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3:23:43

헤이우치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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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2010

파일:塀内 久雄2024.jpg
<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마린즈 베이스볼 아카데미
헤이우치 히사오
塀内久雄 | Hisao Heiuchi
출생 1981년 7월 7일 ([age(1981-07-07)]세)
에히메현 세이요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에히메현립 산베고등학교
신체 180cm / 82kg
포지션 내야 유틸리티( 유격수, 2루수, 3루수, 1루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99년 NPB 신인드래프트 4순위( ロッテ)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2000~2014)
지도자 마린즈 베이스볼 아카데미 코치 (2015~)

1. 개요2. 선수 경력
2.1. 고교 시절2.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국적의 前 치바 롯데 마린즈 소속 야구 선수. 현재는 치바 롯데 마린즈 아카데미 팀에서 코치를 맡고있다.

2. 선수 경력

2.1. 고교 시절

에히메현립 산베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코쿠의 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1999년 여름에는 에히메현 대회 1회전에서 탈락한다.고교 통산 30홈런으로 어느정도 펀치력이 있음을 증명했다.

1999년 드래프트 4순위로 치바 롯데 마린스에 지명돼 입단했다.

2.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데뷔초부터 턱뼈와 오른쪽 발목이 골절되면서 1군 데뷔가 늦어졌다 그러다 2002년부터 코사카 마코토의 부상으로 출전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오른쪽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을 받게되면서 2년간 재활을 하게된다.

2005년에는 부상 복귀 후 3년 만의 안타를 쳤다. 2군에서는 타율 0.328, 8홈런, 6도루로 활약했다.
한신 타이거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2차전에 2번 2루수로 첫 선발출장.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부상으로 결장한 호리 코이치, 코사카 마코토등을 대신하여 전 경기 선발 출장했지만 무안타에 그쳤다.

2006년 처음으로 개막 1군엔트리에 등록됐다. 시즌 초반 이후에는 준주전으로서 출장 경기 증가했지만, 타율은 2할을 조금 넘는 정도로 침체해, 주전까지는 되지못했다. 2군에서는 타율 0.305, 6홈런을 기록했다.

2007년 시즌에서는 니시오카 츠요시의 부상도 있어, 자신 최다 출장 기회를 얻었지만, 타율이 2할을 초반에 머무르는 부진에 가세해 보내기 번트 실패나 수비에서의 실책도 연발하였으며. 게다가 막판에는 오티즈의 중도 입단으로 출장 기회가 격감했다. 주로 대타 내야 수비요원으로 처음 시즌 내내 일군에 남았다. 2루수 47경기, 유격수 21경기, 3루수 19경기로 다양한 포지션을 지켰고 2루와 유격수는 팀 내 2위인 출전 경기 수였다.

2008년, 2년만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네모토 슌이치 다나카 마사히코의 등장으로 40경기 출장에 그쳤고, 타율도 0.153으로 매우 부진했다. 또 지난 8월 12일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는 6회초 사부로의 적시 2루타로 3루주자로 홈인할 때 부러진 방망이가 머리를 직격해 부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 16바늘을 꿰맸다. 또 마무리 캠프중인 11월 7일에는 외야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는 도중에 타구가 머리를 직격해 두개골 골절상을 입었다.

2009년 6월 18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에서는, 10회초에 임창용으로부터 무릎에 사구를 맞아 들것에 실려 나갔다.
8월 이후 타격의 상태를 올려 규정타석에는 부족했지만 입단 첫 타율 3할을 기록. 홈런, 타점도 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남겼다. 반면 좌완 투수상대로는 무안타에 그쳤다. 시즌 종료후 김태균이 입단하면서 등번호가 52번에서 16번으로 변경됐다.

2010년에는 51경기에 출장했지만, 내야의 주전자리가 고정된 데다가 어느 선수도 부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발출장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주로 1루 대수비나 대주자로 출장에 머물렀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대수비로 출장해, 그 후 타석에서 일본 시리즈에서의 자신의 첫 안타를 기록. 시즌오프, 등번호가 23으로 변경됐다.

2011년도 개막전부터 전년과 같은 대주자나 1루 대수비 등으로 출장. 그 후는 오기노 타카시의 부상 이탈에 의해 2년만에 유격수로서의 선발 출장도 있었지만 스타맨 정착에는 이르지 못하고, 7월에 출장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9월에 잠시 1군에 복귀하였지만 별다른 활약없이 시즌을 마쳤다.

2012년, 예년과 같이 대주자나 1루의 대수비 등으로 출장하고 있었지만, 여름 이후 출장 기회가 감소해, 8월에 출장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10월 6일에 현지 에히메에서 개최된 2군 일본 선수권에서는 7번·1루수로 출장해, 2 안타 2 타점의 활약으로 승리에 공헌, 최우수 선수로 선출되었다.

2013년은, 8월에 네모토 슌이치의 부상으로 1군 승격. 네모토가 지키고 있던 2루수 외, 이마에 토시아키가 결장시에는 3루수도 맡았다. 또 예년과 마찬가지로 대주자나 1루 대수비로 출전했지만 3년 연속 타율 1할대에 그쳤다.

2014년은 개막부터 한 번도 1군에 승격하지 않았고, 10월 5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12월 2일 자유계약 공시되었고 결국 은퇴를 하였다.

3. 은퇴 후

2015년부터는 마린스 베이스볼 아카데미(MBA)의 코치를 맡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내야라면 어디서나 지킬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다. 진짜 별다른 활약없이 이 수비 하나로 프로에서 14년을 버틴선수다 선수들이 입을 모아 수비장인이라고 할정도로 수비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으나 30살이 넘어가면서 수비력도 떨어지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주로 1루 대수비로 나왔다.

고교시절 통산 30홈런 타자답게 의외의 장타력이 있고[2],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스윙하는 타격 스타일이라, 삼진이 많다.

5. 여담

  • 현역시절 믿을 수 없는 부상이나 플레이에 몇번이나 관련되는 것으로부터, 일부에서 「암흑신」이나 「암흑 왕자」등으로 불렸다.


[1] 사실 2010년의 경우는 말이 우승반지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엔트리에서 겪었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0년에 공식적인 우승반지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 다만 2005년에는 만들었다. [2] 다만 1군에서 장타력을 보여준 적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