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1:17:34

프랑크 레이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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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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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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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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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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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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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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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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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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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1989 Ballond'or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프랑코 바레시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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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of the Year 1988
수상
마르코 반 바스텐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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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레이카르트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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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MP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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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EA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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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ON 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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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ruby(토뇬, ruby=오메로)] 3 [ruby(말디니, ruby=파올로)] 9 [ruby(부리니, ruby=렌초)] 9 [ruby(안토넬리, ruby=로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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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축구인
파일:Frank Rijkaard 은퇴 후.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프랑크 레이카르트
Frank Rijkaard
본명 프랑클린 에드문도 레이카르트
Franklin Edmundo Rijkaard
출생 1962년 9월 30일 ([age(1962-09-30)]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
[[수리남|]][[틀:국기|]][[틀:국기|]]
신체 190cm / 체중 110kg
직업 축구 선수 (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주발 오른발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AFC 아약스 (1980~1987)
스포르팅 CP (1987~1988)
레알 사라고사 (1987~1988 / 임대)
AC 밀란 (1988~1993)
AFC 아약스 (1993~1995)
감독 네덜란드 대표팀 (1998 / 코치)
네덜란드 대표팀 (1998~2000)
스파르타 로테르담 (2001~2002)
FC 바르셀로나 (2003~2008)
갈라타사라이 SK (2009~2010)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2011~2013)
기타 몬트버디 아카데미 (2013~ / 기술고문)
국가대표 73경기 10골 ( 네덜란드 / 1981~1994)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전술 철학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7. 레이카르트에 대한 헌사8. 기타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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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 축구 선수 출신 감독이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선수로서는 오렌지 삼총사 밀란 제너레이션의 중추였고, 감독으로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바르셀로나 왕조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수리남인의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카르트는 1970년, 7살의 나이로 암스테르담 스포츠 산하의 유소년팀에 입단한다. 1979년 암스테르담 선발팀 대표로 아약스 유소년팀과 경기를 갖게 되었는데 뛰어난 실력으로 아약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고 당시 아약스 유소년팀 감독인 레오 벤 하커 감독의 권유로 아약스에 입단하게 된다. 레오 벤 하커가 1군 감독으로 취임한 1980년, 17살의 나이로 1군에 승격하게 된다. 초창기엔 당시 노장이자 팀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었으며, 요한 크루이프의 이적후에는 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중앙 수비수 (1981~1985), 중앙 미드필더 및 우측 윙(1985~1986)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동하며 3차례의 리그 타이틀과 3차례의 FA컵 우승, 컵위너스컵 1회 우승, 1985년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 수상 등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1986-87 시즌 종료 후 AC 밀란으로 이적한 동료 마르코 반 바스텐에 이어 주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87-88 시즌 직전 라이벌 PSV 에인트호번과 비밀리에 계약이 체결된 사실이 알려졌다. 네덜란드 축구협회의 중재로 이적은 불가 판정받고 AFC 아약스에서 뛰게 되지만 당시 감독인 요한 크루이프[1]와의 불화를 겪게 되고 레이카르트는 다시는 요한 크루이프 밑에서 뛰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며 포르투갈의 명문 스포르팅 CP로 이적하게 된다.

1987-88 시즌 윈터브레이크 기간에 스포르팅 CP와의 이적이 성사되었지만, 아약스가 이적동의서를 늦게 발급하여 계약은 너무 늦게 체결이 되었고 포르투갈 축구협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여 선수 등록을 하지 못해 경기에 뛸수 없었고, 레이카르트는 부득이 스페인의 레알 사라고사에 임대되어 1987-88 시즌을 보냈다.
파일:오렌지 삼총사 빅이어.jpg
1988-89 시즌 아리고 사키의 부름을 받아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를 결성. 기존에는 중앙 수비수로도 활약한 레이카르트지만, 아리고 사키 감독의 압박 축구에서 중심이 되는 홀딩 미드필더로 완전 전환하게 되며 유러피언컵 2연패에 큰 공헌을 한다. 상대의 공격을 압박하고 공격의 활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레이카르트의 역할은 훗날 파트리크 비에라로 대표되는 미드필더들의 롤 모델이 된다. 아리고 사키의 후임인 파비오 카펠로 감독 밑에서도 팀의 핵심역할을 하며 1991-92 시즌 세리에 A 무패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5시즌 동안 2차례의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 2연속 발롱도르 3위 등 황금기를 보낸다.
파일:레이카르트 마지막 불꽃.jpg
레이카르트는 31살, 친정팀인 아약스로 복귀하게 된다. 루이 판할 감독 밑에서 당시엔 새파란 유망주였던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프랑크 더부르, 로날트 더부르, 야리 리트마넨,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윈 반 데 사르 등을 이끌며 1994-95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라섰고, 결승에서 친정팀 AC 밀란을 꺾는데 공헌하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그리고 1995년, 33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1981년 처음 국대에 뽑히며 이후 주전급으로 점차 거듭난다.
파일:네덜란드 레이카르트.jpg
네덜란드 역사상 유일한 메이저 트로피를 들다
유로 1988에서 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가 이끄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를 앞세워 결승전에서 '철의 장막' 리나트 다사예프가 지키는 소련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해 현재까지 네덜란드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가 3무로 가까스로 16강에 진출했고,
파일:레이카르트_푈러.png
푈러에게 침을 뱉는 레이카르트

라이벌인 게르만 삼총사가 이끄는 서독과의 16강전 당시 레이카르트는 루디 푈러와 신경전을 벌이다 푈러에게 침을 뱉었고 이게 심판에게 걸려 푈러와 함께 동반 퇴장을 당하였다. 결국 레이카르트가 빠진 네덜란드는 1:2로 패해서 예상보다 빠르게 탈락하고 만다.[2]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1992 조별리그에서 네덜란드는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독일전에서 2분만에 선제골을 꽂아버리면서 2년 전의 한을 그대로 풀어버린다.[3]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 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아쉽게 네덜란드는 보따리를 싸들고 돌아왔어야 했었다.[4]

1994 미국 월드컵에도 출전했지만[5], 네덜란드는 8강에서 결국 호마리우 베베투가 버티는 브라질에게 3:2로 패하여 탈락했고, 대회가 끝난 후 레이카르트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다. 1988~1989년에 2년 연속으로 발롱도르 3위를 달성하는 등,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역대 최고 수준의 임팩트를 보여줬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아리고 사키 AC 밀란 압박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압박을 담당했다. 190cm라는 건장한 체격에 흑인 특유의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체력과 활동량이 초인적인 미드필더였다.

거기에 박스 바깥에서 왼발 대신 오른발을 주로 사용하여 중거리 슛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상대편의 숨통을 틀어쥐는데 능했으며 탁월한 시야에다 드리블과 키핑 기술까지 보유했기에, 공을 탈취했을 때는 밀란이 아닌 여느 팀이었다면 공격형 미드필더를 해도 될 정도의 공격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뿐 아니라 하프라인 이하의 중앙에서는 센터백, 수미, 박스 투 박스, 리베로 등 모든 역할을 초일류로 수행해냈다. 한 마디로 축구괴물이었다. 루드 굴리트와 흔히 묶이지만 포지션이 뒤쪽이라 주목도는 조금 떨어졌다.

4.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후 잠시 의류업계에 몸 담기도 했던 레이카르트는 1997년 지도자 라이선스를 취득,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대표팀의 코치로 4강 진출에 기여하고 임명되어 지도자 수업을 받는다. 이후 히딩크 감독의 후임으로 임명된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고 팀의 사정을 잘 아고 있다는 이유로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경험 미숙으로 반대의견도 많았다. 그리고 홈에서 열리는 UEFA 유로 2000에서 유로 1996 준우승팀 체코, 유로 1992 우승팀이자 1998 프랑스 월드컵 8강팀 덴마크, 그리고 1998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와 같은 조에 속해서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조별리그에서 체코(1-0), 덴마크(3-0), 프랑스(3-2)를 무난히 격파하고 8강에는 유고슬라비아(6-1)를 꺾고 4강에 진출하며 자신의 지도력을 과시하던 레이카르트는 4강전에서 이탈리아[6]에 일격을 당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그 직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한다. 비록 우승컵은 못 얻었어도 레이카르트에게는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해 준 무대였다.

2000-01 시즌 네덜란드의 스파르타 로테르담 감독직으로 취임하지만, 영 좋지 않은 자금 사정과 약한 전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팀을 2부 리그로 강등시키기에 이른다.

그 후 2년 동안 휴식을 취하던 레이카르트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임명된다. 당시에도 유로 2000의 4강 진출은 선수빨이었다는 의견과 2000-01 시즌 스파르타 로테르담의 2부 리그 강등으로 인해 레이카르트 감독 취임을 바르셀로나 내부에서도 반대를 했었다. 오히려 그 당시 감독 0순위는 거스 히딩크 로날드 쿠만이었다. 하지만 팀의 레전드이자 당시 신임 회장인 조안 라포르타와 친분이 깊은 요한 크루이프가 둘의 감독 임명에 반대했고[7] 오히려 마르코 반 바스텐과 레이카르트를 후임으로 거론한다. 반 바스텐은 코치 라이선스가 없다는 이유로 본인이 사양했고, 크루이프의 강력한 추천으로 팀 내부의 반대에도 레이카르트가 감독으로 임명된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2002-03 시즌 루이 판할 감독이 워낙 깽판친 영향으로 순위가 폭풍하락했고, 뒷수습을 위해 임명한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조차도 이 상황을 해결 못하고 라리가 6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경질됐다. 과연 레이카르트가 분위기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후안 로만 리켈메를 비야레알로 임대보내고, 새롭게 바르셀로나의 부활의 전조를 알릴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호나우지뉴 히카르두 콰레스마[8], 라파엘 마르케스 등을 영입해 지난 시즌 때 지적됐던 공격진, 수비진을 해결했고 팀의 분위기를 바꿨다.

하지만 시즌이 절반이 넘어갈 때까지 제대로 된 스타팅 라인업은 구성하지 못했고 엘 클라시코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만 4명을 쓰는 이해하기 힘든 선수 운용, 수비적인 전술, 호나우지뉴의 비효율적 활용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성적은 나아질 기미를 찾지 못했다.[9] 당시 레이카르트 비판 사커라인 칼럼 그러나 2004년 1월, 유벤투스에서 여태까지와 달리 갑자기 부진에 빠지던 에드가 다비즈를 임대영입하여 다비즈- 사비 에르난데스- 필립 코쿠의 강력한 중원을 형성하고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를 과감히 제외시킨 뒤 호나우지뉴- 하비에르 사비올라[10]-가르시아의 스리톱을 형성시키며 팀을 재정비시킨 레이카르트는 그 뒤 15경기 무패행진을 달리기 시작하고 2003-04 시즌 라리가 우승팀 발렌시아에 승점 5점 뒤진 상태로 준우승을 차지한다. 만약 바르셀로나의 팀 재정비가 2, 3경기만 더 빨랐어도 발렌시아의 라리가 우승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방한해 가진 수원과의 친선경기에서 우르모브의 결승골에 0-1로 패한 기록도 있다.

팀을 재정비한 레이카르트는 2004-05 시즌에도 개혁을 멈추지 않고 코쿠, 클라위버르트, 오버르마스, 레이저허르, 다비즈[11]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대표 후배들과의 결별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대신 사무엘 에투, 데쿠, 루도빅 지울리, 에드미우송, 줄리아누 벨레티, 시우비뉴 등을 폭풍 영입한다. 데쿠-마르케스-사비의 강력한 중원으로 수적 우위를 점하고 전통적인 윙포워드인 지울리와 화려함을 주무기로 삼는 외계인 호나우지뉴, 폭발적인 스피드와 득점력을 자랑하는 사무엘 에투로 이어지는 강력한 스리톱으로 2004-05 시즌 6시즌 만에 라리가 우승[12]을 차지한다. 그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 중간에 사비 에르난데스의 장기 부상이 있었지만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활약으로 공백을 메꾸고, 당시 바르셀로나의 최대 유망주였던 리오넬 메시의 등장으로 더욱 강력해진 바르셀로나는 2005-06 시즌 역시 라리가 우승을 하였고, 동시에 2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거머지며 레이카르트는 감독치고는 어린, 43살이라는 나이에 감독으로서 최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2005-06 시즌 이후 레이카르트와 팀을 함께 이끌던 헹크 텐 케이테 수석코치가 팀을 떠나게 되고, 선수들 역시 라리가 2연패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동기 부여가 없어진 상황에서 2006-07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유벤투스 칼초폴리 사태로 인해 잔루카 잠브로타 릴리앙 튀랑 등을 영입하며 구단의 전력을 한층 강화시켰지만 동기 부여가 없어진 선수들은 풀어지게 된다. 평소에도 자유방임주의적이던 레이카르트와는 달리 다소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지휘하던 수석코치 텐 카테의 존재로 선수들을 장악할수 있게 되었는데 텐 카테의 후임인 요한 네스켄스 수석코치 역시 레이카르트와 비슷한 자유방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채 2006 UEFA 슈퍼컵 결승전에서 세비야에게 일격을 당하며 뒤숭숭한 분위기로 시즌을 시작하게 된다. 2006 UEFA 슈퍼컵 결승전 시작 전 세비야는 선수와 코칭 스태프가 단체로 합숙을 하며 심기일전하며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레이카르트는 오히려 선수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가수들을 선수단이 머무는 호텔에 초대하며 느슨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가 세비야와 바르셀로나의 승패를 가른 것이었다. 결국 2006-07 시즌은 다 잡았던 라리가 우승을 최악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게[13] 내주게 되고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리버풀에게 탈락[14]하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끝나게 된다. 코파 델 레이에서도 준결승 1차전 홈경기에서 메시의 단독드리블 돌파골로 5-3으로 이겨놓고 원정에서 열린 2차전에서 4-0 대패를 당해 우승에 실패해 무관을 기록하고 말았다.

2007-08 시즌에는 당시 바르셀로나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던 보드진의 주도로 야야 투레, 가브리엘 밀리토, 에릭 아비달 등을 영입하였으나 당시 팀의 핵심이었던 호나우지뉴 데쿠의 태만한 모습[15], 부실한 선수관리로 인한 선수들의 연속 부상, 감독과 선수와의 불화 등으로 비야레알에게 밀려 라리가 3위로 추락하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리오넬 메시의 활약으로 4강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하였으나 맨유에게 1, 2차전 합산 스코어 1-0으로 밀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16] 레이카르트는 나름대로 3-4-3 포메이션으로의 전환이나 보얀,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 등 10대 후반의 유망주들을 활용하며 팀의 분위기를 바꿔보려했으나 아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2005-06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팀 바르셀로나를 불과 2시즌만에 추락시킨 레이카르트는 결국 감독직을 사임한다. 그가 사임한 2008년 5월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1:4 참패를 당한 바르셀로나는 2시즌 연속 최악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게 라리가 타이틀을 내주었다. 바르사를 지지하는 스포츠 신문 <문도 데포르티보>는 헤드라인으로 "창피하다!"라고 내걸었고, <스포르트> 역시 "당신들은 바르사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라는 문구를 어떠한 사진 없이 검은 배경에 배치한 1면에 내보내며 극도의 실망을 표했다.

1년간 휴식을 취하던 레이카르트는 2009-10 시즌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2009-10 시즌 리그 3위, 2010-11 시즌에는 유로파리그 예선 탈락 및 초반 부진으로 해임된다.

2011년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월드컵 3차 예선에서 호주와 오만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고, 2013 걸프컵에서도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고 곧바로 해임되었다. 그 이후 2013년 미국 플로리다 몬트버디에 있는 몬트버디 축구 아카데미의 기술고문으로 취임하여 지금까지 활동 중이며 2016년 12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장 감독직은 더 이상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5. 전술 철학

사실 레이카르트는 바르셀로나 시절 전술의 틀만 잡았을 뿐 사실상 전략을 꾸미던 사람은 수석코치인 헹크 텐카터이다.[17] 펩 과르디올라 미켈 아르테타처럼 자신이 직접 전술을 연구하고 짜는 감독도 있고 세부적인 전술을 수석코치나 전술진에게 위임하는 감독도 있는데 레이카르트는 알렉스 퍼거슨, 위르겐 클린스만 등과 함께 후자에 속한다.[18] 심지어 해리 레드냅과 같은 감독들은 전술적으로 공격진에 속하는 선수들에게 거의 터치를 안하고 자유방임을 추구한다는 설이 나오기도 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임명된 만큼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한다. 4-3-3을 바탕으로 스리톱과 강력한 중원, 수비수들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으로 높은 라인을 유지하고 점유율 축구를 바탕으로 팀을 꾸려나간다. 이것은 후임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와 유사하지만 레이카르트가 스리톱[19]이 포지션 체인지를 자주 시도한다면, 과르디올라는 철저하게 스리톱의 양 포워드에게 철저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도록 요구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 대신 자유방임주의적인 성격에서 드러나듯이 에투의 뒷공간 침투나 호나우지뉴 데쿠의 개인기 등 선수들을 믿는 프리롤 부여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한마디로 펩 과르디올라가 포메이션이나 포지션 파괴 등을 보여주는 대신 약속된 플레이로 경기를 진행한다면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경우 전체적인 포메이션으로 자리는 지키되 경기 안에서는 자유롭게 놔뒀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측면 덕분에 레이카르트 시절 바르셀로나는 소위 보는 재미가 있었고 역대급의 성공을 거둔 과르디올라의 바르사 시절에도 레이카르트의 바르사가 보는 재미만큼은 있었다고 그때를 그리워하는 축구팬들이 많았다.

다만 무작정 공격 일변도는 아니었다. 2004-05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는 2:1의 근소한 우위를 가져갔으나 2차전에서 공격 일변도로 2:4 완패를 당했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인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는 다시 상대하게 된 첼시를 상대로 라인을 내려 디디에 드록바를 고립시키고 양 윙백의 오버래핑을 자체시켜 아르연 로번- 조 콜의 역습을 차단 후 호나우지뉴-에투-데쿠-메시의 카운터 어택으로 첼시를 격파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7. 레이카르트에 대한 헌사

어린 시절 그의 플레이를 동경했고 지금 그의 가르침을 받아 기쁩니다.
- 호나우지뉴
레이카르트는 내 축구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신뢰했다. 그가 보여준 그러한 신뢰 덕분에 난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 리오넬 메시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최고의 미드필더다. 그는 그의 포지션에서 꿈꿀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난 레이카르트 외에 어떤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가운데서도 그만한 피지컬을 본적이 없다.
- 프랑코 바레시

8. 기타

파일:seibuj.png
세이부 컵 축구 외수판에만 등장하는 네덜란드 팀의 주장[23]이자 모델이다. ( 영문 위키백과 참조)

피파온라인 3에 월드 레전드 선수로 출시되었으나 포지션이 센터백단일 포지션으로 나온지라 말이 많았다.[24] 그러나 이 문제는 후속작인 피파 온라인 4에서도 이어졌다.[25] 결국 유러피언컵,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이상 진출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TC시즌에선 주포지션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표기해주었다.

Pes시리즈에도 수록되어있다. 수비형 미드필더의 본좌 중 한명으로 취급받는다.

독일에서는 레이카르트를 굉장히 싫어한다. 이유는 당연히 위 '국가대표 경력' 문단에 나온 루디 푈러와의 일화 때문. 자국의 고참급 선수에게 대놓고 침을 뱉었으니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수 시절, 네덜란드의 대선배인 빔 얀선에게 수비 지도를 받았고 그 덕분에 수비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

오렌지 삼총사 중 유일하게 유러피언컵 챔피언스리그로 개편된 후에도 우승한 경험이 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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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퇴 후 1984-85 시즌부터 아약스 지휘봉을 잡았다. [2] 다만 레이카르트는 매우 온순한 심성을 가진 선수 중 하나였기에 경기 후 반응도 "얼마나 갈궈댔으면 레이카르트가 그랬겠나" 같은 반응이 많았다. 물론 침을 뱉는 행위로 대응한 레이카르트도 잘한 건 아니다. [3] 레이카르트는 중앙 미드필더로써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지만, 센터백으로도 자주 출장했었다. [4] 이 대회가 오렌지 삼총사가 함께 출전했던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바로 데니스 베르캄프를 발굴했다. [5] 오렌지 삼총사 중 유일하게 1994 월드컵에 출전했다. [6] 승부차기 [7] 히딩크는 크루이프와 축구 철학이 매우 다른 편이고, 쿠만은 성격 자체가 워낙 강성이었다. [8] 한 시즌 만에 쫓겨난다. [9] 말라가에 5:1 대패를 당하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 홈경기에서 20년만의 패배를 당했다. [10] 사비올라 역시 그 다음 시즌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팽 당한다. [11] 반 시즌만에 인테르로 이적하면서 떠났다. [12] 1998-99 시즌 이후 6년 동안 이어지던 무관행진을 끊는 우승이었다. [13] 레알 마드리드와 승점은 같 았지만, 승자승 원칙으로 라리가 우승을 내주었다. [14] 1, 2차전 합산 스코어가 2-2 동점이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탈락하였다. [15] 호나우지뉴는 당시에 훈련장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16] 다만, 맨유가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심판의 덕이 있었다고 스콜스가 밝혔다. 출처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4강 2차전에서 스콜스는 페널티 박스에서 돌파하는 메시에게 다리를 걸었고, 메시는 넘어졌다. 스콜스는 반칙을 했지만 심판은 가만히 있었고, 의외로 메시는 크게 항의하지 않고 인플레이 상황에 집중했다. 그대로 이러한 상황이 지나갔기에 맨유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맨유는 캄프 누에서 열린 4강 1차전에서 0-0으로 비겼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4강 2차전에서 전반전 14분 스콜스가 환상적인 중거리포를 작렬시켜 1-0으로 이겼다. 원래대로라면 FC 바르셀로나에게 페널티킥이 주어졌어야 했다. 만약 바르셀로나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2차전이 1-1로 끝났다면 원정 다득점 원칙이 적용되어 맨유는 4강에서 탈락하고 바르셀로나가 UEFA 챔피언스 결승전에 진출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 이 점을 높이산 첼시가 무리뉴 경질후 카이테 감독설 링크가 뜨기도 했다. [18] 한국에서는 슈틸리케 감독이 당시 수석 코치였던 신태용 감독에게 세부 전술을 맡겼던 일을 예로 들 수 있다. [19] 호나우지뉴- 사무엘 에투- 리오넬 메시 [20] DM 4위 [21] 돈 발롱 어워드 [22] 알프 램지 어워드 [23] 다만 실제 당시 네덜란드의 주장은 루드 굴리트였다.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실제 주장과 해당 게임 내 주장이 다른 경우가 꽤 있다. [24] 레이카르트가 센터백으로 나온경기가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역대 최고급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주 포지션을 수미, 부 포지션을 센터백으로 설정해두었다면 없었을 논란이었다. [25] 피파 온라인 4에서는 NHD시즌, 즉 국가대표 데뷔시즌을 기준으로 한 시즌이므로 3때에 비해 변호할 여지가 많긴하다. 그리고 수비형 미드필더에 배치했을 때 센터백에 배치했을 때보다 오버롤이 더 높아진다! TT클래스 베르캄프의 포지션이 ST로 표기되어 있지만 CF에 배치했을 때 능력치가 더 높아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며 오히려 강화하는 데 드는 부스트 값을 아낄 수 있어 좋다. [26] 반 바스텐 굴리트는 1991-92 시즌까지 챔피언스리그 전신 이름이었던 유러피언컵 우승 밖에 없다. 1993-94 시즌 밀란 챔피언스리그 우승했을 당시에는 굴리트 삼프도리아로 임대를 간 상황이었고, 반 바스텐은 부상이라 1경기 아니 1분도 뛰지 못했기 때문에 챔피언스리그 트로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