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22:51:40

풍도(오대십국시대)

<colbgcolor=#000000><colcolor=#ece5b6> 영문의왕
馮道 | 풍도
파일:1564328929.jpg
시호 영문의왕(瀛文懿王)
출생 882년
사망 954년 4월
재임 오대의 재상
927년 ~ 954년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000><colcolor=#000000> 풍(馮)
도(道)
가도(可道)
주군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이종가
석경당
석중귀
요태종
유지원
유승우
유빈
곽위
시영
}}}}}}}}}

1. 소개2. 생애3. 평가
3.1. 풍도에 대한 언사
4. 기타5.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중화제국 오대십국시대의 정치가로, 많은 왕조가 흥망하는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서도 변함없이 재상의 자리를 보존한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하다. 자는 가도(可道).

무려 5개 왕조( 후당, 후진, 요나라, 후한, 후주) 11명[1] 황제[2] 밑에서 재상을 지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라와 황제는 계속 바뀌는데 재상은 그거랑 아무 상관 없이 계속 풍도였던 것.[3]

2. 생애

풍도는 당나라 말기였던 882년, 영주(瀛州) 경성(景城)[4]의 한 평범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작문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유주절도사 유수광의 휘하에서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수광이 다른 고을을 침공하는 것을 막으려고 간언하다가 옥에 갇혀 거의 죽을 뻔 하기도 하였다. 풍도가 이후로 정계에서 몸을 사리며 시류에 영합하는 움직임으로 일관한 것도 당시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914년, 유수광이 이존욱에게 멸망당하자 당시 이존욱이 통치하던 태원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이존욱 휘하의 환관인 감군사 장승업과 만나게 되었는데, 장승업은 그의 재능을 높이 샀는지, 풍도를 후원하여 관료로 등용하였다. 923년,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여 황제에 등극하자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몇 년 후인 927년, 이사원이 즉위한 후에는 그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다.

이사원의 뒤를 이어 이종후가 즉위하였으나, 고작 재위한 지 1년이 지난 934년, 이종가에 의해 찬탈당하였다. 풍도는 그 과정에서 이종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936년, 석경당의 쿠데타로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건국되자 또다시 석경당에게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때에 풍도는 석경당의 명을 받들어 거란 요태종 야율덕광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2개월간 머물렀다. 요태종은 이때에 풍도의 명망을 잘 알고 있어서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했지만, 풍도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며 이를 완곡한 태도로 거절하고는 후진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석경당은 풍도를 무척 신뢰하게 되어 반드시 그와 국정을 논하였다.

942년, 석경당은 중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앞두게 되자 풍도를 호출하여 자신의 어린 아들인 석중예의 후사를 부탁하였다.[5] 그러나 석경당이 죽은 후,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어린 석중예 대신에 석경당의 장성한 조카인 석중귀를 황제로 옹립한다.

946년, 석중귀는 요나라와의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였고, 이로 인해 요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해와 후진의 수도인 개봉이 함락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요태종은 다시 풍도와 재회하여 그를 태부에 임명하였다. 풍도는 요나라 군사들이 중국의 백성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멈춰줄 것을 간하였고, 요태종은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6]

그러나 이듬해인 947년, 유지원 후한을 건국하여 거란족의 지배에 항전하자, 요태종은 북쪽으로 철군했다. 풍도 또한 이 행렬을 따라갔다. 그런데 북쪽으로 이동하던 와중에 요태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장례식을 틈타서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풍도는 여러 대신들과 함께 이에 합세하여 격려하였고, 요태종의 행렬은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풍도를 비롯한 후진의 대신들은 유지원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유지원이 죽자 그의 아들인 유승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런데 950년, 유승우가 강력한 권력을 지닌 개국공신들을 숙청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개국공신들 중에서도 가장 명망높았던 추밀사 곽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유승우를 제거하고 후주를 건국하였다. 풍도는 곽위에게도 등용되어 후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그를 위해 일하였다.

954년, 곽위가 죽자 그 양자였던 시영이 뒤를 이어 후주의 황제가 되었다. 시영이 즉위하자마자 북한 유숭 거란과 결탁하여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왔는데, 이에 시영은 자신이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퇴하고자 하였다. 이때 풍도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군주가 직접 출전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장수를 파견할 것을 간하였으나 시영은 뜻을 꺾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시영의 뜻에 따랐으나, 풍도는 끝까지 시영의 출전에 반대하며 언쟁을 벌이기까지 했다.[7] 결국 시영은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8]

그럼에도 시영은 풍도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서 중용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령의 나이였던 풍도는 시영이 유숭을 격파한 지 몇달 후에 73세의 나이로 숨울 거두었다. 시영은 풍도의 죽음에 크게 낙심하여 3일간 조례를 금하며 풍도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풍도는 사후에 영왕(瀛王)으로 추증되었으며 문의왕(文懿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풍도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 편이다.[9] 지조나 염치도 없이 오로지 일신의 안녕만을 위해 주인을 수없이 갈아치운 간신배로 여겨지기도 하고, 혹은 처세의 달인이자 임금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 뛰어난 재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풍도의 평가를 다채롭게 하고 있다. 물론 충효론, 화이론이 대세였던 전근대에는 비평적인 논조가 주를 이루지만, 현대에서는 정치가 면이 더 부각되었다. 때문에 본 문서도 긍정적인 논조가 주를 이룬다.

풍도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함부로 정적을 만들지 않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왕조가 바뀌면 잽싸게 갈아타주며, 강자 앞에서는 넙죽 엎드려서 간도 쓸개도 빼다 바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신으로 요나라에 갔을 때 요 태종에게 "저는 재주도 덕도 없는 멍청한 늙은이입니다!"라고 말했던 일화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러나 그가 5대 10국 황제들로부터 중용되었던 것을 단순히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도 어폐가 있다. 당시의 황제들이라고 풍도가 주인을 수차례 바꾸었음을 모를 리가 만무했겠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풍도를 재상으로 중용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풍도가 지닌 정치가이자 관료로서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또한 풍도는 정말로 필요한 상황에서는 후환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요 태종 야율덕광의 밑에 있을 때에는 그의 부하들이 백성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일을 그만 두도록 간하여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였고, 후주 세종 시영을 보좌할 때에는 황제의 심기를 팍팍 거스르는 말을 날리면서까지 친정을 반대하였다.

이처럼 풍도는 난세를 맞아 몸보신하는 재능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국가의 일을 잘 처리하여 민생을 보살피는 데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위가 충성과 지조를 중시하던 당대의 가치관이나 윤리관에 들어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5개의 왕조를 거치면서 왕조마다 충성을 다짐했을 터이니 이런 부분에서 겸연쩍어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덕망이나 명성이 높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해야 할 수준의 군주가 과연 옳은 길을 가르쳐 준들 반성하고 자기의 행동을 고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세상사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니 그런 사람도 잘 다뤄서 '목숨 걸고 개과천선을 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라고 비판한다면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지...

기본적으로 풍도는 국가나 군주의 가치를 당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했던 선비들에 비해서는 크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군주가 바뀌던 왕조가 바뀌던 풍도는 그저 적당하게 이용해 먹을 만한 군주나 왕조면 이용해 먹었고 그게 안 될 때 버릴 수 있으면 버리는 사람이기는 했다. 다만 풍도가 그렇게 지조 없는 행동을 하면서 '자기 목숨의 보신' 만큼이나, 그리고 어찌 보면 그 이상으로 '백성의 안녕' 이라는 걸 추구한 관료라는 게 당시 관료로서는 굉장히 특색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당장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일에는 대범하게 목숨을 걸기도 했다. 석중귀의 배반으로 빡친 요나라 황제의 학살을 막으면서 '지금 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건 부처님도 아니고 오직 폐하 한 분 뿐이십니다'라며 요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인 일이 과연 만만하게 웃으면서 할 만한 일이었을까? 저 행동이야말로 진짜 목숨을 걸고 제대로 간언을 한 것이었다. 분명히 가후처럼 스스로의 보신만을 위해서 재주를 부린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증거다.

후세 선비들은 이 일을 들어서 염치도 지조도 자존심도 없이 오랑캐 황제에게 굽힌 행위라고 비난했지만, 저 행위가 비난받을 행위도 아니었고 분명 목숨을 걸고 학살을 막고 많은 인명을 구한 행위였다는 것, 명분으로나 실질로나 잘못되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것은 현시대 사람들의 가치관뿐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풍도의 능력만큼이나 그의 인품이나 덕망을 당대 사람들이 칭찬하지는 않았을 테니....[10]

풍도가 군주들 비위를 맞추고 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엎드려 기다가, 혹은 지조 없이 모시는 군주를 바꾸다가 하면서 했던 일이라는 게 저렇게 백성들의 삶에는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았다. 당장 요나라 황제의 학살을 막기 위해서 했던 저 아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저런 처세의 목적 자체가 자기의 보존이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을 위한 일이었던 사례도 분명히 있었다. 비판자들도 인정하듯 당장 금전적으로도 청렴했고 자신의 것을 털어서 구호하는 데도 아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풍도란 사람이 '사직과 군주를 구분하여 충성하며 백성을 생각한 사람'이란 이탁오의 평가가 크게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당대에 인정이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저 평가가 유독 이탁오라는 튀는 지식인의 평가만도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1] 실제로 오대십국시대는 그 기간도 짧았거니와 다른 난세들과 비교해 보면 대규모 학살이나 유랑이 적은 시대였다. 거기에 풍도란 사람의 저런 캐릭터가 기여한 바가 제법 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보신에 능했던 많은 이들과는 달리, 풍도는 개인적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실천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평소에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재상을 지낼 적에는 황제가 하사하는 재물조차도 받기 꺼렸다.[12] 벼슬을 지내면서도 검소하여 몸소 농사를 짓고 땔감을 마련하였으며, 기근이 들면 재산을 풀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였고,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 신오대사》의 저자였던 구양수는 풍도열전을 저술하면서 풍도의 행적에 대해 염치도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으나[13], 그러면서도 그의 청렴결백한 면모에 대해서도 분명히 기록하였다.

어떻게 보면 진말한초의 숙손통과도 닮았다. 풍도와는 달리 아예 유학자였음에도 돌아가며 섬긴 군주가 10여명이었으며 필요할 때는 아첨도 하고 예의도 조금 벗어던지고 형식보다 현실을 더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풍도의 행보가 백성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숙손통은 유학자로서 조금 결격있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원칙만큼은 칼 같이 고수해서 한고제가 태자 교체를 꾀하려고 하자 그럴 거면 자신을 죽이고 행하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섰다.

3.1. 풍도에 대한 언사

풍도의 이행(履行: 풍도가 행한 바들을 말하는 듯 하다.)은 그윽하여 옛 사람의 풍격이 서려있고 풍도의 도량은 깊어서 큰 신하의 예를 얻었다. 하지만 풍도는 4개의 왕조를 섬겨 여섯 황제의 재상이 되었으니, 충(忠)을 행했겠는가! 무릇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인간의 불행인데, 하물며 3번 바꾼 자도 그러하겠는가! 죽은 자의 최후를 장식하는 의식에서 문정(文貞)이나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풍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오대사의 저자 설거정[14]
뻔뻔한 인간이다!
신오대사의 저자 구양수
그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편안히 한 것은 부처나 보살의 행동과 같다.
송나라의 정치가 왕안석
그가 여러 왕조를 받들며 핵심지위를 장악하고 이를 자랑한 것[15]은 절조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간신의 표상이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백성들이 고통을 벗어난 것은 그가 부양에 힘쓴 탓이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16]

4. 기타

  •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그간 풍도가 이뤄낸 업적은 사실 전부 쌍기가 다한 거고, 풍도는 그저 쌍기가 해놓은 걸 가로채 출세했을 뿐 오히려 그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막은 간사한 소인배로 묘사된다. 당연히 어디까지나 쌍기를 띄워주기 위한 연출로, 역사적 근거 따윈 전혀 없는 창작에 불과하다.
  • 풍도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설시(舌詩)'.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시로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할 때 자주 인용된다.
입은 재앙을 여는 문이고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니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숙히 간직한다면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어디서나 거뜬히 몸을 편히 하리라||
  • 조선 연산군은 풍도의 이 시를 내관들 허리춤에 차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물론 자기한테 바른말 하면 조져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자기 입장에서 충신인 간신들의 말은 듣고 진정한 충신의 간언은 씹겠다는 의미.

5.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ff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양서(梁書) ]
{{{#181818,#e5e5e5
1·2·3·4·5·6·7권 「태조기(太祖紀)」 8·9·10권 「말제기(末帝紀)」
주황 주우정
11권 「후비전(后妃傳)」
문혜황태후 · 원정황후 · 장덕비
12권 「종실전(宗室傳)」
주전욱 · 주우량 · 주우능 · 주우회 · 주우녕 · 주우륜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장 · 주우자
13권 「주선등전(朱瑄等傳)」 14권 「나소위등전(羅紹威等傳)」
주선 · 주근 · 시부 · 왕사범 · 유지준 · 양숭본 · 장은 · 장만진 나소위 · 조주 · 왕가
15권 「한건등전(韓建等傳)」 16권 「갈종주등전(葛從周等傳)」
한건 · 이한지 · 풍행습 · 손덕소 · 조극유 · 장신사 갈종주 · 사언장 · 호진 · 장귀패 · 장귀후 · 장귀변
17권 「성예등전(成汭等傳)」 18권 「장문울등전(張文蔚等傳)」
성예 · 두홍 · 전군 · 조광응 · 장길 · 뇌만 장문울 · 설이구 · 장책 · 두효 · 경상 · 이진
19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씨숙종 · 주우공 · 왕중사 · 주진 · 이사안 · 등계균 · 황문정 · 호규 · 이당 · 이중윤 · 범거보
20권 「사동등전(謝瞳等傳)」
사동 · 사마업 · 유한 · 왕경요 · 고소 · 마사훈 · 장존경 · 구언경
21권 「방사고등전(龐師古等傳)」
방사고 · 곽존 · 부도소 · 서회옥 · 곽언 · 이당빈 · 왕건유 · 유강예 · 왕언장 · 하덕륜
22권 「양사후등전(楊師厚等傳)」 23권 「유심등전(劉鄩等傳)」
양사후 · 우존절 · 왕단 유심 · 하괴 · 강회영 · 왕경인
24권 「이정등전(李珽等傳)」
이정 · 노증 · 손즐 · 장준 · 장연 · 두순학 · 나은 · 구은 · 은심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당서(唐書) ]
{{{#181818,#e5e5e5
1·2권 「무제기(武帝紀)」 3·4·5·6·7·8·9·10권 「장종기(莊宗紀)」 11·12·13·14·15·16·17·18·19·20권 「명종기(明宗紀)」
이극용 이존욱 이사원
21권 「민제기(閔帝紀)」 22·23·24권 「말제기(末帝紀)」
이종후 이종가
25권 「후비전(后妃傳)」
정간황후 · 유태비 · 위국부인 · 신민경황후 · 한숙비 · 이덕비 · 소의황후 · 화무현황후 · 선헌황후 · 공황후 · 유황후
26·27권 「종실전(宗室傳)」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패 · 이존미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찬 · 이종익 · 이중길 · 이이미
28권 「이사소등전(李嗣昭等傳)」 29권 「이존신등전(李存信等傳)」 30권 「왕용등전(王鎔等傳)」
이사소 · 배약 · 이사본 · 이사은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왕용 · 왕소회 · 왕처직
31권 「강군립등전(康君立等傳)」
강군립 · 설지근 · 사건당 · 이승사 · 사엄 · 개우 · 이광 · 이승훈 · 사경용
32권 「주덕위등전(周德威等傳)」 33권 「곽숭도전(郭崇韜傳)」 34권 「조광봉등전(趙光逢等傳)」
주덕위 · 부존심 곽숭도 조광봉 · 정각 · 최협 · 이기 · 소경
35권 「정회등전(丁會等傳)」 36권 「이습길등전(李襲吉等傳)」
정회 · 염보 · 부습 · 오진 · 왕찬 · 원상선 · 장온 · 이소문 이습길 · 왕겸 · 이경의 · 노여필 · 이덕휴 · 소순
37권 「안금전등전(安金全等傳)」
안금전 · 안원신 · 안중패 · 유훈 · 장경순 · 유언종 · 원건풍 · 서방업 · 장준회 · 손장
38권 「맹방립등전(孟方立等傳)」 39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맹방립 · 장문례 · 동장 장전의 · 주우겸
40권 「곽언위등전(霍彦威等傳)」 41권 「이건급등전(李建及等傳)」
곽언위 · 왕안구 · 대사원 · 주한빈 · 공경 · 유기 · 주지유 이건급 · 석군립 · 고행규 · 장정유 · 왕사동 · 삭자통
42권 「안중회등전(安重誨等傳)」 43권 「두로혁등전(豆盧革等傳)」
안중회 · 주홍소 · 주홍실 · 강의성 · 약언조 · 송영순 두로혁 · 위설 · 노정 · 조봉 · 이우 · 임환
44권 「설정규등전(薛廷珪等傳)」
설정규 · 최기 · 유악 · 봉순경 · 두몽징 · 이보은 · 귀애 · 공막 · 장문보 · 진예 · 유찬
45권 「장헌등전(張憲等傳)」
장헌 · 왕정언 · 호장 · 최이손 · 맹곡 · 손악 · 장연랑 · 유연호 · 유연랑
46권 「원행흠등전(元行欽等傳)」
원행흠 · 하노기 · 요홍 · 이엄 · 이인구 · 강사립 · 장경달
47권 「마욱등전(馬郁等傳)」
마욱 · 사공정 · 조정은 · 소희보 · 약종지 · 가복 · 마호 · 나관 · 순우안 · 장격 · 허적 · 주현표
48권 「장승업등전(張承業等傳)」
장승업 · 장거한 · 마소굉 · 맹한경
49권 「모장등전(毛璋等傳)」 50권 「강연효등전(康延孝等傳)」
모장 · 섭서 · 온도 · 단응 · 공겸 · 이업 강연효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진서(晉書) ]
{{{#181818,#e5e5e5
1·2·3·4·5·6권 「고조기(高祖紀)」 7·8·9·10·11권 「소제기(少帝紀)」
석경당 석중귀
12권 「후비전(后妃傳)」
이황후 · 안태비 · 장황후 · 풍황후
13권 「종실전(宗室傳)」
석경위 · 석훈 · 석중윤 · 석중영 · 석중신 · 석중예 · 석중진 · 석중고 · 석중예 · 석연후 · 석연보
14권 「경연광등전(景延廣等傳)」
경연광 · 이언도 · 장희숭 · 왕정윤 · 사광한 · 양한옹 · 양사권 · 윤휘 · 이종장 · 이종온 · 장만진
15권 「상유한등전(桑維翰等傳)」
상유한 · 조형 · 유구 · 풍옥 · 은붕
1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조재례 · 마전절 · 장균 · 화온기 · 안숭완 · 양언순 · 이승약 · 육사탁 · 안원신 · 장랑 · 이덕충 · 전무 · 이승복 · 상리금
17권 「방지온등전(房知溫等傳)」
방지온 · 왕건립 · 강복 · 안언위 · 이주 · 장종훈 · 이계충 · 이경 · 주광보 · 부언요 · 나주경 · 정종
18권 「요의등전(姚顗等傳)」
요의 · 여기 · 양문구 · 사규 · 배호 · 오승범 · 노도 · 정도광 · 왕권 · 한운 · 이역
19권 「노질등전(盧質等傳)」
노질 · 이혜미 · 노첨 · 최절 · 설융 · 조국진 · 장인원 · 조희 · 이하 · 윤옥우 · 정운수
20권 「장종간등전(萇從簡等傳)」
장종간 · 반환 · 방태 · 하건 · 장정온 · 곽연로 · 곽금해 · 유처양 · 이경 · 고한균 · 손언도 · 왕부증 · 비경 · 이언순
21권 「황보우등전(皇甫遇等傳)」
황보우 · 왕청 · 양한장 · 백봉진 · 노순밀 · 주환 · 심윤 · 오만 · 적장 · 정복윤 · 곽린
22권 「공숭필등전(孔崇弼等傳)」
공숭필 · 진보극 · 왕유 · 장계조 · 정완 · 호요 · 유수청 · 방고 · 맹승회 · 유계훈 · 정수익 · 정손 · 이욱 · 정현소 · 마중적 · 진현
23권 「범연광등전(范延光等傳)」 24권 「안중영등전(安重榮等傳)」
범연광 · 장종보 · 장연파 · 양광원 · 노문진 · 이금전 안중영 · 안종진 · 장언택 · 조택균 · 장려 · 소한 · 유희 · 최정훈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한서(漢書) ]
{{{#181818,#e5e5e5
1·2권 「고조기(高祖紀)」 3·4·5권 「은제기(隱帝紀)」
유고 유승우
6권 「후비전(后妃傳)」
이황후
7권 「종실전(宗室傳)」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勛) · 유신 · 유빈
8권 「왕주등전(王周等傳)」
왕주 · 유심교 · 무한구 · 장관 · 이은 · 유재명 · 마만 · 이언종 · 곽근 · 황보립 · 백재영 · 장붕
9권 「사홍조등전(史弘肇等傳)」
사홍조 · 양빈 · 왕장 · 이홍건 · 염진경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 유수
11권 「이숭등전(李崧等傳)」 1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이숭 · 소봉길 · 이린 · 용민 · 유정 · 장윤 · 임연호 두중위 · 이수정 · 조사관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주서(周書) ]
{{{#181818,#e5e5e5
<rowcolor=#373a3c> 1·2·3·4권 「태조기(太祖記)」 5·6·7·8·9·10권 「세종기(世宗紀)」 11권 「공제기(恭帝紀)」
곽위 시영 시종훈
12권 「후비전(后妃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정혜황후 · 선의황후
13권 「종실전(宗室傳)」
곽동 · 곽신 · 시종의 · 시희회
14권 「고행주등전(高行周等傳)」
고행주 · 안심기 · 안심휘 · 안심신 · 이종민 · 정인회 · 장언성 · 안숙천 · 송언균
15권 「왕은등전(王殷等傳)」
왕은 · 하복진 · 유사 · 왕진 · 사언초 · 사의 · 왕령온 · 주밀 · 이회충 · 백문가 · 백연우 · 당경사
16권 「조휘등전(趙暉等傳)」
조휘 · 왕수은 · 공지준 · 왕계홍 · 풍휘 · 고윤권 · 절종완 · 왕요 · 손방간
<rowcolor=#373a3c> 17권 「풍도전(馮道傳)」 18권 「노문기등전(盧文紀等傳)」
풍도 노문기 · 마예손 · 화응 · 소우규 · 경범
19권 「왕박등전(王朴等傳)」
왕박 · 양응식 · 설인겸 · 소원 · 노손 · 왕인유 · 배우 · 단희요 · 사도후 · 변울 · 왕민
20권 「상사등전(常思等傳)」
상사 · 적광업 · 조영 · 이언군 · 이휘 · 이건숭 · 왕중예 · 손한영 · 허천 · 조봉 · 제장진 · 왕환 · 장언초 · 장영 · 유인섬
21권 「왕준등전(王峻等傳)」
왕준 · 모용언초 · 염홍로 · 최주도
22권 「유호등전(劉皞等傳)」
유호 · 장항 · 장가복 · 우덕진 · 왕연 · 신문병 · 호재 · 유곤 · 가위 · 조연의 · 심구 · 이지손 · 손성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folding [ 열전(列傳) ]
{{{#181818,#e5e5e5
132·133권 「세습열전(世襲列傳)」 134·135·136권 「참위열전(僭位列傳)」
이무정 · 고만흥 · 한손 · 이인복 · 고계흥 · 마은 · 유언 · 전류 양행밀 · 이변 · 왕심지 · 유수광 · 유엄 · 유숭 · 왕건 · 맹지상
137·138권 「외국열전(外國列傳)」
거란 · 토번 · 회골 · 고려 · 발해 · 흑수말갈 · 신라 · 당항 · 곤명부락 · 우전 · 점성 · 장가만
※ 138권 ~ 150권은 志에 해당. 구오대사 문서 참고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ff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0%"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2권 「양본기1·2(太祖紀一二)」 3권 「양본기3(梁本紀三)」
주황 주우정
4·5권 「당본기1·2(唐本紀一二)」 6권 「당본기3(唐本紀三)」 7권 「당본기4(唐本紀四)」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 이종가
8권 「진본기1(晉本紀一)」 9권 「진본기2(晉本紀二)」
석경당 석중귀
10권 「한본기(漢本紀)」
유고 · 유승우
11권 「주본기1(周本紀一)」 12권 「주본기2(周本紀二)」
곽위 시영 · 시종훈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0%"
{{{#!folding [ 열전(列傳) ]
13권 「양가인전(梁家人傳)」
문혜황후 · 원정황후 · 진소의 · 이소용 · 장덕비 · 곽비 · 주전욱 · 주존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자
14권 「당태조가인전(唐太祖家人傳)」
유부인 · 정간황후 · 신민경황후 ·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미 · 이존패 · 이존례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존기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계요
15권 「당명종가인전(唐明宗家人傳)」
화무헌황후 · 소의황후 · 위황후 · 왕숙비 · 공황후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익 · 이종찬 · 이종장 · 이종온 · 이종민
16권 「당폐제가인전(唐廢帝家人傳)」
유황후 · 이중길 · 이중미
17권 「진가인전(晉家人傳)」
황후 이씨 · 안태비 · 풍황후 · 석경위 · 석경윤 · 석경휘 · 석중신 · 석중예(重乂) · 석중예(重睿) · 석중고 · 석연후 · 석연보
18권 「한가인전(漢家人傳)」
이황후 · 유빈 ·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勳) · 유신
19권 「주태조가인전(周太祖家人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곽동 · 곽신 · 곽수원 · 곽손
20권 「주세종가인전(周世宗家人傳)」
시수례 · 정혜황후 · 선의황후 · 부황후 · 시종의 · 시희성 · 시희함 · 시희양 · 시희근 · 시희회
21권 「양신전·1(梁臣傳一)」 22권 「양신전·2(梁臣傳二)」
경상 · 주진 · 방사고 · 갈종주 · 곽존 · 장존경 · 부도소 · 유한 · 구언경 강회영 · 유심 · 우존절 · 장귀패 · 왕중사 · 서회옥
23권 「양신전·3(梁臣傳三)」 24권 「당신전·1(唐臣傳一)」
양사후 · 왕경인 · 하괴 · 왕단 · 마사훈 · 왕건유 · 사언장 곽숭도 · 안중회
25권 「당신전·2(唐臣傳二)」 26권 「당신전·3(唐臣傳三)」
주덕위 · 부존심 · 사건당 · 왕건급 · 원행흠 · 안금전 · 원건풍 · 서방업 부습 · 오진 · 공겸 · 장연랑 · 이엄 · 이인구 · 모장
27권 「당신전·4(唐臣傳四)」 28권 「당신전·5(唐臣傳五)」
주홍소 · 유연랑 · 강사립 · 강의성 · 약언조 두로혁 · 노정 · 임환 · 조봉 · 이습고 · 장헌 · 소희보 · 유찬 · 하찬
29권 「진신전(晉臣傳)」 30권 「한신전(漢臣傳)」
상유한 · 경연광 · 오만 소봉길 · 사홍조 · 양빈 · 왕장 · 유수 · 이업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31권 「주신전(周臣傳)」 32권 「사절전(死節傳)」
왕박 · 정인회 · 호재 왕언장
33권 「사사전(死事傳)」
장원덕 · 하노기 · 요홍 · 왕사동 · 장경달 · 적진종 · 심빈(1) · 왕청 · 사언초 · 손성
34권 「일행전(一行傳)」
정요 · 석앙 · 정복윤 · 이자륜
35권 「당육신전(唐六臣傳)」 36권 「의아전(義兒傳)」
장문울 · 양섭 · 장책 · 조광봉 · 설이구 · 소순 이사소 · 이사본 · 이사은 ·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37권 「영관전(伶官傳)」 38권 「환관전(宦官傳)」
주잡 · 경신마 · 경진 · 사언경 · 곽종겸 장승업 · 장거한
39권 「왕용등전(王鎔等傳)」 40권 「이무정등전(李茂貞等傳)」
왕용 · 나소위 · 왕처직 · 유수광 이무정 · 한건 · 이인복 · 한손 · 양숭본 · 고만흥 · 온도
41권 「노광조등전(盧光稠等傳)」 42권 「주선등전(朱宣等傳)」
노광조 · 담전파 · 뇌만 · 종전 · 조광응 주선 · 왕사범 · 이한지 · 맹방립 · 왕가 · 조주 · 풍행습
43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44권 「유지준등전(劉知俊等傳)」
씨숙종 · 이언위 · 이진 · 배적 · 위진 · 공순 · 손덕소 · 왕경요 · 장은 유지준 · 정회 · 하덕륜 · 염보 · 강연효
45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4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장전의 · 주우겸 · 원상선 · 주한빈 · 단응 · 유기 · 주지유 · 육사탁 조재례 · 곽언위 · 방지온 · 왕안구 · 안중패 · 왕건립 · 강복 · 곽연로
47권 「화온기등전(華溫琪等傳)」
화온기 · 장종간 · 장균 · 양언순 · 이주 · 유처양 · 이승약 · 장희숭 · 상리금 · 장정온 · 마전절 · 황보우 · 안언위 · 이경 · 이경암
48권 「노문진등전(盧文進等傳)」
노문진 · 이금전 · 양사권 · 윤휘 · 왕홍지 · 유심교 · 왕주 · 고행주 · 백재영 · 안숙천
49권 「적광업등전(翟光鄴等傳)」
적광업 · 풍휘 · 황보휘 · 당경사 · 왕진 · 상사 · 손방간
50권 「왕준등전(王峻等傳)」 51권 「주수은등전(朱守殷等傳)」
왕준 · 왕은 · 유사 · 왕환 · 절종완 주수은 · 동장 · 범연광 · 누계영 · 안중영 · 안종진 · 양광원
5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53권 「왕경숭등전(王景崇等傳)」
두중위 · 이수정 · 장언택 왕경숭 · 조사관 · 모용언초
54권 「풍도등전(馮道等傳)」 55권 「유구등전(劉昫等傳)」
풍도 · 이기 · 정각 · 이우 · 노도 · 사공정 유구 · 노문기 · 마윤손 · 요의 · 유악 · 마호
56권 「화응등전(和凝等傳)」
화응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57권 「이숭등전(李崧等傳)」
이숭 · 이린 · 가위 · 단희요 · 장윤 · 왕송 · 배호 · 왕인유 · 배우 · 왕연 · 마중적 · 조연의
{{{-2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50%> 61권 「오세가(吳世家)」 ||<-2><width=50%>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왕건 맹지상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 부록(附錄) ]
||<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72·73권 「거란전(契丹傳)」 ||
거란
74권 「외국열전(外國列傳)」
· 토혼 · 달단 · 당항 · 돌궐 · 토번 · 회골 · 우전 · 고려 · 발해 · 신라 · 흑수말갈 · 남조만 · 장가 · 곤명 · 점성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1] 후한의 임시황제 유빈까지 포함한다면 12명이다. [2]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이종가, 석경당, 석중귀, 요태종, 유지원, 유승우, 유빈(임시황제), 곽위, 시영. [3] 요나라에서는 사신으로 갔을 때 재상급으로 대우해주었을 정도로 이름이 있었고 그러한 명성은 교체된 왕조에서 이용가치가 매우 크다. [4] 삼국지 지명으로 따지면 하간(河間): 現 창저우시의 일부 [5] 당시 석경당은 석중예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 자리에서 석중예로 하여금 풍도에게 절을 하게 하고는 그의 품에 안기게 하기까지 하는 등 눈물나는 제스처를 취한다. [6] 이때 요태종은 학살을 방조하면서 풍도에게 "천하의 백성을 어찌 구하려는가?"(天下百姓,如何可救)라고 물으며 풍도를 떠보았고, 이에 풍도가 "지금 백성은 부처님이 와도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此時百姓,佛再出救不得,惟皇帝救得)라고 말하자 그 말에 흡족함을 느꼈다. 실제로 그 당시 민초들의 목숨을 구할 힘이 있던 것은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요태종 본인뿐이었으니, 단순한 아부가 아닌 현실을 직시한 현답이었다. (출처: 구오대사 권 126, 풍도 열전) [7] 이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꽤 유명하다. 시영이 "당 태종도 몸소 천하를 평정했는데 나라고 내 몸 하나를 아끼랴?"라 하자 풍도는 "폐하께서 스스로 당 태종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라 맞불을 놓았다. 이에 시영이 "유숭 따위를 멸하는 것쯤은 큰 산이 달걀을 뭉개듯 간단하다."고 말하자, 풍도는 "폐하께서 스스로 큰 산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라 답하였다. [8] 다만 풍도의 충고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니라서, 조광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뻔 했다. [9] 다만 상술한 설거정의 평가가 있기는 해도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지는 않아서 일반적으로 무척 좋았던 듯 하다. [10] 심지어 뻔뻔한 인간이라고 신오대사에서 대대적으로 디스한 구양수조차도 풍도의 말발로 요나라 황제로부터 백성들 목숨을 구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11] 심지어 저 평가가 나온 책이 이탁오의 저서인 장서인데 그 장서에서는 무려 맹자의 '백성을 귀함으로 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을 가벼움으로 한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란 말을 인용하여 저렇게 평가한 것이다. 유학의 주류적인 사상으로도 충분히 풍도의 행위를 옹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탁오의 자체는 유학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는 했어도 이탁오 자체가 '심지어 니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맹자도 저랬는데 니들이 왜 저래?' 란 식의 화법을 많이 쓰는 사람이다. [12] 석경당이 재물을 내렸을 때 '신은 부모가 전란 중에 일찍 돌아가시어 제 생일도 잊고 사는 처지입니다.' 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13] 구양수가 편협한 인물은 아니지만, 신오대사 자체가 화이론적인 시각이 굉장히 강하게 반영된 사서임을 감안해야 한다. 애초에 그러한 의도로 쓰여졌으니 이민족 지배자들에게 수시로 영합하는 태도를 보인 풍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할 리 만무하다. [14] 설거정은 912년생으로 이종가가 통치하던 후당 시기에 과거에 합격하고 출사한 사람이니 풍도를 가까운 곳에서 관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대체로 풍도의 평이 좋기는 했지만 확실히 유학자들에게서 지조가 없는 좋지 않은 인간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던 모양이다. 다만 이 설거정도 여러 왕조에서 벼슬을 지냈다. [15] 풍도가 말년에 스스로 장락노(長樂老)라는 를 만들어 칭한 것을 말한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이 장락노라는 명칭은 뽐내려는 뜻에서 지은 게 아니라 가문의 원적(본적)인 장락군(長樂郡)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토록 의혹을 사기 쉬운 별명을 본인 스스로 붙인 건 사실이다. [16] 다만 이탁오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난세였기에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했고, 후세에 그를 어설프게 흉내내며 절개 없이 행동해놓고 그를 핑계로 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28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28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