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3:30:11

한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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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캔디
Xankəndi | Khank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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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캔디 수복 후 11월 8일 승리의 날 기념식에 아제르바이잔군의 열병식이 열렸다. 사진 오른쪽 건물들은 아르차흐 공화국 의회와 전몰자 기념관인데 후술하는대로 2024년 3월 4일, 아제르바이잔이 철거했다.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인구4. 역사
4.1. 아제르바이잔의 탈환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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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캔디는 아제르바이잔의 도시로 '(xan)의 마을(kənd)'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이지만 오랫동안 아제르바이잔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고 미승인국 아르차흐 공화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르차흐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2. 언어별 표기

아제르바이잔어 Xankəndi
아르메니아어 Ստեփանակերտ(스테파나케르트), Վարարակն(바라라큰)[1]
러시아어 Степанакерт(스테파나케르트)
튀르키예어 Hankendi(한켄디)

3. 인구

고산지대를 뜻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중심 도시이지만, 810m 고도에 있어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보다 고도가 약간 낮다.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약 55,200명이다.

소련 말기에는 도시 인구 56,000명 중 아제르바이잔인도 인구의 14%를 차지했으나, 1990년대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때 모든 아제르바이잔인이 쫓겨났고, 시민 대다수를 아르메니아인이 차지하였지만 2023년 말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 곳을 떠나 아르메니아로 이주한 후 유령도시가 되었다.

4. 역사

중세기 아르메니아의 자료에 따르면, 이 도시는 바라라큰(Վարարակն, '물살이 거센 개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며, 본래 18세기 후반에 존재했던 카라바흐 칸국의 칸들의 여름별궁이 세워진 곳으로[2] 당시에는 별궁 외엔 마을이랄게 없었기 때문에 한캔디(Xankəndi, '이 사는 곳')라고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소련 성립 후 1923년에 도시의 지위를 얻었고, 아제르바이잔 SSR 산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수도가 되었다. 아르메니아어 이름인 스테파나케르트는 '스테판이 세운 (도시)'라는 뜻으로 아르메니아인 공산주의자였던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년 10월 13일 ~ 1918년 9월 20일)'[3]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1923년에 소련 정부가 붙인 이름이다.

스테판 샤후먄은 아르메니아인으로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여 바쿠 코뮌을 이끌며 '캅카스의 레닌'이라 불렸다. 혁명 와중에 이에 저항하는 아제르바이잔인과 충돌하여 3월 사건 당시 바쿠에서만 3천에서 1만 2천명 가량이 학살됐다. 또 그 영향으로 캅카스 전역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아르메니아와 소련 볼셰비키들한테 수만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비롯한 무슬림들이 학살되기도 했다. 이 3월 사건의 보복으로 누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바쿠 전투 후 바쿠에 입성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을 1만–3만 가량 학살하기도 하는등 상호학살이 벌어졌다. 바쿠 코뮌이 무너진 후 샤후먄은 아스트라한으로 도망치려고 시도하다가 크라스노보츠크에서 반볼셰비키파인 사회혁명당에 의해 체포되어 1918년 9월 20일 바쿠 코뮌을 이끌던 25명의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처형됐다. 소련 시절 샤후먄은 26인의 바쿠 인민위원(26 бакинских комиссаров)이라는 이름으로 혁명 영웅화되어 일함 알리예프의 아버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1978년 스테판 샤후먄을 캅카스의 영웅이라며 칭송하기도 했다.[4]

그러나 1991년 소련 해체를 전후하여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고 아제르바이잔이 독립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 스테판 샤후만의 평가는 수직낙하하였다. 우선 아제르바이잔은 다시 도시 이름을 아제르바이잔어인 '한캔디'로 바꾸었다. 또한 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 전역에 세워진 스테판 샤후먄의 동상들을 철거하고 바쿠에 있던 그의 무덤까지 갈아엎었다.[5]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내 다른 지역과는 달리 스테파니케르트는 아르메니아인 다수 지역으로써 아르메니아 편입 여론이 고조되었고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의 상호 폭력 사태도 잦았다. 아르메니아인 세력은 자체적인 군사력을 구축해 1991년에 결국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아르차흐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한캔디(스테파니케르트)를 수도로 삼았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에 반발해 독립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시도했고 이것이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현지 민심의 비협조와 열악한 형편, 아르메니아의 독립세력 지원이 겹쳐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에 연전연패했고, 오히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에 점령지를 더 내준 상태에서 1994년에 휴전했다. 이로써 스테파니케르트에는 아제르바이잔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게 됐고, 도시 내 아제르바이잔인은 모두 추방되었다. 도시 이름도 다시 한캔디에서 스테파니케르트로 되돌아갔으나, 물론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군사력을 키웠고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1994년 당시 잃어버린 영토 상당수를 되찾았다. 이후에도 스테파나케르트는 아르차흐 공화국의 영토로 남았지만, 이마저도 러시아군이 영구주둔하며 평화유지군으로 남게되면서 두 나라 갈등을 막겠다고 한 터라, 아르메니아로선 복수전을 꿈꾸기도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누리꾼들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아르메니아 본국의 상황을 비웃으며 국제정치를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 상황이 현실이 된 셈이다.

사실상 20세기에 새로 개발된 중소 계획도시답게 도시의 중심부에는 소련 시절 건설된 시설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 심부의 광장은 레닌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아르차흐 치하에서 르네상스 광장(Վերածննդի հրապարակ), 아제르바이잔의 수복 이후 승리 광장(Victory Square)으로 이름이 개칭되어 갔다. 주변의 구 대통령궁, 호텔 등 시설물은 모두 소련 시절 건설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이 2023년 이곳을 수복했을 때 자국 건축가들이 소련 시절 지은 건물로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철거하지 않는 대신 아르메니아 물을 빼고 소련 시절 처음 건축되었던 양식대로 되돌리고 아제르바이잔 상징물들을 부착하는 공사를 거쳤다.

도시 근교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우리는 우리의 산 기념비가 있다. 이는 아르차흐 공화국 시절 분리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나 역사적으로는 소련 시절인 1967년 아제르바이잔 예산으로 세워진 화합 기념비이다. 아제르바이잔은 휘하 자치주의 문장에도 상징으로서 삽입되었던 이 유명한 기념비가 분리주의자들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과 무관하게 아제르바이잔이 건설한 사적지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도시 수복 이후에도 보존하기로 한다.

호잘르 공항(khojaly Airport)이 있지만 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스테파나케르트 공항으로 개명되었고 보안상 이유 때문에 비행기가 이착륙하지 못하는 공항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아제르바이잔은 분쟁해결없이 운행할경우 영공침범으로 간주하고 격추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스테파나케르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아르메니아를 통해 육로로 가는 것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나면 다시 항공편이 생길 가능성이 열리긴 했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에서 이곳으로 육로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11월 10일 삼자공동선언에서 아제르바이잔이 영유하기로 승인된 슈샤와 아제르바이잔 본토를 오고 가려면 무조건 스테파나케르트와 11월 20일에 정식으로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온 아그담을 지나야만 하기 때문이었다.[6] 삼자공동선언에서도 "도로의 개방"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흐츠반과 아제르바이잔 본토 사이의 아르메니아를 경유하는 육상도로의 개방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 조항이 적용된다.

원래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는 한캔디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슈샤였고, 제정 러시아 시기에 슈샤군(Шушинский уезд)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소련 시기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주도가 스테파나케르트로 옮겨가면서 스테파나케르트가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아르차흐 공화국은 2022년까지 입법부를 상징성이 큰 슈샤로 옮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 전쟁 결과 아제르바이잔이 슈샤를 수복하게 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4.1. 아제르바이잔의 탈환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전쟁으로 탈환한 슈샤를 옛 카라바흐 칸국 수도로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최고 도시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알리는 만큼, 아제르바이잔 오일과 가스 자본력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1994년 이후로 나가야 했던 실향민들이 대거 슈샤로 돌아오고 싶다고 하여 인구가 대폭 늘게 뻔한데 슈샤와 스테파나케르트는 겨우 3킬로미터 수준도 안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문제는 러시아군 평화유지군이 철군하는 2025년 이후 일이다. 아제르바이잔이 여기마저도 차지한다고 나설 수 있다는 점. 아르메니아도 이걸 알고 미군이나 나토군에 평화유지군으로 아르차흐 남은 곳이라도 주둔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는 튀르키예와, 이 지역의 강대국인 러시아의 반대를 이겨낼지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젠 아제르바이잔 영토가 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튀르키예군까지 주둔하기로 할 상황이라 아르차흐 홀로 튀르키예군과 아제르바이잔군을 상대하는건 불가능에 가깝고 아르메니아로부터 고립된 아르차흐가 버틸 수가 없다는 게 문제. 물론 러시아 강압으로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해도 아제르바이잔에게 포위되어 버리는 상황이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철군도 하기 전인 2021년 중순부터 아르차흐 곳곳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 양측은 서로 휴전을 위반했다고 비난하고있다. 국경에서 서로 총격전에 포격전도 벌이고 있는데 10월까지 아르메니아가 압도적으로 큰 피해를 당하고 사상자 수도 압도적으로 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죽어라 국제적 지원을 해달라 애원하지만, 아프가니스탄 문제라든지 다른 나라 문제로 그야말로 묻혔다. 평화유지군인 러시아군도 구경하고 있을 지경.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본토에 공격하면 당연히 두 나라 상호 군사 협조 조약으로 러시아군이 대거 주둔 중이고 조약과 상관없는 아르차흐 남은 곳에 선제공격에서부터 국경선을 군대가 넘어가고 있지만 국제적 관심도는 못 받는 현실에 아르메니아로선 곤혹스러울 뿐이다. 게다가 2022년 2월 22일에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는 동맹 선언을 했고 이 선언서 내에는 "양국은 각자의 고유영토 내에서 조직 및 개인이 상대방 국가의 주권, 독립, 영토보전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막는다."(Onlar öz ərazilərində təşkilatların və şəxslərin digər tərəfin dövlət suverenliyinə, müstəqilliyinə və ərazi bütövlüyünə qarşı yönəlmiş fəaliyyətinin qarşısını qətiyyətli surətdə alırlar.)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는데, 이것은 국제법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영토권회복에 대해 러시아는 개입하지 않거나 심지어 인정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

결국 2022년 3월말에 아제르바이잔군이 전면적 침공을 가하여 파루흐(Farukh, 아르메니아어: Փառուխ, 아제르바이잔어: Fərrux)가 함락되었다. 그나마 인구 100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기에 아제르바이잔군은 물러났다고 러시아 측이 주장했으나 고립되어 4월 10일까지도 아르메니아에선 파루흐에 대한 소식이 두절되어 통신도, 육로도 막혔다고 한다. 파루흐는 동쪽으로 아제르바이잔 국경에 닿은 곳이라 정반대쪽인 스테파나케르트는 거리가 있다.

2023년 9월 28일에 아르차흐 공화국이 2024년 1월 1일 부로 자진해산할 것을 밝혔고, 2023년 9월 29일에 아제르바이잔 경찰이 입성하면서 한캔디는 완전히 함락되었으며 # 이후 주민들이 대부분 아르메니아로 도피하면서 사실상 유령도시가 되었다.[7] #

이후 2023년 10월 15일,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한캔디에 도착해 아르차흐 대통령궁에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게양하고 아르차흐 의회, 정부청사 등을 살펴보면서 아르차흐는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 #

2024년 3월 4일 아르차흐 공화국의 유산인 의회와 전몰자 기념관을 철거하였다. #

5. 여담

  • 아제르바이잔의 이스마이을르 구(İsmayılı rayonu)와 샤마흐 구(Şamaxı rayonu)에도 동명의 마을이 존재한다.

[1] 옛 명칭 [2] 슈샤 실향민의 말에 따르면, 슈샤는 겨울철이 따뜻하고 산악지대에 둘러싸인 카라바흐치고는 기후가 좋은 곳이지만 분지지형이라 여름철에 무진장 덥다고 한다. 그래서 카라바흐 칸국의 칸들은 여름에는 고도가 좀 더 높은 한캔디의 별궁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3] '스테판 샤우먄(Степан Шаумян)'으로도 알려져 있다. [4] “그리고 오늘 우리는 자부심과 사랑을 담아 말한다, 스테판 샤후먄, 아르메니아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자, 또한 아제르바이잔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자, 모든 자캅카스(Закавказье, Transcaucasia) 전체 인민의 아들이며, 소련의 모든 민족의 아들이다. 1978년 헤이다르 알리예프 / And today we say with pride and love, that the great son of Armenian people Stepan is also the son of Azerbaijani people, all people of Transcaucasia, all multinational and united Soviet people.” [5] 사후 샤후먄은 바쿠에 세워진 26인의 바쿠 인민위원 기념묘지에 안장되었는데 2009년에 아제르바이잔 당국이 기념묘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샤후먄 뿐만 아니라 바쿠 코뮌 소속이던 4명의 아르메니아인 공산주의자들 시신까지 동시에 사라졌는데 시신을 어떻게 했냐는 아르메니아의 분노에 "원래 시신이 21구 밖에 없었으며 사실 샤후먄과 그 4명은 죽지 않고 살아서 도망친 거다(...)"는 비범한 변명을 하기도 했다. 정황상 시신을 아예 없애버렸거나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그냥 파묻어버렸다는게 중론. 아제르바이잔이 카라바흐 지역을 수복하면서 그곳에 있는 그의 동상도 때려부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는 아직도 그의 동상이 있으며, 아르메니아에선 여전히 동상도 건재하다. 이에 대해 학살자를 찬양한다고 튀르키예로부터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얽혀 비웃음을 듣고 있다. [6] 슈샤 밑으로 아제르바이잔군이 탈환한 마을들이 있지만 산과 숲이 가로막고있어 직접적인 육상교통로가 없다. 아제르바이잔군은 그 길도 없는 곳을 산과 강을 타고 절벽을 올라 돌파해서 슈샤를 탈환해 허를 찔렀고 결국 아르메니아가 항복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7] 또한 대통령궁, 의회에서 아르차흐 공화국의 국기가 철거된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