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9 18:43:28

필립 바셋

성명 필립 바셋
Philip Basset
생몰년도 미상 ~ 1271년 10월 29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스 월드 바셋
아버지 앨런 바셋
어머니 앨리스 드 그레이
형제 토머스, 길버트, 앨리스, 워렌, 풀크, 데이비드
배우자 아비스 드 루뱅, 엘라 롱게스피
자녀 알리나, 마저리
직위 어퍼 위컴 남작, 대법원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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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왕당파의 편에 서서 시몽 드 몽포르에 대적했다.

2. 생애

바셋 가문은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까지 노르망디 공국에서 잉글랜드 왕국으로 이주했으며, 랄프 바셋과 그의 아들 리처드 바셋은 헨리 1세의 치세 동안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바셋 가문은 12세기에 여러 분파로 나뉘었는데, 필립은 헤딩턴과 월링포드의 방계 가문 출신이다. 선조인 토머스 바셋(? ~ 1180/1182)은 미들식스, 버크셔, 버킹엄셔 및 옥스퍼드셔에 걸쳐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중심지를 미들식스의 윌링포드 저택으로 삼았다. 또한 토머스는 1163년부터 1164년까지 옥스퍼드셔의 보안관을 맡았고, 나중에는 순회판사를 역임했다.

토머스의 막내 아들 앨런 바셋은 리처드 1세, 존 왕, 헨리 3세 3대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했다. 필리프 2세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하려는 존 왕의 뜻에 따라 불로뉴 플란데런 백국에 잇따라 찾아갔고, 제1차 남작 전쟁 때 존 왕을 충실히 따랐으며, 1217년 링컨 전투 윌리엄 마셜의 지휘하에 반란군을 궤멸시키는 데 일조했고,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리를 왕래하기도 했다. 이렇듯 왕실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그는 상당한 영지를 받았고, 이를 통합해 어퍼 위컴 남작을 칭했다. 앨런은 앨리스 드 그레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해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필립은 그중 막내였다.

필립의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형제 중 장남 토머스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고, 다음 서열인 길버트가 1232년 사망한 아버지 앨런의 영지를 계승했다. 또 다른 형제인 풀크는 1259년 성직자의 길을 택했고, 1241년 런던 주교가 되었다. 이후 길버트가 1241년 사망한 뒤 가족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또 다른 형제 데이비드는 왕실 시종이 되었다. 필립의 조카 풀크 바셋은 1271년 더블린 대주교를 맡았다. 하지만 필립의 형제 중 누가 더블린 대주교의 아버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230년 브르타뉴와 푸아투를 향한 헨리 3세의 원정에 참여했다. 1233~1234년, 필립은 여러 형제와 함께 리처드 마셜의 반란에 가담했다. 바셋 가문이 반란을 지지한 건 헨리 3세가 그들의 재산에 속한 저택을 외국인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34년 리처드 마셜이 사망하자, 그는 형제들과 함께 왕실에 귀순했다. 1240년 콘월의 리처드 휘하에서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이후 콘월의 리처드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다. 그는 1240년대 ~ 1250년대에 왕실에 복무하며 군사, 행정, ​​사법 업무에 참여했했다. 그는 왕실을 자주 방문했고, 많은 왕실 헌장에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종종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1251년 헨리 3세와 마찰을 벌인 형제 풀크를 지원했지만, 이 일로 필립의 왕실 봉사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1258년 헨리 3세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강요한 시몽 드 몽포르 등은 왕을 대신해 통치를 이끌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때 필립은 귀족들이 지명한 위원 12명 중 한 명이었다. 이와 동시에, 형제이자 런던 주교인 풀크도 헨리 3세 측 위원 12명 중 한 명이었다. 또한 필립은 과세를 재편성하기 위해 선택된 24인 중 한명이었다.

1259년 5월, 런던 주교 풀크 바셋이 사망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필립 바셋으로 하여금 풀크 바셋의 사망으로 공백이 생긴 위원을 맡도록 했다. 1259년 11월 헨리 3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평화 협상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나자, 대법원장 휴 비고드가 섭정을 맡았고, 필립을 비롯한 위원들이 휴 비고드를 보좌했다. 필립은 행정부의 일원으로서 매우 활동적이었으며, 헨리 3세도 프랑스에서 보낸 서신에서 필립을 중요한 인물로 평가했다. 1260년 4월 헨리 3세가 돌아온 후에도, 필립은 계속해서 왕국을 다스리는 행정관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15인 위원회에서 가장 저명한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귀족파에 속했지만, 갈수록 급진적으로 나오는 시몽 드 몽포르와 거리를 뒀고, 점차 헨리 3세 쪽으로 기울었다. 그 덕분에, 헨리 3세는 의회의 간섭으로부터 크게 자유로워졌다.

한편, 필립은 풀크 바셋 사후 어퍼 위컴의 영지 통제권을 물려받았다. 1260년 옥스퍼드와 브리스톨 성의 관리권을 맡았고, 1261년에는 코프 성과 셔본 성을 맡았다. 또한 1261년 서머싯, 도싯, 버크셔 및 옥스퍼드셔의 보안관을 역임했다. 1261년 4월 24일, 완전한 권력을 되찾은 헨리 3세는 필립 바셋을 새로운 대법원장에 선임했다. 그 해 7월 5일,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중재자로 임명했다. 이와 동시에, 필립의 사위인 휴 르 디스펜서는 계속해서 귀족 측 대법원장을 맡았다. 필립은 왕에게 충성하면서 많은 행정 및 사법 기능을 수행했다.

1262년 7월, 헨리 3세가 다시 프랑스로 여행하면서, 그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필립은 남겨진 의회의 수장을 맡았으며, 10월에는 의회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웨일스 변경지대에서 발발한 웨일스인들의 봉기로 인한 잉글랜드인들의 위기 의식 강화,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시몽 드 몽포르의 지지자 결집, 헨리 3세의 권한 제한으로 인해, 그는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정세를 수습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 해 12월에 헨리 3세가 귀환했을 때, 왕권은 크게 흔들렸다. 필립은 12월 24일 도버에서 헨리 3세와 만나 귀족파 인사들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필립은 1263년 7월 15일에서 18일 사이에 대법원장에서 해입되었고, 휴 르 디스펜서가 그를 대신했다. 필립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데비지스 성을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헨리 3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고, 1263년 12월 16일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 등 귀족파 인사들이 루이 9세의 중재를 받기로 한 협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루이 9세가 옥스퍼드 조례를 폐지하라고 권고한 것에 반발한 시몽 드 몽포르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2차 남작 전쟁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1264년 4월 1일, 런던에 있던 필립의 저택이 폭도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4월 5일, 필립은 기사단 40명을 이끌고 노샘프턴 공방전에 참여해 노샘프턴 공략에 기여했다. 5월 14일 왕실군의 일원으로서 루이스 전투에 참여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다. 반란군 지도자 중 한 명이자 그의 사위였던 휴 르 디스펜서가 그에게 항복하라고 간청했지만, 필립은 "살 수 있는 한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외치며 계속 저항했다. 그러다가 20개 이상의 상처를 입고 기력을 잃은 뒤에야 생포되었다. 그 후 그는 도버 성에 구금되었다가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 등을 척살한 뒤에야 풀려났다.

필립은 이브샴 전투에서 전사한 사위의 아들, 즉 자신의 외손자가 영지를 온전히 물려받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후계자들의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헨리 3세의 법령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총동원해 왕의 반군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양자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1266년 10월 31일에는 케닐워스 공방전을 치러가며 저항하는 케닐워스 성내 반란군을 회유하고자 작성된 케닐워스 칙령에 서명했다. 1267년 4월, 필립은 런던을 점거하고 왕에게 반기를 든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헨리 3세를 화해시켰다. 이후 서머싯과 도싯의 보안관과 데비지스 성의 순경으로 임명되었다. 이렇듯 왕과 반군 귀족들을 화해시키는 데 힘을 쏟으며 분열을 치유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여러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고귀하고 신중하며 충성스럽고, 온화하며, 잉글랜드를 매우 사랑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1271년 10월 29일, 그의 저택 중 하나인 노스 월드 바셋에서 사망했고, 윌트셔의 스텐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재산은 장녀 알리나 바셋과 외손자 휴 르 디스펜서에게 상속되었다.

3. 가족

  • 아비스 드 루뱅: 리틀 이스턴의 기사 매튜 드 루뱅의 딸.
    • 알리나 바셋(1242/1250 ~ 1281): 초대 디스펜서 남작 휴 르 디스펜서와 초혼,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와 재혼.
      • 휴 르 디스펜서(1261 ~ 1326): 제2대 디스펜서 남작, 초대 윈체스터 백작, 아일랜드 재판관. 에드워드 2세의 고문. 아들 휴 르 디스펜서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지만, 로저 모티머 프랑스의 이자벨의 정변으로 몰락하고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 마저리 바셋(? ~ 1271): 서리의 샤이어 영주이자 아일랜드 순회 판사 존 피츠존(? ~ 1275)의 부인.
  • 엘라 롱게스피(? ~ 1298):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의 딸, 제6대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보몽의 미망인. 필립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