작물

호조 가문에서 제일가는 명군으로 꼽힌 인물답게 여러 창작물에 등장한다.

3.1. NHK 대하드라마

1988년작 다케다 신겐에서는 스기 료타로[10]가 맡았다. 신겐에게 여러 라이벌적인 존재들이 묘사되지만, 그중 우에스기 겐신 다음가는 강적이자 서로를 존경하고 인정하는 호적수로 묘사된다. 거의 신겐과 겐신의 카리스마에 숨겨진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 북쪽으로는 간토의 패권을 두고 우에스기 노리마사 및 그 뒷받침을 하는 우에스기 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마키아벨리스트 다케다 신겐, 자만심 강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대치하고 있다. 이마가와, 다케다와 전쟁을 벌이다가 나중에 이해 관계가 일치해서 함께 모여 서로 자식들을 결혼시켜 3국 동맹을 맺는데, 신겐과 우지야스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사이지만 자만심이 지나친데다 경박한 요시모토 쪽은 아무래도 무게감이 좀 후달린다. 느닷없이 카이 쪽에서 보이는 후지산을 요시모토가 "후지산 뒷면"으로 부른 것을 놓고 신겐과 잠깐 말다툼을 하는데, 자국의 자존심을 걸고 심각한 정치적 함의를 담은 신겐의 얘기를 개드립쯤으로 알아듣고 요시모토가 체통없이 실소를 터뜨리자 신겐과 나란히 어이없는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볼 정도(...) 곧이어 요시모토는 신겐의 배신으로[11] 죽는다.

요시모토 사후에는 재빨리 이마가와 가문을 배반해 통수를 치려고 하는 데다가 호조에게 이마가와 가문을 같이 찢어먹자는 의리 없는 요청을 하는 신겐에 대해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신겐을 상당히 매섭게 비난하여 양국은 동맹을 깨고 전쟁에 돌입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나의 기도 삼아서, 그 첫 번째 기도로 소금 수출을 중단하겠소이다."라고 말하는 우지야스는 그야말로 카리스마 덩어리. 이렇게 최소한의 도의는 지키면서도 정치적인 이해 득실을 냉철하게 따지는 명군이며, 진중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보고 박수를 친 뒤[12] "정초부터 새해를 보며 전쟁이라니, 무슨 인생이 이러한가!"하고 한탄하기도 하는 등 인간적이거나 내심으로는 평화를 원하는 면모도 있다.

단 한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깊이 생각할 줄도 모르고 적잖이 무개념한 아들 호조 우지마사. 나중에는 은퇴한 노구를 이끌고 가문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다케다는 배반했으니 쳐 없애야 한다는 단순 무식한 소리만 내뱉는 우지마사[13] 몰래 정치적인 이해 득실을 따져 다케다와 다시금 비밀 동맹을 맺는다. 이 때 신겐은 병든 몸으로 호조 가문의 안녕을 걱정하는 우지야스에게 감동받아 "좋은 친구를 두어서 기쁘오이다."라는 한 마디를 전하고, 우지야스는 우지마사가 있는 자리에서 신겐의 메시지를 받고 누구에게 온 서찰이냐 묻는 우지마사에게 "옛 친구니라. 너는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한 뒤, 바다로 나가 칼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 "그동안 일국의 좋은 군주 노릇을 했지만 다 헛된 것 같다. 천하를 제패할 야망을 좀더 가졌어야 했는데..."하는 씁쓸한 말을 남기고 죽는다.

2007년의 풍림화산에서도 어느 정도 능글능글한 아저씨 인상이긴 하지만 <다케다 신겐>만큼 느끼하지는 않다. 이 드라마에서는 초반에 다케다 가문에 복수심을 불태우는 주인공 야마모토 간스케가 임관을 요청하자 그 맹목적인 복수심을 지적하며 임관을 거부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14] 이후 가와고에 성 전투 에서 몇 배에 달하는 우에스기 가와 코가쿠보[15] 아시카가 가문의 군대를 계략을 써서 방심시켜 군기를 문란하게 만든 뒤 야습으로 괴멸시켜 버리는 화려한 전공을 세운다. 이처럼 꽤나 능력있게 묘사되지만 우에스기 켄신이 아군의 성에 접근해서 조총이 난사되는데도 태연하게 술을 들이키는 걸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묘한 의리 중시 성향이 있는데, 아버지인 호조 우지쓰나의 유언을 인용하면서 '귀천을 막론하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 정의를 지키며 멸망하는 것과 정의를 버리고 번영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라고 읇는 장면 등에서 드러난다. 그런 무사도적인 성격 때문에 원수인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적남을 생포했을 때 칼을 주며 당당하게 결투를 벌이기도 하는데[16], 유명한 얼굴의 상처는 이때 생긴 것으로 묘사된다.

여담으로 아들인 우지마사 역시 나오는데, 다케다 신겐과는 달리 아직 젊은 시절만 나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와 달리 마냥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재평가 때문인지 뚜렷한 문제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비중도 거의 없어서 어쩌다 한번 나오는 공기 신세.

3.2. 전국무쌍 시리즈

호조 우지야스(전국무쌍)

3.3. 센고쿠히메2

파일:external/image.rakuten.co.jp/moe_04_11.jpg
호조 소운의 딸로 나온다. 그럼 아버지 우지쓰나는? 원래는 호기심 많고 활달한 성격이지만 어머니의 교육으로 요조 숙녀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를 혐오한다.

3.4.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호조 우지야스(노부나가의 야망)

3.5. 태합입지전

여기서도 역시 먼치킨. 정무는 기본100으로 전 캐릭 통틀어 1위이고, 통솔도 무려 94나 된다. 가장 낮은 무력이 70인걸 제외하면 그 다음으로 낮은 것이 매력인데 89일 정도. 그렇다고 기능 쪽이 떨어지느냐 하면 건축이 2긴 하지만 개간 4에 광산 3. 당연히 공성시 최고의 기술인 토룡공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족경 3 기마 4 철포 3으로 어느 병과를 주더라도 제 몫을 해낸다. 보통 다른 가문으로 할 경우 다케다와 동맹을 맺어 풍림화산을 배우고 군소 세력을 병합하게 되어있는데 얼추 주변 정리를 한 후 상황을 보면 나머지 가문 중에서 세력치 1위는 보통 호조가. 서로가 확장을 잘 하지 않는 편인 란마의 장을 제외하면 세력치가 거의 항상 5천대에서 놀기 때문에 종속시키기가 어려운 가문.

3.6. 전국 바사라 시리즈

우에스기 겐신 호조 우지마사에게 우지야스가 이제 없어 유감스럽다고 말한다. 겐신은 우지야스를 되찾지 못하니 그야말로 아름답다고 하며, 후마 코타로한테도 우지야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자 우지마사는 항상 그렇게 아버지만 보고 있다고 질색한다. 우지마사와 겐신의 상호 대사를 보면 겐신은 우지야스만 언급한다. 이때 우지야스를 부르는 호칭은 우지야스.

그 외 호조 군의 무장이 "우지야스님만 계셨으면..."라며 불평한다. 전국 바사라 3 연에서 우지마사가 고유기로 선조 영혼 중 하나로 소환한다.

3.7.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호조 가문의 지도자로 나오며, 행정, 외교, 군사 모두 6점 만점에 5점이다. 다케다 신겐과 동일 스탯이다.

3.8. 센고쿠(만화)

센고쿠 곤베에에 등장. 작중 이미 고인이라 주로 회상으로 등장하며 명군주로 묘사된다.

3.9. 전국연희

호죠 우지야스(전국연희)


[1] 조선 신문고 제도와 비슷하다. [2] 이에야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히데요시가 실제로 고생하라고 보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 [3] 영역 자체는 아들 호조 우지마사의 대에 최대였다. 관동 지역 대부분의 다이묘들이 복종하였고, 다케다 - 우에스기 두 강력한 적들을 상대로 코즈케(上野)[17], 시모츠케(下野)[18] 지역에서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헤쳐나간 아버지와 달리 훨씬 상황이 유리했음에도 전쟁을 지지부진 끌어간 아쉬움이 있다. 심지어 멸망 직전의 다케다 가문과의 싸움에서도 오히려 밀려서 오다에게는 신종하고, 도쿠가와와는 동맹을 맺고 스루가를 협공하는 방법을 써야했다. [4] 쇼군을 대리하여 관동을 지배하는 자리. [5] 훗날의 우에스기 겐신 [6] 사실 사타케 가문도 아시나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 끼어들었다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패하는 등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7] 노부나가의 야망 최신작인 천도에서는 이 점을 반영했는지 우지야스의 얼굴에 칼빵을 추가했다. [8] 실제로는 가와고에 성 전투라는 단일한 거대 전투는 없었고, 몇년간 가와고에성 근처에서 지속적인 전투가 있었음을 감안했을때 우지야스 본인이 겪은 악전고투는 매우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센고쿠 다이묘라 해도 다이묘 본인이 얼굴과 전신에 수십개의 칼빵이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혈전을 많이 겪었음을 시사한다. [9] 실제로 지휘관이 전사하면 아무리 잘 단련된 정예 부대라도 지휘 체계 붕괴로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기에 지휘관이 함부로 전선에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위험이 크다. [10] 미토 고몬에서 초대 사사키 스케사부로를 맡았던 명 사극배우다. [11] 다케다의 지원군을 이마가와 군에 참여시킨 뒤 슬그머니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측에 요시모토의 본진 위치를 흘린다. [12] "카시와데"라고 하는 신토의 풍습. [13] 신겐의 딸인 아내와 비극적으로 이혼하게 된 데서 온 분노도 조금 있다. 그래도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건 그냥 병신 인증이지만... [14] 이 때 간스케를 소라에 비유하여, 소라가 맛은 있지만 제대로 조리해 먹지 않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능력은 있지만 복수심 때문에 사리분별이 떨어지는 간스케의 단점을 지적하고 더 원대한 목표를 가지게 되면 찾아오라는 조언을 해준다. [15] 아시카가 가문의 일족이 임명되는 자리로, 관동 호족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리다. [16] 물론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 아이라 상대가 될리 없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