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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한양학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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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한양학원 學校法人 漢陽學園 HANYANG FOUNDATION |
|
국가 | 대한민국 |
분류 | 사립학교법인 (교육재단) |
설립일자 | 1946년 5월 |
설립자 | 김연준 |
이사장 | 김종량 |
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 222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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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愛之實踐
1. 개요
학교법인 한양학원(學校法人 漢陽學園, HANYANG FOUNDATION)은 한양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학교법인이다.1939년 김연준 박사에 의해 한양대학교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으로 설립되어 1946년에 재단으로 전환됐다.[1]
검정고시 학원인 한양학원과, 해당 학원을 운영하는 (주)매경아이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2. 건학정신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
한양학원의 건학정신은, 학생들로 하여금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 할 수 있도록 교육하여 근면, 정직, 겸손, 봉사할 수 있는 인간형성을 도모하고, 숭고한 학문 정신을 드높여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나라와 겨레, 나아가 인류를 위해 이바지하는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를 기르는 데 있다.
한양학원의 이와 같은 건학정신은 대한민국 교육법 제1조에 명시된 홍익 인간의 이념에 입각한 개인의 인격 완성, 자주적 생활능력을 갖춘 공민으로서의 자질 함양, 그리고 민주 국가발전에 봉사이며 인류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할 국민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3. 고등교육기관
- 한양대학교(漢陽大學校, HANYANG UNIVERSITY)
- 한양여자대학교(漢陽女子大學校, HANYANG WOMEN'S UNIVERSITY)
- 한양사이버대학교(漢陽사이버大學校, HANYANG CYBER UNIVERSITY)
4. 중등교육기관
4.1. 고등학교
-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漢陽大學校 師範大學 附屬高等學校, HANYANG UNIVERSITY HIGH SCHOOL)
- 한양공업고등학교(漢陽工業高等學校, HANYANG TECHNICAL HIGH SCHOOL)
4.2. 중학교
-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漢陽大學校 師範大學 附屬中學校, HANYANG UNIVERSITY MIDDLE SCHOOL)
- 한양중학교(漢陽中學校, HANYANG MIDDLE SCHOOL)
5. 초등교육기관
- 한양초등학교(漢陽初等學校, HANYANG ELEMENTARY SCHOOL)
6. 유아교육기관
- 한양여자대학교 부속유치원(漢陽女子大學校 附屬幼稚園, HANYANG WOMEN'S UNIVERSITY KINDERGARTEN)
7. 산하 기관
- 한양대학교의료원(漢陽大學校醫療院, HANYANG UNIVERSITY MEDICAL CENTER)
8. 산하 영리법인
- 한양증권
- 한양산업개발
- 백남관광
-
기독교신문
#
기독교신문은 1965년 12월 12일 창간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초교파지로서 한양대학교 재단 산하에 있는 신문사이다. 매주 80,000 여부씩 제작하고 있으며 전국의 교회 및 1,200만 크리스천들을 상대로 배포하고 있다. 한자로 쓰여진 '基督敎新聞'은 김연준 박사의 서체이다. 참고로 한양대학교의 학보인 '漢大新聞'도 김연준 박사의 서체이다. -
대한출판
1975년 1월 회사 설립 후 출판사업을 하다가, 현재는 회사 소유 건물에 대해 자기관리 및 임대를 하고 있다. -
대한일보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현제명의 중재로 기업인 홍찬(洪燦)[2]이 운영하다 위기에 처한 평화신문을 인수한 것이다. 그 후 1961년 2월1일, 이 신문의 제호를 대한일보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언론사업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대한일보는 동아·조선에는 비할 수 없었으나 중간급 중앙지로서 위상을 굳혀 나갔다. 그러나 1973년 자진 폐간 [3] -
한양영화공사
1960년대에 한양영화공사라는 영화사를 설립해서 영화제작을 하기도 하였다. 1960년에 한양대에 연극영화과를 설립하고 1961년 12월에 한양영화공사를 설립하였다. 당시 군부세력에 의해서 영화법이 개정되고, 군소영화사가 통폐합되는 와중에, 영화사가 등록제로 변하면서 설립요건이 까다로워졌는데, 한양영화공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규모의 투자를 통해 설립을 인가받고,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대작영화 등을 제작 흥행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60년대 중후반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전속계약을 맺고 제휴한 아카데미극장[4]과 함께 당시까지 주먹구구 일변도였던 영화사업 부문에서 나름 체계적인 프로듀서 시스템 등을 도입하는 등 족적을 남겼다.[5] #[6] # -
대한해운공사
1968년 인수 후 민영화했으나, 1977년 서주산업에 매각함.
9. 산하 비영리법인
- 한양대학교 국제재단 #
10. 임원진
학교법인 한양학원 임원진 | ||||
직위 | 성명 | 소속 | 임기 |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
이사장 | 김종량 | 前 한양대학교 총장, 前 한양사이버대학교 총장 | 2023년 3월 19일 | 2027년 3월 18일 |
이사 | 백경순[7] | 前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장 | 2022년 12월 11일 | 2026년 12월 10일 |
이사 | 김용만 | 前 한양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장 | 2022년 2월 6일 | 2026년 2월 25일 |
이사 | 오웅탁 | 前 한양대학교 부총장 | 2020년 5월 31일 | 2024년 5월 30일 |
이사 | 이재성 | 前 한양대학교 부총장 | 2021년 3월 1일 | 2025년 2월 28일 |
이사 | 김원중 | 법무법인 한별 대표변호사 | 2022년 12월 4일 | 2026년 12월 3일 |
이사 | 이기정 | 한양대학교 총장 | 2023년 3월 1일 | 2027년 2월 28일 |
이사 | 안경성 | 개방이사, 前 한양대학교의료원장 | 2021년 11월 20일 | 2025년 11월 19일 |
이사 | 손정식 | 개방이사. 한양대학교 경제금융대학 명예교수 | 2020년 2월 3일 | 2024년 2월 2일 |
이사 | 유병태 | 개방이사, 前 한양사이버대학교 부총장 | 2023년 11월 24일 | 2027년 11월 23일 |
감사 | 오신환 | 공인회계사 | 2021년 9월 7일 | 2024년 9월 6일 |
감사 | 이형규 | 개방감사,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 2020년 7월 17일 | 2023년 7월 16일 |
11. 역대 이사장
역대 학교법인 한양학원 이사장 | |||||
순번 | 성명 | 직함 | 임기 | 기간 | |
취임일 | 퇴임일 | ||||
1 | 김연준 | 이사장 (초대) | 1946년 5월 | 1962년 2월 7일 | 16년 |
2 | 백경순 | 이사장 (2대) | 1962년 | 1980년 | 18년 |
3 | 신봉조 | 이사장 (3대) | 1980년 | 1980년 | 1년[8] |
4 | 김연준 | 이사장 (4~11대) | 1980년 | 2007년 | 27년 |
5 | 최선근 | 이사장 (12대) | 2007년 3월 28일 | 2011년 7월 | 4년 |
6 | 김종량 | 이사장 (13~14대) | 2011년 7월 29일 | 현재 | 재임 중 |
12.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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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학원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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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뫼의 높고도 굳은 뜻으로 한가람의 맑고도 깊은 맘으로 우리는 배우리 쉬임이 없이 참되고 착하고 고이 사는 길 배워서 조국의 빛을 더하리 한양 한양 무궁하도록 삼천리 강산에 빛을 더하리 김연준 작사ᆞ작곡[9] |
[1]
학교법인 설립일자는 이 재단 설립일을 따른다.
[2]
일제강점기 약초극장(수도극장/
스카라극장의 전신) 지배인으로 일하다 해방후 불하받아, 약초극장을 수도극장으로 바꾸고, 수도영화사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큰돈을 벌었다. 해방후 우익활동을 통해
이승만과 친분을 다졌으며, 그 뒷배로 1957년 안양에 6만여평의 동양 최대규모의 영화촬영 스튜디오를 만들기도 하는 등 한 때 잘 나가던 미디어/언론 사업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다수의 친일행위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인물이다
[3]
윤필용 사건에 엮여서, 박정희 대통령이 수재의연금 횡령을 빌미로 대한일보를 폐간시키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대법원에서 김연준 사장에게 무죄판결을 내렸고, 김연준 사장은 자진 폐간을 결정했다. 이에 김연준 박사는 멘붕과 빡침. 그런데 중동 건설경기로 많은 기술자가 빠져나가 오히려 국내 기술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양대가 반월 신공업 도시에 대학을 지어주기를 희망했지만, 김 총장은 “황금을 한 트럭 준다고 해도 박 대통령이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튕겼다. 밀당 처음 23만평을 학교부지로 책정되었던 것을 더 주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여 1979년 반월분교(現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40만평)가 설립되었다.
[4]
1968년까지
조선일보에서 운영하던 극장. 60년대 인근의 국제극장, 충무로의 명보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등과 방화(한국영화)전용관으로 유명했다.
[5]
60년대 국내 영화업계는 10대 개봉관 극장-전속 영화사-전속 감독/작가-전속 배우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국제극장-동아흥행-홍성기 감독-
김지미, 명보극장-신필름-
신상옥 감독-
신영균 등의 형태였다. 아카데미극장은 원래 외화상영관이었으나 방화전성시대가 도래하자 1962년 한양영화공사와 전속을 맺고 방화전용관으로 변모한다. 이후 극동흥업까지 추가되어 주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영화를 개봉했는데, 63년~68년 사이 아카데미 극장의 한국영화 개봉작 125편 중 70%에 달하는 88편의 작품이 신성일 주연작이라 일명 신성일 극장으로 불렸는데, 그 대다수가 한양영화사 또는 극동흥업의 김기덕 감독 작품이다.
[6]
신성일의 자서전 내용에 의하면 아예 한양대의 연영과 설립과 영화사 설립이 당시 아카데미 극장의 사장이던
방우영 조선일보 전 회장(62년 당시는 방우영의 형
방일영이 회장이고 방우영은 극장 사장) 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나온다. 나이차가 있기는 하지만, 김연준과 방우영은 같은 연희전문 출신이고, 같은 이북 출신이므로 친분이 두터웠을 가능성이 많기는 하다
[7]
김연준의 처이자 김종량의 모
[8]
1년 미만
[9]
한양학원 모든 학교들이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