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13:55:49

한진원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7년생으로 추정
서울특별시
사망 미상
학력 피어슨 성경 기념 학원(Pearson Bible Training School)
종교 개신교 장로회
독립운동 경력 한족동맹(韓族同盟) 선전부장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묘소 알 수 없음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광복 이후5.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진원은 서울 출신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출생년도 및 독립운동 가담 이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3. 독립운동

그는 1941년 4월 17일 <유주일보(柳州日報)>에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 삼민주의'를 기고했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본 삼민주의
단언컨대 이번 중왜전쟁(中倭戰爭)의 최후승자는 당연히 중국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독립’ 두 가지는 한 민족 최저한도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은 지금 자위를 위해, ‘생존’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위는 인류의 본능이다. 자위에는 강약의 비교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선악의 표준만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일본 제국주의자와 일본 군벌은 선악은 제쳐두고 오직 강약만을 따지고 있다. 물질의 유무가 인류사회를 좌우할 수 없다. 인류의 마음은 선악을 구분할 줄 알고, 선과 악을 통해 어둠과 광명을 분간한다.

나는 (蔣) 위원장의 ‘일본 민중에게 고하는 글’을 이미 세 번 읽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글의 모든 구절이 나를 무한한 감상에 잠기게 하였다. 이 글을 읽고 내가 느낀 바는 무엇인가? 이 글을 읽고 무엇보다도 삼민주의의 위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난 뒤 삼민주의가 실현된 뒤에야 비로소 세계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본 민중에게 고하는 글’에서 위원장은 특별히 우리 대한민족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였다. 위원장은 또한 이번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간 일본이 이번 침략전쟁을 도발한 것은 인도(人道)에 벗어난 행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이번 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동시에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한순간도 지운 적이 없었다. 하루속히 한국이 광복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본제국주의의 실패, 일본 군벌의 소멸, 일본 민족혁명의 폭발을 바랄 따름이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에 도착한 뒤 비로소 위원장이 이미 한국의 존재를 인정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주(美洲)에 거주하는 교포들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한국광복군이 날로 장대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우리 한국인들을 기쁘게 하고 위로가 되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가 고향을 떠나온 본래 목적은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국 항전의 승리, 한국 광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까하여 예루살렘행을 중도에 포기하였다. 중국에 오기 전 고향에 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쑨원(孫) 총리(總理)의 학설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깊이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뒤 김문호(金文鎬)군(한국인으로 한국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한국광복군 동남지대의 징모 업무 담당)이 선물한 삼민주의를 꼼꼼하게 읽고 난 후, 비로소 그 안에 담긴 깊은 뜻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천박하나마 삼민주의를 읽은 뒤의 감상을 간단하게 적어볼까 한다.

총리의 일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적수공권으로 혁명을 영도하여 끝내 성공을 거둔 위대한 정치가였다. 영어에 능통하고 박학다식한 손 총리가 지은 삼민주의의 이론체계는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민족 · 민권 · 민생을 합하여 완성된 삼민주의 중 민족주의에서 손 총리는 중국 민족의 자유해방, 세계 피압박민족의 일률적인 해방과 평등 등 권리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삼민주의의 위대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지난 반생을 허송세월하여 후회막급이다. 이제부터라도 중국 항전의 승리를 위해,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비록 보잘 것 없는 힘이나마 보탤 결심을 가져본다.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지 15년이 되었다. 지난 15년간 나는 세계평화를 수시로 기도하였다. 지금의 생활은 매우 편안하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은 매일 위원장의 ‘일본 민중에게 고하는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그 후 한진원은 1942년경 일본군 점령지역을 빠져나가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에 가담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공작인원 명단(1943년 7월)
직책 성명 연령 적관 출신 비고
대장 김문호 29 황해 해주 해주보통학교, 해주중학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 졸업
대원 김운경 27 경성 경성 매동공립보통학교 제 3전구 포로/ 광복군 편제에 제외 보안처에서 관리
대원 왕영일 32 함남 원산 일본 다이인 고급중학 졸업 제 3전구 포로
대원 마춘림 31 황해 해주 해주중학 졸업 제 3전구 포로
대원 신봉빈 31 전북 전주고등과 여성, 신정숙으로 김문호의 내연녀
대원 이지일 28 평북 신견중학 교사 가명 전선학[1]
대원 김형석 25 전북 농림학교 졸업, 측량기사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이명식 24 황해 해주 고등학교, 장사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한진원 24 경기 경기 숭실중학 졸업, 교사 제 3전구 포로, 현재 항저우에 있음
대원 유명경 26 강원 강원농업학교 졸업, 농림기사 펑텐 거주
대원 유상운 27 황해 해주 옥산여고 졸업, 교사 여성, 상하이 거주
대원 이기심 27 경기 인천중학 졸업, 기사 제 3전구 포로, 항저우 거주
대원 진몽각 35 평북 신의주 중학 졸업, 제지회사 사원 상하이 거주
대원 증 명 24 경기 경기고등직업학교 졸업 난징 거주
대원 조동걸 28 함북 청진고등중학 졸업. 교원 상하이 거주
대원 최일영 29 경기 경성 숭실중학 졸업, 운전수 상하이 거주
대원 김운정 33 전남 하포중학교 졸업, 장사 난징 거주
대원 사중득 24 전남 부산중학 여성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유증영 26 중국 산시성 간이사범학교 졸업 여성, 중국인,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정봉수 제 3전구 포로, 횡령 도망하여 붙잡혀 처벌됨.
대원 김 의 제 3전구 포로, 정봉수와 도망

이후 유기석이 이쓰는 한교전지공작대에 편입되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Strategic Services Unit, 미 전쟁성 [2]
국적 : 한국
제목 : 한족동맹(韓族同盟) 간부들, 마오린(茂林) 본부
문서기원 : 상하이
전구 : 중국
문서 생산날짜 : 1945년 5월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1.jpg
유수인 한족동맹 의장. 현재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주임. 41세 진링대학(金陵大學) 졸업. 향촌사범학교 교장, 남화한인연맹 가담.
박철원 한족동맹 총비서[3].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27세, 남경중앙대 농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및 만선일보 기자.
전일 한족동맹 조사위원장. 30세이며 일본에 센슈대학(専修大學)에서 공부함. 만주의 조선혁명당[4]의 정보부장.
정동율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43세, 숭실대학 졸업.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2.jpg
이일범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 헌병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안강 한족동맹 총무과장. 26세 일본중앙대 졸업. 안후이성(安徽省) 벙부(蜯埠)에서 일본영사관 직원이었다.
조일문 한족동맹 정치부장.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군 특무부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김호 한족동맹 훈련부장. 32세 보성고등학교 졸업. 환남총사령부 고문.
류향 한족동맹 비서. 24세. 일본의 대학에서 다닌 적이 있다. 광신소학교 교장.
심용철 한족동맹 비서. 32세. 푸젠셩(福建省) 민생학교(民生學敎)[5]에서 훈련반 졸업. 난징괴뢰국(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의 훈련장교였다.
피춘여 한족동맹 총무부 총무본부. 26세 봉천대학
변일성 한족동맹 총무부 회계조장. 25세. 도쿄이과대학.
정람명 한족동맹 총무부처 공공복지담당. 26세, 평양전문의대 졸업. 약사
김형석 한족동맹 정치부 정보장교. 28세.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 분대장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3.jpg
한진원 한족동맹 선전부장. 38세. 피어슨 성경 기념 학원(Pearson Bible Training School)[6] 졸업. 한국광복군 대원
김해성[7] 한족동맹 징모처장. 28세 강계고등학교 졸업. 난징괴뢰국의 특무대원.
석원석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3세. 일본군 26사단 통역병.
박화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2세. 난징중앙대 건축과 이수.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8]

4. 광복 이후

광복 이후 기록은 미비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진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5. 참고문헌

한진원의 공적정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0·35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35·237·615면
[1] 본명은 김응삼, 일명 한도명으로 알려져있는 평북 선천 출신 인물로 1942년 6월에 절감회전(浙贛會戰) 난계역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규학(이지일)이 동료의 별명을 문서에 적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2]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존재했던 미국 정부 의 정보 기관. 이는 전시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의 비밀 정보 및 대첩 부서로 1945년 10월 1일 창설된다. 이 문서는 중국전구(China Theatre)에 주둔하던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요원이 작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조직은 훗날 미국 CIA가 된다. [3] 유기석 회고록에선 보조대장으로 불린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4] 양세봉, 지청천 [5] 1937년 평민중학교(平民中學校)의 교사였다. [6] 現 평택대학교 [7] 산시성 시안 2지대의 김해성과 다른 동명이인이다. [8]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