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프로레슬링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2. 장영철과 김일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1960년대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역사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61년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라는 단체가 체육 협회에 가맹되었고 장영철이 한국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한편, 대한민국보다 프로레슬링 문화가 더 활성화된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일이 1965년 8월 귀국하게 된다.그런데 이때부터 장영철과 김일 사이에 묘한 불화가 시작된다. 김일이 귀국한 다음 날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 임원 중 한 명이 선수를 모아놓고 "김일 선수는 역도산에게 레슬링을 배웠고, 미국에서도 챔피언이 된 대 스타이니, 앞으로 여러분들은 김일을 스승과 같이 모시고 본격적인 프로레슬링을 배우라"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 헤비급 챔피언 장영철의 입장에는 굉장히 불편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후 장영철은 기존 선수들에게 자신의 편을 들라고 강요했고, 김일은 김일대로 나와 함께 하면 일본에서도 일할 수 있다며 선수들을 포섭하면서 자연스럽게 국내파 vs 해외파로 파벌이 나뉘게 된다.
이후 같은 달 8월, 극동 헤비급 챔피언 토너먼트 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장영철은 굉장히 많은 굴욕을 겪게 된다. 해당 대회 전까지 장영철은 무패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 대회에서 그 기록이 끊기게 되었다. 게다가 대회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당시 국내 탑 프로레슬러였던 천규덕, 박송남마저 김일의 링사이드에 서서 장영철이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대회 토너먼트에서는 김일이 초대 챔피언에 오르면서 국내 프로레슬링의 1인자는 장영철이 아니라 김일로 바뀌게 된다.
매우 심기가 불편해진 장영철은 보복의 일환으로 자신의 부하를 시켜 박송남을 납치해 경기도 근처 문산 지역에 감금시키는 행위를 한다. 납치당한 박송남은 탈수 증상을 보였으나 UN군 병사에 의해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장영철은 박송남을 찾아가서 사과는 없이 언제든 김일을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3. 시멘트 매치 발생
한편 극동 헤비급 챔피언 토너먼트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대한 프로레슬링 협회에서는 김일에게 타국의 선수들도 참가하는 대회를 고안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은 스케줄이 비어있는 해외 프로레슬러들을 불러 모아 같은 해 11월 26일 장충체육관에서 5개국 대항 프로레슬링 선수권이라는 대회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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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영철(1928-2006) |
돌발 상황의 시작은 오오쿠마 모토시 선수였다. 오오쿠마가 장영철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다가 코너에 몰아붙여 보스턴 크랩을 시도했는데, 원래 각본상으로는 장영철이 이 공격을 풀어내고 승리를 거둬야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오오쿠마가 각본을 무시하고 보스턴 크랩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장영철은 링 세컨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세컨드는 링에 올라가 오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려치며 실제로 폭행을 가한다. 장내가 혼란스러워진 와중 장영철은 마이크를 잡더니 김일을 겨냥한 듯 한판 붙자고 외치면서 관중들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 끝에 경기는 중단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날 전국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오오쿠마 선수는 코가 꺾이는 중상을 입은 끝에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이 시기의 국내 프로레슬링은 각본의 이해도와 완성도 자체가 엉성했으며 업계 내부의 체계도 확실하게 잡혀있지 않았다. 지금과는 달리 다른 단체간 선수들과도 활발하게 경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각 단체간의 각본이 서로 얽히고 충돌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상대 선수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일부러 훨씬 과격하게 경기를 하는 선수인 "폴리스맨" 개념도 있었고, 더러는 각본을 무시하고 상대를 진짜로 폭행하는 시멘트 매치도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경기의 양상을 따져봤을 때 오오쿠마 모토시 선수가 사실은 김일의 사주를 받은 폴리스맨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4. "프로레슬링은 쇼다!" 발언
그런데 장영철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장영철은 오오쿠마가 먼저 돌발 행동을 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김일이 있다고 진술했다.[1] 그런데 프로레슬링에 대한 개념과 이해도가 전혀 없던 경찰이 "그럼 프로레슬링이 다 짜고 하는 거냐?"라고 물었고, 장영철은 경찰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프로레슬링의 내부 사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언론에 흘러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업계 내부 사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언론이 이 사건을 자극적인 흥미 위주로 포장,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괜히 프로레슬링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게 된 것이다.
자극적인 보도가 쏟아지자 프로레슬링을 격투기의 일종으로 알고 있던 일반인들은 프로레슬링을 아무렇지 않게 승부조작을 하는 사기 종목이라고 받아들였고 더 나아가 프로레슬링 실전성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에 장영철은 천규덕과 1967년 9월 1:1 실전 대결을 가졌지만 둘 다 차마 상대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화석처럼 노려만 보고 있다가 끝났다고 표현했다.
이때 장영철의 도전을 받은 김일은 장영철을 2분만에 쓰러뜨릴 수 있다면서 장영철의 문제 발언에 대해선 "프로레슬링은 사전에 승부를 조작할 수 없다. 실력에 의해서만 승패가 결정된다"라며 케이페이브를 지키며 일축했다. #
사건 이후, 장영철을 비롯한 소위 국내파 1세대 프로레슬러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지만,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김일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1970년대 김일의 후계자 세대인 이왕표의 등장으로 프로레슬링은 인기 스포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또한 김일과 동문인 안토니오 이노키가 내한해 경기를 갖는 등 프로레슬링의 인기도는 어느 정도 선을 유지했다. 물론 이때의 여파로 한일간 프로레슬링 교류가 위축되긴 했지만 그렇게 영향이 크진 않았다.
5. 오해
소위 "프로레슬링은 쇼다!" 저 발언 하나 때문에 한국 프로레슬링이 망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해당 사건이 일어난 이후 197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이 몰락하게 된 건 전두환 정부의 영향과 더불어 대한민국 프로레슬링계가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박정희 정부 당시에는 박정희 본인이 프로레슬링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김일을 청와대로 초청해 고기를 먹였을 정도로 프로레슬링을 직접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이후 집권한 전두환은 씨름과 축구, 복싱을[2][3] 더 좋아했다. 그리고 3S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 등 여러 프로 스포츠 리그가 출범하면서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식게 된다.
그리고 국내 프로레슬링은 이때부터 조금씩 감을 잃어 트렌드의 흐름을 좀처럼 따라가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국내 프로레슬링의 주요 스토리라인이었던 한-일 대결을 무려 10년 이상이나 반복하면서 관중들도 점차 이를 식상하게 여겼고, 일본 측에서도 자국 내 흥행, 미국 프로레슬링과의 연계를 우선시하면서 한국 측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끊게 되었다. 이후로도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은 제대로 된 자정 작용도 없었고 새로운 흥행 요소나 스타도 발굴하지 못하면서 초라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6. 프로레슬링은 쇼인가?
굉장히 논쟁이 됐던 주제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프로레슬링은 쇼가 맞다. 이 명제가 논란이 됐던 이유는 사건 당시 언론이 전후 관계(장영철과 김일의 실제 갈등)를 모두 제하고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해 진행된다는 사실만 과장해서 보도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논란이 된 것이다.사실대로 따져보면, 사건 당시 1960년대 한국에서도 프로레슬링이 진짜 싸움이 아니라는 건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1965년 신문에서도 목숨이 걸린 대결보단 내용이 충실한 것이 관객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기사, 하나의 연극이라는 건 상식이라는 말이 뉴스로 보도되었다.
사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내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케이페이브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유지할 것인지, 일반인들에게 업계 내부를 어디까지 공개할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나온 것이 더 문제였다. 쉽게 말해서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은연 중에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걸 아는데, 업계만 이 악물고 프로레슬링은 실전이라고 우겼다. 게다가 리얼리티를 살려서 케이페이브를 지킨 것도 아니라서 쓸데없는 논란만 많아졌다.
특히 미국 프로레슬링의 선두 주자 WWE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적절한 현실성과 엔터테인먼트를 잘 조합해 세계적인 인기를 끌 때마저 이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행동만 반복한 것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애초에 WWE는 아예 사명에 E(Entertainment)라고 표기되어 있고, 사명이 바뀌기 전에도 풀 네임은 World Wrestling Federation entertainment였다.
WWE는 본인들이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끝없이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수많은 선수와 업계인들은 케이페이브에 맞춰서 성실히 캐릭터를 연기했고, 더러는 언더테이커처럼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연출을 하는 등 애초부터 엔터테이닝에 집중했다. 한 번도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처럼 "프로레슬링은 진짜 격투기, 진짜 싸움입니다!"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국 프로레슬링은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계속 "프로레슬링은 절대 쇼가 아니고 진짜 싸움"이라고 지겹도록 우겨댔다. 호기심 천국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레슬링의 비밀을 방영했는데, 당시 한국 프로레슬링 협회에서 항의하며 이왕표를 통해 해명을 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당시 이왕표는 미국에서는 선수들이 면도칼로 자기 머리에 인위적인 상처를 내지만 우리는 시합 도중 정말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기 때문에 진짜라는 괴이한 논리를 펼쳤으며 프로레슬링을 가짜라고 하면 가슴이 아프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했다. 결국 프로그램은 "한국 프로레슬링만큼은 진짜"라는 황당한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2000년대 초반 이와 비슷한 황당한 사건이 또 있는데 소위 천창욱 난입 사건이다. 당시 국내에서 이왕표와 홍키 통크 맨이 경기를 가졌는데, 경기 도중 해설자 천창욱이 난입해 홍키 통크 맨에게 체어샷을 날리고 이 덕분에 이왕표가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방송 후 인터넷에서 저거 다 각본 아니냐며 원론적인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천창욱 해설위원이 각본이 아니라 진짜라고 황당한 해명을 한 것이다.
천창욱 해설위원은 경기 전 날에 자신이 홍키 통크 맨에게 넥브레이커를 당하고 물고문을 당했는데 너무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난입했다고 해명을 했다. 뉘앙스로만 따지고 보면 더욱 황당하기 그지 없다. 경기의 해설위원이 선수에게 실제 폭행을 당했는데, 아무튼 아무런 법적 조치 없이 경기에만 난입한 거고, 아무튼 우리가 하는 프로레슬링은 가짜가 아니라는,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웅식의 케이페이브였다. #
이로부터 약 5년 후 2008년, 천창욱 해설위원 본인이 당시에 대해 추가로 해명을 했다. 사실 그때 선수와 어느 정도 합의가 있었고 거짓말을 할 의도는 없었지만 그때는 짜고 한 것이 아니라는 글을 게시판에 남겼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때 당시 한국 프로레슬링은 기믹이나 대립 등의 스토리 등에 대한 거부 반응이 상당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 프로레슬링 업계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2020년대가 된 지금은 일반인에게도 프로레슬링의 내부 사정과 각본의 존재, 케이페이브의 개념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은 태생적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문화다 보니 여전히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 시합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7. 여담
- 장영철은 은퇴 이후 말년에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비참한 삶을 지내다가 2006년 만 78살로 김일과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6개월 전인 2006년 2월에 자신이 있던 시설을 찾은 김일과 쌓인 앙금을 풀어내고 화해했다.
- 어느 기자가 프로레슬러 김일에게 "프로레슬링은 잘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한다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자 김일은 허허 웃으면서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 아니겠소?" 라고 에둘러 답한 적이 있다.[4]
- 미국에서도 프로레슬링의 비밀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제작되었으며 해당 프로그램은 한국에 수입되어 호기심 천국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한국 프로레슬링계에서는 처음에는 방영을 반대하였으나, 실제 프로그램은 무분별하게 프로레슬링 기술을 따라할 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중에는 이왕표 등 한국 레슬러들이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 미국판 '프로레슬링은 쇼다'로는 WWE 올드팬이라면 대부분 아는 커튼 콜 사건이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쇼'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팬들이 충격받았던 게 아니고, 링 위에서 각본상 싸워야 하는 선수들이 갑자기 경기 뒤에 껴안고 우정을 나눠버렸기에 논란이 된 것이다. 프로레슬링 암묵의 룰을 어겼으니까 말이다. 쉽게 말하면 친한 두 배우가 드라마에선 원수지간으로 나오는데 촬영 도중에 갑자기 캐릭터를 버리고 친근하게 행동하는 방송사고다. 당시에도 클릭 멤버들이 사석에서 친한 것들이야 익히 다 알려진 사실이었고 링 밖에서 친하게 지내는 것까지야 말릴 수 없는 일이지만, 각본을 수행해야 하는 링 위에서 선역/악역이 나뉘었음에도 친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논란이 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 2020년대에 이 항목과 같은 맥락에서 인터넷 밈 'WWE'가 형성되었다.
8. 관련 문서
9. 참고 자료
[1]
여담으로 김일은 장영철의 이 진술을 두고 사실이 아니라며 완강히 부인했다고 한다.
[2]
전두환은
중학생 시절 권투를 했었을 만큼
권투를
좋아했다. 이를 반영했는지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등의 드라마에선 박정희 옆에서 같이 권투를 보며 방정맞아 보일 정도로 좋아하는 전두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권투는 80년대까진 대중적인 인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3]
야사 중엔 박정희 집권 당시 청와대에서 TV로 프로레슬링을 보고 있던 박통에게 전두환이 "이런 짜고 치는 걸 대체 왜 보십니까?"라고 한 마디했다가 조인트를 까였다는 얘기도 있다.
[4]
다만 이 발언은 김일이 은퇴 이후에 한 이야기로 현역 시절에는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말에 강하게 반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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