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16:29:20

폴 인스

폴 인스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리버풀 FC 주장
존 반스
(1996~1997)
폴 인스
(1997~1999)
제이미 레드냅
(1999~2001)
}}} ||
폴 인스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92-93 · 1993-94 · 1994-95
}}} ||
잉글랜드의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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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폴 인스
Paul Ince
본명 폴 에머슨 칼라일 인스
Paul Emerson Carlyle Ince
출생 1967년 10월 21일 ([age(1967-10-21)]세)
잉글랜드 런던 일포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직업 축구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82~1986 / 유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86~198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9~199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5~1997)
리버풀 FC (1997~1999)
미들즈브러 FC (1999~2002)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2002~2006)
스윈던 타운 FC (2006)
매클즈필드 타운 FC (2007)
감독 매클즈필드 타운 FC (2006~2007)
밀턴 킨스 돈스 FC (2007~2008)
블랙번 로버스 FC (2008)
밀턴 킨스 돈스 FC (2009~2010)
노츠 카운티 FC (2010~2011)
블랙풀 FC (2013~2014)
레딩 FC (2022 / 감독 대행)[1]
레딩 FC (2022~2023)
국가대표 파일: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53경기 2골 ( 잉글랜드 / 1992~2000)
가족 아들 톰 인스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동료들을 사로잡았고 국가대표로서도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잉글랜드의 심장"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 그의 활약은 레전드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곧바로 감독 경력을 시작했는데, 밀턴킨스 던스 FC에서는 괜찮았지만 그 후로는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2021/2022 시즌 레딩 FC의 임시 감독[2]으로 정말 오랜만에 감독직에 복귀했고, 승점 삭감 등으로 인해 강등권까지 추락한 레딩을 잔류 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즌 후엔 레딩 FC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본격적인 감독 복귀가 성사되었다.

2. 클럽 경력

2.1.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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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는 어린 시절부터 웨스트햄을 응원했고 15살에 웨스트햄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이후 인스는 1986년까지 웨스트햄 유스팀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고 1986년 11월 30일 뉴캐슬과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7-88 시즌에 주전 선수가 되었고 지구력, 체력, 태클, 그리고 패스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강력한 슛을 무기 삼아 중거리 슛을 간간히 꽂아넣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대활약을 했지만 웨스트햄은 정작 성적이 좋지 못했다. 1987년엔 리그 15위, 1988년엔 16위를 기록한 웨스트햄은 이후에도 별다른 성적 향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1988-89 시즌, 웨스트햄은 기어이 강등되고 말았다. 이에 인스는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마침 그를 주의깊게 지켜보던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그를 전격 영입했다.

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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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는 1989년 여름 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맨유에 입단했다. 그때 인스는 맨유 입단이 확정되기도 전에 데일리 익스프레스 소속 기자에게 맨유 응원 문구가 새겨진 키트를 목에 매고 있는 사진을 찍혔고, 웨스트햄 팬들은 그후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인스는 메디컬 테스트에서 떨어져서 이적이 중단되었지만 1989년 9월 14일에 재검진을 한 끝에 무사히 통과돼서 맨유에 입단할 수 있었다.

훗날 인스는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복잡한 이적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퍼거슨과 이야기를 나눴고 딜은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다. 나는 휴가를 떠났고 내 에인전트는 딜이 완료되었을 때 맨유 셔츠를 입고 사진 찍는 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사진을 찍기로 했고 그 사진은 계약이 공식 발표되었을 때 알려지기로 되어 있었다. 데일리 스타의 로렌스 루터가 사진을 찍었고 사진집에 그것을 잡았다. 얼마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웨스트햄에서 뛰고 있는 내 사진들을 살피다가 맨유 셔츠를 입은 사진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를 공개했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나는 휴가에서 돌아왔고 웨스트햄 팬들이 분노한 걸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애송이일 뿐이었고 내 에인전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맨유에 입단한 인스는 밀월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팀은 5:1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는 브라이언 롭슨, 닐 웹과 함께 강력한 미들진을 형성했다. 비록 브라이언 롭슨은 첫 시즌에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빠졌지만, 인스는 닐 웹과 함께 맨유의 중원을 책임졌고 1990-91 시즌엔 부상에서 복귀한 롭슨과 함께 맨유를 지탱했다. 인스는 맨유 입단 첫 해에 크리스탈 팰리스를 1:0으로 격파하고 FA컵 우승을 거머쥐는데 큰 공을 세워 이 경기의 MOM에 선정되었다.

이후 인스는 4년간 맨유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마이크 팰란, 닐 웹, 그리고 대런 퍼거슨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91년 유로파 위너스 컵에서 바르셀로나를 격파하고 우승을 달성했고 1992년엔 리그 컵에서 노팅엄 포레스트를 격파하고 맨유 입단 이래 세번째 우승 컵을 확보했다. 그리고 1992-93 시즌, 인스는 EPL로 개편된 리그에서 마크 휴즈,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라이언 긱스 등과 함께 맨유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고 맨유는 이들의 활약을 앞세워 마침내 고대하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인스는 1993-94 시즌에서도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고 팀이 리그와 FA컵을 우승하여 더블을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듯 팀에게 절대적인 공헌을 하던 인스는 1995년 6월 느닷없이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다. 이 이적은 맨유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퍼거슨은 그를 왜 내보냈냐는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퍼거슨이 그를 처분한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스는 맨유에서 6년간 활약하면서 동료들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사로잡았다. 심지어 몇몇 선수들은 그를 "총독"이라고 불렀고 "폴 인스는 우리의 총독이다"라는 문구를 새긴 컵을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퍼거슨은 그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형성되어 두고두고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점차 벤치에 박아두고 폴 스콜스 등을 기용했다. 그러자 자신을 홀대한 퍼거슨에게 폴 인스는 격노했다.

1995년 어느날 감독실에 들이닥쳐서 퍼거슨 감독을 향해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을 했다는 설이 있다. 허나 퍼거슨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를 밖으로 도로 내보냈고 결국 인스는 인터 밀란으로 쫓겨나듯 이적해야 했는데, 퍼거슨은 그가 권총으로 협박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십여 년이 흐른 뒤에 팀 동료였던 스티브 브루스가 이 일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얘기는 루머가 많아서인지 출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다. 총기가 정확히 권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정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그래도 이후 퍼거슨과 대화도 나누고 존경심도 표하는거 보면 관계를 회복하긴 한 것으로 보여진다.

2.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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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폴 인스는 7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인터 밀란에 입단했다.

인터 밀란은 1995-96 시즌에 7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지만 인스는 모든 경기에 출장하여 좋은 경기력을 꾸준히 보여줘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듬 해, 인스는 24경기 6골을 기록하며 인터 밀란이 리그 3위를 기록하는 데 일조했고 팀을 유로파 결승으로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인터 밀란은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원정에서 1:0으로 지고 홈에서 1:0으로 이긴 뒤 승부차기에서 4:1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인스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2.4. 리버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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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는 이탈리아에서 2년을 보낸 후 아들인 톰 인스[3]의 교육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는 4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맨유 출신으로썬 충격적이게도 리버풀에 입단했다.

이 일은 세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맨유에서 레전드였던 그가 맨유의 최대 라이벌 리버풀로 이적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첼시의 레전드였던 그레이엄 르 소의 자서전에 따르면, 인스는 리버풀과 첼시와의 경기에서 르 소가 게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게이라고 조롱하고 르 소의 반응을 보고 즐거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리버풀에서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당시 리버풀은 팀 기강이 문란했고 선수들이 머리 스타일에 신경쓰느라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아 당시 영국에서 대인기였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빗대어 "스파이스 보이스"라는 조롱을 받고 있었다. 이런 지경이니 성적이 제대로 날올리 없었고 인스는 첫 시즌에서 아무런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다.

인스는 두 번째 시즌인 1998-99 시즌에서도 단 한 개의 트로피도 획득하지 못했고 리버풀은 7위에 그쳐 유로파 진출도 좌절되었다. 다만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훌륭한 경기를 펼쳐서 승리를 이끌어내 자신을 쫓아낸 맨유에게 복수한 것에서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래봤자 맨유는 이 시즌에 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하며 트레블을 이룩했으니 이 패배는 맨유에게 큰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못했다.

2.5. 미들즈브러 FC

1999년 여름, 리버풀의 신임 감독 제라르 울리에는 31세에 접어든 인스를 1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미들즈브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적 직후 미들즈브러의 주장이 되었고 3년 간 106 경기를 뛰어서 9골을 기록했다.

2002년, 인스는 계약이 만료되자 팀을 떠나 울버햄튼 원더러스 FC으로 이적했다.

2.6.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인스는 2002년 여름 챔피언십 소속인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로 이적했다.

그는 첫 시즌에 팀을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른 끝에 승격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울버햄튼은 다음 시즌에 바로 강등되고 말았다. 인스는 2004-05 시즌이 끝난 뒤 은퇴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그는 글렌 호들이 울버햄튼의 감독으로 부임하자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 울브스에서 뛰기로 결심했다. 울브스는 2005-06 시즌을 9위로 마감했고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은 좌절되었다.

2006년 4월, 그는 울브스를 위해 좀더 헌신하고 싶다며 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6년 7월 호들이 사임한 후 울브스에 부임한 믹 매카시는 인스와 새로운 계약을 채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팀을 떠난 인스는 선수 생활을 접고 2006년에 잠시 스윈든 타운의 선수 겸 감독 직을 맡은 후 2006년 10월에 메이클즈필드 타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참고로 울버햄튼 시절엔 설기현과 함께 뛰기도 했다. 밀월 원정에서 설기현을 향한 훌리건들의 인종차별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고, 울버햄턴을 찾은 서형욱에게 설기현에 대해 칭찬하였다고 한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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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는 1992년 9월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잉글랜드는 1:0으로 졌지만 인스는 그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 감독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1994 월드컵 지역 예선전인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 2번째 출장을 했지만 여기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1:1 무승부를 거뒀다. 게다가 인스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고 결국 그는 잉글랜드가 1994년 미국 월드컵 진출을 실패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4] 하지만 인스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월드컵 후 미국 투어를 갔을 때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흑인 주장이 되어 인종평등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인스는 UEFA 유로 1996 진출을 위한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자신만의 탁월한 볼 컨트롤 능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잉글랜드는 유로 지역 예선 첫번째 상대인 스위스와 1:1 무승부를 거뒀지만 뒤이어 스코틀랜드를 2:0으로 제압했고 네덜란드를 연이어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후 유로 본선에 진출한 잉글랜드는 스페인 등을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다. 인스는 4강전 상대인 독일과의 일전을 앞두고 폴 개스코인, 데이비드 플랫과 함께 3미들의 일원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독일과 1:1 무승부를 거뒀지만 승부차기에서 패하고 결승전 진출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잉글랜드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글렌 호들은 인스를 중용[5]했고 인스는 1998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6경기에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첫 4경기를 승리했지만 이탈리아에게 1:0으로 패했다. 이후 몰도바와의 원정 경기에서, 인스는 경기 도중 스타디움의 벽을 타고 올라가려고 해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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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인스는 1997년 5월 폴란드와의 경기를 맞이했는데, 이 경기가 그의 30번째 국가대표 출장이었다. 이날 잉글랜드는 2:0으로 승리했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여정을 순탄하게 이어갔다. 이후 잉글랜드는 몰도바를 격파하고 이탈리아와 0:0 무승부를 거두어 마침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인스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스쿼드에 포함되었고 잉글랜드는 조별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때 인스는 승부차기의 2번 키커로 나섰는데 형편없이 차는 바람에 실패하고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후 몰타와의 친선경기에서 교체 출전하여 그의 50번째 국가대표 출장을 달성했고 팀은 승리를 거두어 인스를 기쁘게 했다. 이후 인스는 UEFA 유로 2000에서 본선 3경기에 모두 출장했고 특히 마지막 경기 루마니아전에서는 본인이 직접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등 활약했으나 정작 팀은 2대 3으로 역전패. 결국 잉글랜드는 1승 2패[6]로 조별리그에서 허망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대회가 끝난 후 인스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4. 감독 경력

4.1. 매클즈필드 타운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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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3일, 인스는 매클즈필드 타운의 선수 겸 코치로서 부임했다.

하지만 FA는 그가 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한 이적 시장이 새로 열리는 1월까지 메이클즈필드 타운으로 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결국 인스는 1월이 될 때까지 팀에 부임하지 못하다가 2007년 1월 당시 4부리그에서 꼴지를 찍고 있던 팀에 전격 부임했다. 그는 팀을 곧바로 소생시켜서 채스터 시티를 상대로 3:0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에도 성적을 끌어올려서 시즌 마지막 날에 극적으로 강등권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스는 2007년 5월 5일 메이클즈필드의 홈구장에서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출장했고 팀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4.2. MK 던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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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인스는 MK 던스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던스는 2007년 9월 1위로 치고 올라갔고 많은 팀들이 그를 감독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 팀인 위건 애슬레틱 FC, 더비 카운티 FC와 챔피언십 팀인 노리치 시티 FC가 그를 감독으로 데려오고 싶어한다는 루머가 파다했다.

하지만 인스는 이 루머들을 모조리 부인하고 던스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스는 2007년 10월과 12월에 4부리그 이 달의 감독 상을 수상했고 2008년 4월에 다시 한번 이 달의 감독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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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스는 2008년 3월 31일 그림비 타운을 2:0으로 제압하고 4월엔 스토크포드 카운티를 3:2로 제압하며 승격을 확정지었으며 뒤이어 브래드포드 시티를 2:1로 제압, 마침내 4부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잘 나가는 신예 감독이었고 많은 이들은 이 영국 축구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4.3. 블랙번 로버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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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2일, 인스는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로서 인스는 EPL 역사상 최초의 영국 출신 흑인 감독이 되었다.[7] 그는 에버튼 FC와의 첫번째 경기에서 데이비드 던, 로케 산타 크루즈 등의 골을 앞세워 3:2 승리를 거두었다.이후 인스는 2008년 여름 폴 로빈슨 골키퍼를 영입하고 뒤이어 대니 심슨을 임대로 영입했으며 로비 파울러, 마크 번, 키스 앤드류스 등을 대거 영입했다.

그러나 이후 블랙번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블랙번은 17경기에서 겨우 3승만 기록하고 19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2008년 12월, 인스는 전격 해고되고 말았다. 그는 블랙번에서 고작 177일만 있었는데, 이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짧은 임기였다. 특히 2008년 12월 3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5:3 패배를 당한 뒤 팬들에게 "너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모를 거다", "우리는 인스가 꺼지질 바란다"라는 야유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그가 이토록 참혹하게 실패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능력 부족에 있었다. 인스는 선수 장악력이 형편없어서 선수들에게 경원시되기 일쑤였고 전술을 짜는 것도 형편없었다. 아니, 전술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때 인스의 전술 노트에는 단 다섯 글자, "Shoot"만 적혀 있었다고 한다.

4.4. MK 던스 2기

인스는 2009년 7월 3일 MK 돈스와 2년 계약을 체결하고 다시 던스로 복귀했다. 하지만 인스는 던스에서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리그 13위라는 불만족스러운 성적을 냈다.

2010년 4월, 인스는 2009-10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4.5. 노츠 카운티 FC

인스는 2010년 10월 28일 4부리그 팀인 노츠 카운티와 3년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인스는 그곳에서도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결국 인스는 2011년 4월 3일 올드햄 아슬래틱에게 2:0으로 패함으로서 9연속 패배를 기록한 직후 상호 동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4.6. 블랙풀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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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8일, 2부리그 팀인 블랙풀은 인스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아들 톰 인스를 팀에 소속시켰고 2012-13 시즌을 무사히 마무리지었다. 이후 블랙풀은 2013-14 시즌을 순탄하게 시작했다. 그들은 첫 6경기에서 5승 1무를 기록하여 승점 16점을 획득했다.

그러나 본머스와의 경기에서, 인스는 상대편 선수와 터널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바람에 5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별도로 4000파운드의 벌금을 내야 했다. 이후 블랙풀은 급속도로 침체되었고 2013년 11월 30일 이후 2014년 1월 21일까지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는 졸전을 펼치고 말았다. 결국 인스는 블랙풀에서 42경기 동안 단 12승만 거두었고 2014년 1월 21일 경질되고 말았다.

참고로 그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4번째로 조기 경질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4.7. 레딩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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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레딩의 벨리코 파우노비치 감독이 구단과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자 마이클 길크스와 함께 레딩의 공동 임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공교롭게도 폴 인스의 아들인 톰 인스도 레딩 소속으로 있어서 재밌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감독 복귀라서 처음 선임할땐 임시감독 이라지만 레딩이 무리수를 뒀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기대이상으로 선수단을 잘 추스린 폴 인스는 비록 레딩의 경기력이 들쭉날쭉 했지만, 정말 중요한 막판에 결정적인 승점들을 따내는 데 성공하면서 팀의 강등권 탈출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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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을 인정받아 시즌 종료 후 5월 17일자로 레딩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무려 리그 1위도 달성하는 등 매우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2023년 들어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수의 부상자들이 나온것도 문제였지만, 폴 인스의 전술이 시즌 초반과 다르게 고착화 되기 시작하면서 이내 한계를 나타냈고, 2023년 들어선 1승을 따내기도 매우 힘든 경기력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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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9일, FA컵 32강에서 선수시절 친정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만났으나 1-3으로 패배했다.

결국 2023년 4월 11일, 최근 8경기에서 무승을 거두는 등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

폴 인스와 같이 팀에 합류했었던 수석 코치 알렉스 레이도 같이 팀을 떠났다.

인스의 레딩 감독 시절을 요약하면 선수단을 잘 추스리고 역습 찬스를 잘 살리는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했으나, 시즌이 진행 될 수록 전술적 한계가 명확했고 상대팀이 파훼법을 들고나오면 이에 따른 대처가 전혀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한계를 나타냈다.

무엇보다, 감독 경질 직전에는 세계적인 감독들을 언급하면서 어느 감독이 와도 지금의 레딩을 살리기 힘들다면서 자기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기어이 선수들 탓도 하면서 마지막엔 철저히 팀 분위기까지 깨뜨리는 등 좋지 못하게 팀을 떠났다.

정말 오랜만에 감독 복귀 였지만, 장점과 단점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불명예스럽게 퇴장했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 챔피언십 이달의 감독: 2013년 8월

[1] 마이클 길크스와 공동 임시 감독 [2] 마이클 길크스와 공동 감독 [3] 훗날 아버지 처럼 축구 선수가 된다 [4] 참고로 마지막 경기인 산마리노전에서 경기 시작 8초 만에 실점하고 얼타던 팀을 동점골 한 방으로 휘어잡았다. 또한 이 골은 본인의 첫 A매치 득점이었다. [5] 훗날엔 울버햄튼에서 제회했는데, 인스가 울버햄튼에 더 헌신할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을정도로 인연이 깊다 [6] 이미 첫 경기인 포르투갈전에서 2대 0으로 앞서다가 내리 세 골을 먹으며 역전패하는 등 총체적인 난국을 보이고 있었다. 그 후 2차전인 독일전을 이겼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의 독일 역시 1승도 못하고 탈락할 정도로 비실거리는 팀이었다. [7] 인스보다 먼저 EPL에서 활동했던 흑인 감독은 2000년에 풀럼 FC를 감독했던 장 티가나, 그리고 1996년에 첼시 FC 감독을 했던 루드 굴리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