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2:14:39

피델 카스트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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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학창 시절2.2. 혁명가로서의 활동2.3. 쿠바 혁명 이후

1. 개요

쿠바의 정치인 피델 카스트로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생애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GYH2016112600050004400_P2.jpg

2.1. 학창 시절

1926년 스페인 갈리시아[1]에서 이민 온 한 지주의 아들로, 비론이라 하는 쿠바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주라는 배경답게 중산층 이상은 되는 집안이었고 고등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인 앙헬 카스트로가 정식으로 결혼했던 마리아가 아닌 가정부였던 리나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기 때문에 어릴때는 아버지랑 같은 집에서 지내지 못하고 몇 미터 떨어진 건물에서 농장 노동자들과 같이 지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공부보다는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나 야구에 열광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하바나 법대에 들어가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처음으로 학생 운동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유주의와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다. 공부는 딱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토론하는 것과 웅변의 대가라서 순식간에 학생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2.2. 혁명가로서의 활동

1953년에 쿠바의 군사 독재 정권이자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바티스타 정권을 습격하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이름을 알린 혁명가다. 비록 습격 작전은 실패했지만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á)"[2]라며 당당하게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해 공산주의 혁명가로 이름을 드높였다. 2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가 특별사면을 행하자 멕시코로 망명해 유명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인 체 게바라 같은 중남미 해방운동 세력을 흡수하여 쿠바에 재상륙하여 많은 고난을 극복했다. 결국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한 1959년에 내각 책임제의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2.3. 쿠바 혁명 이후

사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로도 카스트로는 열혈 공산주의자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펴러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의외로 상당수 우파인사들도 혁명에 동참한 덕택에 자리를 얻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도 초반에는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카스트로가 혁명 성공 4달 후 뉴욕에 방문해 시민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았을 정도. 하지만 토지개혁과 미국 기업들에 대한 대규모 국유화 조치로 인해서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틀어지기 시작했고[3], 거기에 더해서 체 게바라 등 사회주의자들을 주요 요직에 등용하기 시작하자,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쿠바를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카스트로는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미국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이후 독재자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1961년, 혁명이 남미 전부로 번질 것을 우려한 미국이 남미와 쿠바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자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 공산주의로 선회했다. 그 후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여러 냉전 사태의 최전방에 있었다. 게다가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카스트로는 헌법을 초월하는 권력을 행사하여 쿠바의 정치경제와 사회문화를 좌지우지했다. 소련과 동독을 본받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1976년부터 동생 라울 카스트로 위원장이 선출된 2008년까지 국가이사회 위원장 겸 내각수상(Presidente del Consejo de Estado y de Ministros)을 재임했다. 이 직위는 기존의 수상(Primer ministro)과 대통령(Presidente)의 권한을 합친 지위나 마찬가지였다.[4]

1960년대 초반에 체 게바라에게 공업화 정책을 맡겼다가, 생산성이 떨어지고 경제성장률은 2%대에 그치는 참담한 실패를 겪은 이후로[5] 1960년대 후반 이후로 경제정책을 변경했는데, 이건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서 1970년대와 80년대 전반기에는 나름대로 성장률이 괜찮았고 소득재분배로 빈부격차가 크게 줄어나갔기 때문에 여러모로 중남미에서 선진적인 국가로 손꼽혔었다.[6]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쿠바의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의 연쇄적인 붕괴와 함께 미국의 경제 제재 강화까지 겹치면서 실질임금이 중남미에서 나름대로 높은 수준에서 그야말로 쥐꼬리만한 수준으로 삭감되고, 상점에 물건이 제때 공급되지 않고,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식량마저 부족해 인민들은 하루 두끼를 겨우 먹는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카스트로의 입지도 크게 악화되었다. 그래서 카스트로에게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조차도 피델 정권이 소련처럼 붕괴하는 것이 아니냐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을 정도였지만, 카스트로는 경제개혁 조치에 대해서 썩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위낙에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관광업과 자영업을 활성화하고, 부분적인 개혁개방정책도 단행하여 지하에 떠돌아다녔던 외화자금을 양성화하는 한편, 도시농업 장려 및 유기농 재배농법의 활성화로 식량위기를 넘겼고, 또한 최소한의 사회복지는 반드시 유지하면서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7] 식량난 및 경제난으로 촉발된 시위도 강경진압하라는 공산당 지도부를 무른 채, 목숨걸고 시위대 앞에 나타나 사과하는 쇼맨쉽을 통해 무마했다. 또한 반정부 세력도 미국으로 알아서 가게끔 놔두는 방식으로 알아서 성장을 막게 했으며, 이러한 부분적인 경제개방정책이 실효를 거두고 2000년대 들어서 쿠바의 우방국이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하나둘씩 늘어나자 당초 예상과 다르게 쿠바는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봉급 수준이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도 예상과 다르게 경제는 1993년 이후로 지속적인 성장세를 기록했고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둔 뒤에 2008년에 동생 라울에게 국가이사회 위원장직을 넘겨주고 2011년에 실권직인 쿠바 공산당 제1비서직까지 넘겨준 뒤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어쨌든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정책을 꽤 괜찮게 성장시킨 경력도 있고, 집권 말기인 1993년부터 2008년도까지의 경제성장률도 중간에 굴곡이 있었다고 해도 따지고보면 괜찮은 수준이지만 1990년부터 1993년까지의 특별기간때 까먹은 임금수준이 경제회복기에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도 젊은 층이나 소비성향이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농반진반으로 피델이 원망의 대상으로 까이기도 한다. 장기집권한 탓에 은퇴 후 여생은 고작 5년이였다.

2010년 9월에 그는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기자가 "쿠바의 경제 모델을 다른 나라한테 퍼뜨리고 싶나?"라고 질문하자 그는 "우리 나라에서도 실패했는데."라고 했는데, 이것만 보고 공산주의의 실패를 인정했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이 한 문장만을 두고 보면 피델이 공산주의의 성공을 회의적으로 생각한다고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본문 내에서는 이 말이 쿠바 혁명과 공산주의의 총체적 실패를 인정한다기보다는 당내 정통 공산주의자들과 관료들의 반발로부터 라울이 개혁을 행할 공간을 주기 위한 발언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나는 사회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이며 레닌주의입니다. 나는 그런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고,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여튼 "The Cuban model doesn't even work for us anymore.(그 쿠바의 모델은 더 이상 우리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담긴 전문은 여기에서. 기사 그런데 CNN의 보도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말하길, 자신이 쿠바에서 공산주의 모델이 실패했다고 한 것은 기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2016년 11월 25일 22시 29분, 라울이 쿠바 국영방송을 통해 피델이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발표했는데 장소와 사인은 발표하지 않았다. 이에 피델의 부고를 푸시로 띄운 뉴욕 타임스의 문구가 인상적인데 쿠바 혁명을 일으킨 그는 '미국 대통령 11명의 숙적'이었다고 표현하였다. 링크
파일:external/animalnewyork.com/ss02.jpg
피델 카스트로의 시신

카스트로의 죽음이 알려지자 마이애미 쿠바계 미국인들은 거리로 나와서 환호하며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쿠바 내에서는 피델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는 사람들과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공존하는 편인데 쿠바 내에서도 피델에 대해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사회복지 정책과 같은 것은 높게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1990년대 초반에 사회보장을 별 수 없이 축소해야 한 면이 있는데다가 동생인 라울의 집권 이후로는 복지가 축소되고 물가가 상승추이에 있고 월급 수준이 몹시 짜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암살 시도 위협을 600번 넘게 받는 위험한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 지도자의 자리에서 오는 과로와 압박감, 담배보다 더 독하다는 시가를 수십년 흡연 등 몸에 나쁜 것을 수두룩하게 한 사람답게 어떻게 보면 단명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오히려 90세의 나이로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수를 누리고 간 셈이다.

카스트로가 사망하기 전, 지미 카터를 만난 적이 있단 점 때문에 이 일을 카터와 엮어서 설명하기도 했다. 카터에겐 리퍼 드립이 나왔다. 카스트로의 죽음이 쿠바 정치 및 외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선 해석이 조금 엇갈린다. 이미 2008년에 은퇴했지만 카스트로는 그 존재만으로도 쿠바 정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계기로 쿠바의 개혁-개방이 더욱 확실해질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반면 피델의 정계 은퇴 이후로는 이미 쿠바는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해왔고 라울도 2018년의 은퇴를 공식 예고할 정도로 카스트로 형제의 은퇴 및 차세대로의 정권 이양은 공식화된 지 오래이므로, 의외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쿠바와 오랜 동안 우방 관계였던 북한은 28~29일 조기 게양을 하며, 3일 동안 애도기간을 가졌다. # 김정은은 쿠바 대사관을 방문해 직접 조의를 표했으며 북한 언론 역시 카스트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과의 우호를 다시 꺼내며 대규모 추모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 또한 최룡해를 단장으로 한 대규모 조문단을 쿠바에 파견하였다. # 한국도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명의로 서거라는 표현을 쓰며, 애도를 표했으며 공식 조전을 보냈지만 조문단은 파견하지 않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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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의 바위에 피델의 유골함을 안장하는 동생 라울

마지막으로 카스트로는 자신을 기리는 동상이나 기념비조차 세우지 말며 개인 우상화를 금지하라 유언을 남겼다. # 죽어서는 조용히 묻히고 싶어한 유언과는 달리 블라디미르 레닌, 호찌민, 마오쩌둥, 김일성 등 다수의 공산권 국가의 국가 원수들이 정치적 우상화를 위해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신이 보존 처리되어 묘에 안치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그의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덕분인지 쿠바는 다른 공산권과 달리 그의 생전에도 딱히 그를 우상화하는 분위기는 지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그 대신 상징적인 인기가 많았던 것이 체 게바라였다. 물론 게바라의 경우에는 워낙 드라마틱한 인생과 굉장히 잘생긴 외모 덕분에 서방 세계에서도 상품화가 이루어질 수준이고, 무엇보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 상징화가 이뤄져도 정치적 힘이 강해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카스트로에 대한 조명은 적당히 한 반면 이미 죽어 무해한 체를 오히려 다른 공산권에서 할법한 우상화의 대상으로 삼은건 피델 정권의 다분히 의식적이고 계산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국가평의회에서는 그의 유언을 존중해서 우상화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 카스트로의 시신은 화장 후 그의 고향이자 쿠바 혁명의 성공을 선언한 지역인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곳에는 쿠바의 문학가이며 평생 피델이 존경했던 인물인 호세 마르티의 묘도 있다.
[1] 역설적으로 카스트로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갈리시아 출신이다. [2] 영어로 번역하면 "History will absolve me." [3] 사실 당시 미국이 국유화라고 하면 이유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경기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현재에도 부분적으로 그렇다. [4] 쿠바 혁명 후 대통령직이 바로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토라도를 거쳐 1976년 그 권한이 국가이사회 위원장으로 넘어간 것이다. 역대 쿠바 대통령에 대해서는 스페인어 위키백과 참조. [5] 1960년대 쿠바의 경제성장률은 연 2.8%로 라틴아메리카 평균 경제성장률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6] 다만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이 시절에도 미국에는 훨씬 못 미쳐서 이때도 미국에 갈 사람은 미국에 가기는 했다. 이 당시가 쿠바의 봉급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시절이라고 하지만 쿠바에서 1년간 벌 돈을 미국에서 2~3달안에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미국에서 쿠바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쿠바에서 미국으로 가면 바로 미국 시민권을 딸 수 있었다. [7] 특히 1991년 유치원 취학률이 26%에 불과했지만 1998년도에 98%까지 올랐을 정도였다. [8] 애시당초 한국 정부는 쿠바와 미수교 관계던 데다 외국 정상이 사망하면 조의를 표하는 건 의례적 관례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카스트로의 사망소식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