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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black> 펑후해전/팽호해전 澎湖海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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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683년 7월 10일~16일 ( 강희제) | |
장소 | 펑후현 | |
원인 | 청나라와 동녕국의 최후 결전 | |
교전국 | 청나라 | 동녕국 |
지휘관 | 시랑(施琅) | 유국헌(劉國軒) |
병력 |
병사 24,000명 함선 약 238척[1] |
병사 20,000명 함선 약 240~250척[2] |
피해규모 |
전사 329명 부상 1,800명 |
전사 14,000명 |
결과 | 청나라의 승리 | |
영향 |
동녕국의 멸망 펑후현과 타이완 섬, 청나라 영토로 편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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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씨의 동녕국은 대만 원주민 부족들 간의 전쟁이었던 사록사 전투 이후에도 청나라에 대항해 끊임없이 싸웠으나 대륙에 있었던 영토까지 잃자 유일하게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펑후현에서 청나라 해군과 해전을 벌였다. 결국 이것이 동녕국 최후의 결전이 되고 말았다.2. 상세
정씨 왕조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국은 더이상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어린 정극상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걸며 건설되었던 동녕국은 3대만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래도 청나라는 정성공과 그 후예의 명예를 인정했고 항복 이후 동녕의 정씨 왕족들은 청나라 본토에서 그럭저럭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이후 한족들의 대만 이주가 증가하면서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계속 산악 지대로 밀려났고, 이 과정에서 툰샤오 사 사건, 대갑서사항청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이 대갑서사항청사건으로 인해 다두 왕국 역시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