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泰榮
1919년 12월 11일 ~ 1957년 9월 24일 (향년 37세)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인 이며 육군 대령 출신이다. 본관은 하양2. 생애
1919년 12월 11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중화의 부농가(富農家)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경산과 황해도 평산을 거쳐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평안남도 평양 만수보통학교 3학년 시절(1928년)에는 종교를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훗날 평안남도 평양고등농림학교(1938년)를 나온 그는 1938년 3월 당시부터 1940년 3월까지 평안남도 평양 종로소학교 급사 등을 거쳐 1940년 3월 2일 당시부터 1942년 3월 9일 당시까지 경기도 양주백석국민학교 급사를 잠시 모두 4년 남짓 지내다가 그만두고 1942년 4월 12일, 일본군 헌병보에 입대하였으며 1945년 양력 8월 15일을 기하여 조선 광복을 목도하면서 일본군 헌병보 군직에서 파면된 그는 도쿄를 떠나 나고야에서과일 장사꾼 등으로 변장하여 자금을 모아 1946년 5월 당시에 귀국하였으며 그 후 미군정청이 주관하는 국민학교 교원 특채 시험에 입격(합격)하여 1947년 3월 당시에서부터 1948년 3월까지 1년간 경기도 양주 소재 장흥국민학교 교원 등을 잠시 지내다가 그만두고 1949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특8기로 임관하였으며 같은 해 1949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1기를 나온 그는 1950년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2기를 나온 후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그는 1956년 1월 30일을 기하여 결국엔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 장군을 암살, 이른바 "김창룡 장군 암살 사건"을 중요 임무 종사하여 군사재판(군법회의)에 기소되었고 재판 끝에 사형이 선고되어 육군 대령 강제 예편된 그는 김홍섭(金洪燮) 판사의 권유를 받아 옥중에서 개신교를 이탈하여 천주교로 두번째 개종을 하였고 1957년 9월 24일을 기하여 옛 직속 부하 이유회(李留會) 예비역 육군 중사와 함께 사형(총살형)이 집행되었다.
3. 김창룡과의 일화
허태영은 김창룡과 같은 일본군 헌병 출신이었고 성격이 호방했으나, 나쁘게 말하면 허풍이 심한 스타일이었다.평양 농업학교 시절 부터 그의 별명은 허꽝 이었다. 또한 주색잡기에 능했으며, 돈을 벌고 모으는 능력이 뛰어나 이 돈을 사람들에게
풀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독고다이 기질의 김창룡과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정일권은 특이하게 허태영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늘 허태영을 불러서 같이 식사를 했다. 허태영이 중령으로 진급할떄에도 정일권이 금일봉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김창룡과는 잘 맞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앞에서 김창룡의 험담을 자주하였고, 부하나 친구들에게 술과 밥을 사면서 "언젠가 내가 특무부대장이 될거다"란 말도 했다. 당시 군 행정이 개판인것을 알고 가는 곳마다 병적에도 올라와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운전병이라고 부르면서 4~5명씩 사병처럼 대동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런 말들이 김창룡의 귀에 들어갔고, 특무대 장교들을 정리하면서 허태영을 일반 부대로 전출했다. 특무대를 떠나던 날 김창룡 부대장에서 신고하고 부대장실에 나온 후 권총을 뽑아 문에다 한발 쐈다. 다행히 이를 부관이 오발사고라며 덮어 주었다.
1954년 11월, 정일권의 도움으로 1년뒤 서울지구병사구 사령관이 되었다.
지금의 서울병무청장에 해당되는 이자리는 원래 대령이나 준장이 가는 자리였지만 임시대령 계급장을 달고 허태영이 부임했으나 1년만에 해임되었고 이를 김창룡 떄문이라 탓하며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