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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드 클레어(제7대 글로스터 백작)

파일:길버트 드 클레어(제7대 글로스터 백작).jpg
성명 길버트 드 클레어
Gilbert de Clare
생몰년도 1243년 9월 2일 ~ 1295년 12월 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크라이스트처치
사망지 웨일스 몬머스셔 몬머스 성
아버지 리처드 드 클레어
어머니 모드 드 레이시
형제 이사벨라, 토머스, 보고, 마거릿, 로헤사, 에글란티나
아내 앨리스 드 뤼지냥, 아크레의 조앤
자녀 이사벨라, 조앤, 길버트, 엘리노어, 마거릿, 엘리자베스
직위 제8대 하트퍼드 백작, 제9대 클레어 남작, 제7대 글로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2.2. 시몽 드 몽포르의 동지2.3. 에드워드 왕자와 손을 잡다2.4. 1267년 반란2.5. 웨일스 정복 전쟁2.6. 에드워드 1세와의 관계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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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 초기 의회 귀족파에 가담해 루이스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와 갈등을 벌인 뒤 에드워드 왕자 편으로 돌아섰다. 이후 에드워드 1세의 측근으로서 웨일스 정복에 기여했지만, 때때로 왕실에 불복종해 크고 작은 마찰을 벌였다. 머리가 붉었기 때문에 "붉은 자(The Red)"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클레어 가문은 중세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은 본래 노르망디 공국에 토지를 소유했으며,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걸 도운 뒤 광범위한 영지를 얻었다. 1135년부터 헤리퍼드 백작 칭호를 받았으며, 길버트의 중조부인 제4대 하트퍼드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는 제2대 글로스터 백작 윌리엄 피츠로버트[1]의 딸 아미시아와 결혼한 뒤 글로스터 백작 칭호도 확보했으며, 잉글랜드 남서부의 광대한 영지, 중부 지방에 있는 버킹엄 백작 영지의 절반을 받았다.

조부 길버트 드 클레어는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 이사벨라 마셜과 결혼해 웨일스와 아일랜드 등지의 토지를 받았으며, 아버지 리처드 드 클레어는 더싯과 헌팅던셔에서 토지를 인수했다. 이렇듯 클레어 가문은 대대로 결혼을 통해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특히 웨일스 변경 지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 되었으며, 연간 수입은 4천 파운드에 달해, 임금 다음으로 가장 부유한 영주가 되었다.

길버트는 1243년 9월 2일 햄프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제5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와 초대 링컨 백작 존 드 레이시의 딸 모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253년 초, 그는 앙굴렘 백작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딸인 앨리스 드 뤼지냥과 파리에서 결혼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신랑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기려서 조직된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고작 9살이었던 그가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1262년 7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길버트는 가문의 모든 재산과 직함을 물려받았다. 당시 18살이었던 그는 자신이 21세가 되는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국왕 헨리 3세가 즉시 자신을 성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영지의 주인으로 인정해 주기를 희망했다. 그는 헨리 3세가 있던 불로뉴로 갔지만, 헨리 3세는 다소 거친 어투로 거부했다. 당시 왕실은 클레어 가문의 광대한 영지에 대한 후견권을 가짐으로써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기에, 헨리 3세로서는 그의 요청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헨리 3세는 전임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가 생전에 왕실의 특정 권리를 강탈했는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했으며, 웨일스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2개 성과 클레어 가문의 본가인 클레어 성 등을 길버트의 어머니 모드에게 "미망인의 몫"으로 부여했다. 길버트는 이를 굴욕이라 여기고, 헨리 3세에게 깊은 불만을 품었다.

2.2. 시몽 드 몽포르의 동지

1363년 3월 22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한 길버트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걸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플랜태저넷 왕조를 순순히 따를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같은 해 5월 20일 옥스퍼드 의회에서 시몽 드 몽포르를 지지해 시몽의 정적인 헤리퍼드 주교를 규탄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가 푸아투 출신 간신들에게 휘둘려서 국정을 잘못 이끌었으니,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선언하고 런던을 향해 진군하자 즉시 가담했으며, 유대인 대출자에게 진 빚 기록을 고의로 파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1263년 7월 15일, 길버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함께 런던에 입성했다.

1264년 봄, 에드워드 왕자는 길버트에게 맞서고자 군대를 일으켜 길버트의 두 성인 킹스턴과 톤브리지를 점령했다. 당시 톤브리지에 있던 길버트의 아내 앨리스는 에드워드의 사촌이었기에 석방되었다. 그해 5월 12일, 길버트 드 클레어는 반역자로 선언되었다. 이에 그는 시몽 드 몽포르와 함께 로체스터를 포위 공격해 수일간 공방전을 치렀지만, 왕실군이 로체스터로 접근하자 철수했다. 그 후 길버트와 시몽은 런던 주교와 우스터 주교의 중재를 통해 헨리 3세와 화해하려고 시도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목표는 사악한 조언자들로부터 왕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가 아버지를 대신해 냉정하게 답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을 감고 우리 손에 넘겨져 우리 재량에 따라 걸거나 끌 수 있을 때까지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고, 양자는 12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를 치렀다. 그는 의회 귀족군 중앙 부대를 지휘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고, 전투가 끝난 뒤 풍차에 숨었던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를 생포했다. 그 후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는 항복했고, 시몽과 길버트가 제시한 합의안에 서명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 3세는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사면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복원해야 했다. 1264년 6월 23일, 런던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귀족과 성직자뿐만 아니라 각 주의 기사 4명과 전국의 모든 공동체 대표단도 참석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왕과 국민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향후 의회에서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고, 9명으로 구성된 감독기관을 구축하여 왕을 대신해 법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오직 의회 만이 이들 위원회 인사를 변경할 수 있었다. 위원회에는 시몽 드 몽포르 본인 외에도 체스터 주교 스티븐 버스티드 주교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선임되었다.

이 무렵, 웨일스 변경 지대의 영주 로저 모티머와 로저 클리퍼드는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길버트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길버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글로스터, 브리지노스, 말버러를 상실했고, 1264년 3월 헤일리 성에서 포위되었다. 그해 12월, 시몽 드 몽포르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고, 길버트는 그와 함께 적군을 몰아붙인 끝에 글로스터를 탈환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시몽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시몽은 웨일스 국경지대를 안정시키기 위해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와 동맹을 맺었다.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1258년부터 잉글랜드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켜 클레어 가문의 웨일스 영지 상당수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길버트는 시몽이 허웰린과 손잡은 것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시몽에 의해 축출된 로저 모티머와 로저 클리퍼드를 자기 영지에서 은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265년 1월 14일, 런던에서 새 의회가 소집되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길버트가 반역자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길버트는 시몽이 루이스 전투에서 포획한 모든 전리품을 빼돌렸으며, 왕국의 주요한 성들에 외국 출신 수비대를 배치해 나라를 좌지우지하려 든다고 맞받아쳤다. 두 사람은 주변 의원들의 중재로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길버트는 시몽과 한배를 함께 탈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상대로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다.

2.3. 에드워드 왕자와 손을 잡다

1265년 2월 17일에서 24일 사이에 웨일스 변경 지대로 이동한 길버트는 공개적으로 로저 모티머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다. 그해 4월 말, 시몽 드 몽포르는 군대를 이끌고 길버트를 공격하면서,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길버트는 초대 기퍼드 남작 존 기퍼드를 회유해 글로스터에서 헤리퍼드로 가는 도중에 헨리 3세를 구출하도록 했지만 실패했다. 1265년 5월 28일, 케닐워스 성에 억류되었던 에드워드 왕자가 말을 훈련 시겠다는 핑계를 대고 헤리퍼드로 갔다가 도중에 말을 급히 몰아서 호위병의 추격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위그모어 성으로 가서 그곳의 성주인 로저 모티머의 영접을 받은 뒤, 러들로 성에서 길버트와 합세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좋은 옛 법"을 준수하고 외국인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맹세했고, 길버트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265년 6월 8일, 옥스퍼드 의회는 시몽 드 몽포르의 요구에 따라 길버트와 에드워드 왕자를 반역자로 낙인찍었다. 그 후 시몽 드 몽포르는 군대를 이끌고 뉴포트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브리스톨에서 파견한 함대를 타고 세번강 어귀를 건너서 에드워드 왕자와 대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배들은 글로스터에서 파견된 왕실 함대에 의해 침몰했다. 여기에 더해, 길버트는 체스터, 슈루즈버리 및 브리지노스를 점령하고 세번강을 건너는 모든 다리를 파괴했다. 그 결과,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는 잉글랜드의 주요 지역에서 단절되어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이에 시몽 드 몽포르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헤리퍼드로 진군해 1265년 7월 말에 도착했다.

이 무렵, 시몽 드 몽포르의 차남 시몽도 잉글랜드 남부와 중부 전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뒤 워릭 인근의 케닐워스 성으로 진군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이 소식을 접하자, 길버트와 함께 우스터에 군대를 집결한 뒤 1265년 8월 1일 이른 아침 케닐워스로 진군했다. 시몽의 군대는 곧 에드워드 왕자를 따르는 부하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유력 귀족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왕실군은 주요 반군 지도자들의 군기를 확보했고, 이제 막 케닐워스에 도착했던 반군의 물자 운송용 수레들을 탈취했다. 시몽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케닐워스 성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에드워드 왕자와 길버트의 군대가 케닐워스에서 성공을 거둔 후 우스터로 돌아올 때, 시몽 드 몽포르는 세번강 건널목을 지키는 적 경비병이 더 이상 없다는 걸 눈치채고 우스터에서 남쪽으로 4마일 떨어진 켐프 시 교두보를 건넌 뒤 케닐워스에서 아들이 모은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1265년 8월 3일 이브샴으로 진군했다. 같은 날 저녁, 에드워드 왕자는 우스터에 도착했다가 시몽 드 몽포르가 이브샴으로 향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출진해 밤새도록 행군한 끝에 이브샴에서 케닐워스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는 이브샴을 향해 에이번강을 따라 곧장 진군했고, 길버트 드 클레어는 분견대를 이끌고 에이번강을 건넌 뒤 에드워드 왕자와 평행하게 진군했다. 그리고 로저 모티머는 에이번강 동쪽 기슭을 따라 내려가서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 후방으로 은밀히 진군했다. 이후 벌어진 이브샴 전투에서, 길버트는 반란군의 측면을 요격해 아군의 대승에 기여했다.

2.4. 1267년 반란

이브샴 전투가 왕당파의 대승으로 끝나고 시몽 드 몽포르가 패사한 뒤, 왕실군은 런던에 입성했다. 한 달 후인 1265년 9월 8일, 윈체스터에 소집된 의회는 반란에 가담한 영주들의 재산과 작위를 모조리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일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길버트는 로저 모티머와 함께 영지를 빼앗으려는 탐욕 때문에 이 가혹한 결정을 주도했고, 자비를 베풀려는 왕에게 강한 압력을 행사했으며, 크리스마스에 군주 앞에 나타나 자비를 구한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를 용서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를 볼 때, 이 기록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

1266년 가을, 길버트는 왕실군이 케닐워스 성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상대로 케닐워스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항복 조건을 결정하는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반군 영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그가 정력적으로 반군 영주들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자, 로저 모티머는 격분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길버트는 이러다가 살해당할 것을 우려해 영지로 떠났다. 12월에 케닐워스에 고립된 반군의 항복을 받아낸 헨리 3세는 모든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영주들을 옥스퍼드로 소환했다. 그러나 길버트는 모티머 가문에 대한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으느라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다.

1267년 1월 20일, 길버트는 외국 고문을 추방하고, 옥스퍼드 조례를 이행하며, 반군 영주들에게서 몰수한 땅을 돌려주라는 요구서를 헨리 3세에게 발송했다. 아무런 응답도 없자, 길버트는 4월에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점거했고, 정부에 불만을 품던 귀족들이 대거 합류했다. 헨리 3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지만, 길버트의 위세가 강한 데다 왕실군의 사기가 떨어졌던 터라 감히 전투를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6월 16일 콘월의 리처드의 중재로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길버트는 군대를 철수했고, 반군 귀족들은 사면되었으며,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2.5. 웨일스 정복 전쟁

제2차 남작 전쟁이 종식된 뒤, 길버트는 웨일스 영지를 되찾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1268년 4월 11일, 그는 현지 웨일스 통치자가 소유했던 땅에 케어필리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1270년에 케어필리 성을 급습해 불태웠지만, 길버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요새를 재건했다. 허웰린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군대를 소집했지만, 헨리 3세가 양자의 화해를 촉구하자 마지못해 잉글랜드 궁정에 길버트와의 분쟁에 대해 판결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재판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허웰린은 결국 케어필리 성이 세워지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1276년, 길버트는 에드워드 1세의 허웰린을 상대로 한 원정에 참여해 허웰린을 사로잡고 웨일스를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282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최종적으로 평정하기 위해 원정을 단행했을 때,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발랑스,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을 휘하에 둔 채 분견대를 이끌고 남부 웨일스를 석권했다. 1283년, 길버트는 웨일스 반란군 지도자 다비드 압 그루퍼드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슈루즈버리로 소환되었다. 다비드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완전히 복속되었지만, 길버트는 이 과정에서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별다른 영지를 추가로 받지 못했다.

1287년, 길버트는 잉글랜드에 맞서 봉기한 드리슬로인 영주 리스 압 마레디드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294년에는 마독 압 허웰린이 이끄는 새로운 반란이 발발했고, 글래모건에서도 모건 압 마레디드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모를레 성을 점령하고 케어필리 성 외곽을 약탈했다. 그들은 나중에 항복했지만, 길버트가 아닌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하겠다고 선언했다.

2.6. 에드워드 1세와의 관계

길버트와 에드워드 1세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1268년 6월 24일, 두 사람은 노샘프턴에서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길버트는 자신이 아닌 에드워드가 지휘관으로 정해지자 분노해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에드워드와 갈등을 벌였다. 1269년 말, 길버트는 에드워드가 자신을 체포하고 투옥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하며 의회에 출석하길 거부했다. 콘월의 리처드가 중재에 나섰고, 길버트는 1270년 7월 17일 벌금을 내고 십자군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에드워드의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고, 벌금도 납부하지 않았다.

1272년 11월 16일 헨리 3세가 사망했을 때, 길버트는 런던에 남았다. 그는 죽어가는 왕 앞에서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서약하겠다고 맹세했고, 1274년 잉글랜드에 돌아온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길버트는 에드워드 1세의 측근이 되었고, 그의 원정에 동행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길버트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왕실에 종종 반항하는 점 때문에 언제나 경계했다. 1283년, 에드워드 1세는 길버트를 회유하기 위해 그와 자기 딸 조앤을 약혼시켰다. 결혼식은 1290년 4월에 이뤄졌다. 결혼 계약에 따르면, 길버트가 첫 번째 아내 앨리스 드 뤼지냥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이사벨라와 조앤은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클레어 가문의 영지는 그와 조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가 없다면, 조앤이 나중에 재혼한 뒤 낳은 자녀가 물려받기로 했다.

1289년, 길버트는 제3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심한 불화를 벌인 끝에 무력 충돌을 벌였다. 길버트의 부하들은 보훈 가문의 영지인 웨일스의 브렉녹을 습격해 소 수천 마리를 훔치고 여러 사람을 죽였다. 보훈 가문은 왕실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에드워드 1세의 사위가 된 길버트는 에드워드 1세가 자기를 비호할 거라고 믿고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1291년 가을, 에드워드 1세가 에버게브니에서 재판을 직접 이끌기로 하자, 길버트는 이번엔 재판에 출석했다. 그 후 길버트와 험프리는 투옥과 토지 일부를 몰수하는 선고를 받았다. 나중에 그들은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사건을 이용해 웨일스 변경 지대의 귀족들이 누리던 사법적 자율성을 약화했다.

1291년, 길버트는 노햄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왕관에 대한 여러 귀족의 청원에 관한 심의에 참여했다. 1295년 12월 7일 몬머스 성에서 사망했고, 튜크스버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앨리스 드 뤼지냥(1236 ~ 1290년 이후): 앙굴렘 백작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딸. 1271년 7월 17일 노리치에서 이혼했다. 길버트는 두번째 결혼을 시작하기 전에 교황청으로부터 앨리스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한다는 교령을 받았다.
    • 이사벨라(1262 ~ 1333): 제10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와 결혼했지만 얼마 안가 결혼 무효 처리되었고, 제2대 버클리 남작 모리스 드 버클리와 재혼했다.
    • 조앤(1264 ~ 1302년 이후): 제7대 파이프 백작 던컨 맥더프와 초혼, 제르바스 아베넬과 재혼.
  • 아크레의 조앤(1272 ~ 1307):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카스티야의 레오노르[2]의 딸. 길버트 사후인 1297년 1월, 에드워드 1세의 시종인 랄프 드 몬테르머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에드워드 1세가 조앤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와 재혼시키려 했을 때, 그녀는 자기가 이미 랄프 드 몬테르머와 결혼했다고 고백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1세는 몬테르머를 브리스톨 성에 투옥했다. 이에 조앤은
    "위대한 백작이 가난하고 천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백작부인이 용감한 청년을 사모하고 존경하도록 장려하는 것 역시 비난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너무 어려운 일도 아니다"

    • 라고 주장했다. 그 후 딸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에드워드 1세는 결국 몬테르머를 1297년 8월에 석방하기로 했고, 몬테르머는 왕에게 경의를 표한 뒤 글로스터 백작과 하트퍼드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조앤이 사망한 후, 몬테르머는 조앤이 길버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길버트에게 작위와 영지를 넘겨줬지만, 1309년 에드워드 2세에 의해 초대 몬테르머 남작으로 선임되었다.
    • 길버트(1291 ~ 1314): 제9대 하트퍼드 백작, 제10대 클레어 남작, 제8대 글로스터 백작.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했다.
    • 엘리노어(1292 ~ 1337):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디스펜서 주니어와 초혼, 윌리엄 라 주쉬 모티머와 재혼.
    • 마거릿(1293 ~ 1342):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가버스틴과 초혼, 글로스터 백작 휴 드 오들리와 재혼.
    • 엘리제바스(1295 ~ 1360): 존 드 버그[3]와 초혼, 베르덩의 테오발드와 재혼, 아일랜드의 다모리 남작 로저 다모리와 삼혼.



[1] 초대 글로스터 백작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아들이다. [2]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왕 페르난도 3세의 딸. [3]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