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및 제1차 세계 대전의 러시아 해군 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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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191919> 어뢰정 | 페르노프 | |||
구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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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정 / 함 | 델핀, 솜급, 카사크타급, 미노가, 아쿨라, 카르프급, 카이만급, 크랍, 모르즈급, 바르스급, 나르발급, A급 | ||||
경순양함 | 알마스급, 스베틀라나급 | ||||
장갑순양함 | 게네랄 아드미랄, 미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드미트리 돈스코이, 아드미랄 나히모프급, 파먀티 아조노바, 로시야, 그로모보이, 바얀급, 류리크 | ||||
방호순양함 | 디아나급( 아브로라함), 바랴그급, 스베틀라나급, 아스콜드, 노빅급, 바가티르급, 이주므루드급 | ||||
군수지원함/구난함 | 콤무나 | ||||
순양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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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
<colbgcolor=#ffffff,#191919> 전드레드노트급 | 예카테리나 2세급, 나바린, 임페라토르 알렉산드르 2세급, 페트로파블로프스크급,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아드미랄 우샤코프급 전함, 체자레비치, 보로디노급, 로스티슬라브, 페레스베트급, 포템킨, 레트비잔, 에프스타피급, 안드레이 페르보즈반니급 | |||
드레드노트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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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амять Азова» |
1. 개요
파먀티 아조노바는 러시아 제국해군의 장갑순양함으로, 동형함은 없다.2. 제원
전장 | 115.6m |
전폭 | 15.6m |
흘수 | 7m |
기준배수량 | 6,734t |
최대출력 | 5,715hp |
최대속력 | 16.8kt |
항속력 | 10kt로 6,100해리 |
무장 |
20.3cm 단장포 2문, 15.2cm 단장포 13문, 47mm 단장포 7문, 3.7cm 5연장기관포 8문, 63.5mm 화포 2문, 38cm 수상어뢰발사관 단장 3문 |
탑재기 수 | 없음 |
승원 | 569명 |
동형함 | 없음 |
3. 배경
1890년대 러시아 해군은 원양진출을 목표로 하여 장갑함보다도 항해성을 중요시한 <대양형 순양함>의 정비에 전력했다. 이전급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 시험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신함은
게네랄 아드미랄급 장갑순양함급과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의 확대개량형으로 설계되었다.
4. 상세
설계는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을 확대개량하는 것이 되어 배수량 6,000톤급의 대형 원양 순양함으로 설계하였다.1885년 10월 12일에 발트 공장에서 설계안이 제출되어 선체는 강철재를 사용했지만 내부구조와 외판은 목재부품이 혼용되었기에 이미 구식화된 설계로 해군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나중에 철제를 덧씌운다는 타협안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이 때문에 추가예산이 편성되어 황태자 전용거주구역을 신설하고 아름다운 함체보호를 위해 증기엔진으로 항해시엔 특별제작한 텐트를 우천시를 제외하고는 늘 펼쳐서 석탄재가 함내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리고 내부순환용으로 전동식 환기팬과 영국에서 구입한 700개의 백열전구를 밝힐 축전지를 장착했다. 800톤에 달하는 과적으로 부담경감을 위해 보급품과 기뢰 등은 다른 증기선을 동반하여 이용했다. 게다가 함재 수뢰정을 위해 증기동력식 기중기도 추가되었다. 당시 기중기는 수동식이었는데 증기식 동력기의 채용은 새로운 기술도입이기도 했다. 그리고 포문의 유리창 설치도 이루어져 78,000 루블이 더 소요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터졌다. 황태자 일행은 4월 27일에 고베 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열차편으로 쿄토로 향했다. 4월 29일에는 환영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직접 비와호 관광에 동행하여 만찬과 접대를 했다. 그 후 교토로 이동하던 니콜라이 황태자는 갑자기 뛰어든 경호원 쓰다 산조 순사가 휘두른 칼에 머리를 부상당했다.
이후 1892년에 블라디보스톡에 머문 <파먀티 아조노바>는 10월 16일에 크론슈타트로 돌아와 개장공사 후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었다. 1894년에 다시 극동으로 이동하여 1900년 초까지 현지에서 활동한 <파먀티 아조노바>는 다시 발트함대로 이동하여 수리도중 러일전쟁을 맞이하여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