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BC401~BC310) 약 2500년전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발해군(현 하북성과 산동성) 출신의 명의. 후대에도 동양권에서는 화타와 더불어 최고의 명의로 칭송받는 인물.편작심서에 따르면 황제태을신명론을 전수하고 오색맥진, 삼세병원 등을 저술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후세에 순우의, 화타 등이 전수받았다고 한다. 또한 삼세편작이라고 해서 오리지널 편작 이외에 두 사람인 진월인, 두재를 편작이라 했는데, 편작심서는 두재의 저작이기에 두재가 편작을 자칭한 것이다.
의술이 뛰어났기에 명의의 상징으로 남아 후세 사람들이 뛰어난 명의에 대해서 편작으로 비유했다. 병이 위중한 상태를 가리켜 "편작이 여럿 와도 못 고친다."라는 비유를 할 정도. 때로는 명의를 넘어 신의(神醫)로 칭송된다.
2. 일화
편작의 연로한 부친은 천식[1]으로 무척 고생했는데 천하의 명의로 이름난 편작이 그까짓 천식 하나 못 고친다는게 말이 되냐며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의술을 자랑할 요량으로 처방을 주어 단번에 완치시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편작이 펄펄 뛰며 제자들에게 "이제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라고 나무랐다. 이유인 즉슨 천식 따위야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나 명의를 아들로 둔 아버지가 건강해진다면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여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결국은 큰 병을 앓을 것이니 일부러 천식을 치료하지 않아 아버지가 매사에 조심하기를 바란 것인데 제자들이 그것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예견대로 편작의 부친은 천식이 낫자마자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다가 얼마 안 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2]편작은 삼형제의 막내였는데, 위의 두 형도 의사였다. 그리고 그들은 동생을 능가하는 엄청난 의술을 가졌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변에 물어보면 편작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날 황제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편작에게 그의 두 형과 편작의 의술을 비교하면 어떠하냐고 물어보니, 의술로는 맏형이 제일 으뜸가며 그 뒤를 작은 형이 잇고 자신은 가장 못하다고 대답했다. 다시 궁금해진 황제는 형들의 의술이 그리 뛰어나다면 어째서 편작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졌느냐 묻자 편작은 이렇게 답했다.
"제 맏형님은 환자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표정과 음색으로 이미 그 환자에게 닥쳐올 큰 병을 알고 미리 치료하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가 자신의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또한 둘째 형님은 큰형님보다 못하긴 하셔도 병이 나타나는 초기에 치료하므로 그대로 두었으면 목숨을 앗아갈 큰 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들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 탓에 제 형님들은 가벼운 병이나 고치는 시시한 의사로 평가 받아 그 이름이 고을 하나를 넘지 못하지만, 저는 이미 병이 크게 될 때까지는 알지 못해 중병을 앓는 환자들을 법석을 떨며 치료하니 제 명성만 널리 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편작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악화된 질병의 치료보다 예방과 초기 치료가 중요함을 나타내는 일화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일화라고 볼 수 있다. 자각증상이 없는 암은 초기 진단이 힘들고 뒤늦게 진단되고 나면 그때는 대개 이미 늦어 치료가 매우 힘들다. 또 감기가 폐렴이 되는 경우에서 보듯, 가벼운 병이라 해도 방치하여 악화되면 최악의 경우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
3. 기타
춘추시대 때 명의인 진월인이 뛰어난 의술을 보이면서 편작의 화신이라 불렸으며, 이로 인해 편작을 지칭하는 것이 삼황오제 때의 명의가 아닌 춘추시대 때의 진월인을 뜻하게 되었다.삼국지 시대의 화타도 명의의 대명사로 많이 쓰인다. 한국의 경우 삼국지의 인기로 화타 쪽이 더 유명하다보니 명의를 화타로 비유하는 경우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