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1:05:28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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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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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 티아레

1. 개요2. 역사 : 타헤르트
2.1.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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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تاهرت / تيارت
영어 Tiaret / Tahert

알제리 중북부 티아레트 주의 주도. 수도 알제에서 서남쪽으로 250여 km, 마스카라에서 동쪽으로 90km, 츨레프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20만명이며, 중세 루스탐 왕조의 수도 타헤르트로 알려져 있다. 베르베르어로 타헤르트는 암사자를 뜻하며, 숫사자를 뜻하는 오랑과 대비된다. 해발 1000m의 고개에 위치한 도시는 8-10세기 중부 마그레브의 주요 거점이었다. 다만 10세기 이후 쇠퇴하여 기존 도시는 버려졌고, 19세기 프랑스령 알제리 시기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도심은 순환도로로 둘러져 있는데, 점차 시가지가 확장되며 그를 포괄하기 위한 새 순환도로와 라구아트와의 고속도로가 건설 중이다. 시내 서남쪽에는 이븐 칼둔 대학교가 있고, 동쪽 10km 지점에 압델하피드 부수프 공항이 있다.

2. 역사 : 타헤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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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레 남쪽 40km 지점의 제다르 (5-6세기 베르베르 무덤)

로마 시대 틴가르티아 요새가 있었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한 베르베르 인들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무어-로마 왕국을 세우고 제다르라 불리는 영묘를 남겼다. 7세기 말엽 이슬람 정복으로 틴가르티아는 폐허가 되었고, 761년 압바스 왕조의 토벌로 튀니지에서 축출된 이바디파 베르베르 인들이 건설한 루스탐 왕조의 수도가 되어 재건되었다. 다만 당시의 타헤르트는 현재 도시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테그뎀트에 있었다. 관용적이었던 루스탐 왕조의 치하에서 타헤르트는 무타질라파 등 다양한 사상들이 허용되었고, 후일 페스 궁정의 의사가 되는 주다 이븐 쿠라이쉬 등 유대인들도 다수 거주하였다. 동시에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 무역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였다.

909년 파티마 왕조에 의해 타헤르트가 함락되고 루스탐 왕조가 멸망하자 일대는 여러 부족들의 쟁탈전에 시달렸다. 파괴와 혼란의 시기에 이바디파 주민들은 더 내륙인 와르글라 등지로 피신하였다. 그러던 911년 모로코의 마그라와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카자르가 타헤르트를 점령하였다. 같은해 파티마 조는 미크나사 부족의 마살라 이븐 합부스를 지원하여 타헤르트를 재점령하고 후자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924년 마그라와 부족이 재차 타헤르트를 점령하고 마살라를 전사시키자 파티마 왕자 알 카임이 개입해 일대를 수복하였다. 다만 타헤르트가 마그라와 부족의 세력권과 가깝다고 여긴 그는 동쪽으로 400여 km 떨어진 음실라로 알제리 총독부를 옮겼다. (927년) 타헤르트는 마살라의 동생과 조카에게 맡겨졌고, 이라크 출신 카와리지 인들이 유입되었다. 다만 현재 타헤르트의 중요성은 이미 음실라와 아키르 등지로 옮겨간 후였다.

2.1.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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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헤르트 유적

중세 지리 왕조 함마드 왕조 시기를 거치며 알제리 서부는 동부에 비해 등한시되었고, 특히 내륙 지역은 더욱 방치되었다. 자얀 왕조, 오스만 제국기에 작은 마을이던 타헤르트는 19세기 들어 알제리 저항군을 이끈 압델카데르의 주요 거점이 되며 역사에 재등장한다. 하지만 1843년 프랑스 군에게 점령된다. 그리고 1845년 프랑스 당국이 기존 타헤르트 동쪽에 새 도시를 건설한 것이 현 티아레의 기원이다. 1889년 모스타가넴과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하며 많은 유럽인들이 정착하였다. 다만 알제리 독립 전쟁 도중 유혈 충돌이 발생하며 대부분 떠났고, 철도 역시 파괴되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중 한명인 아흐메드 카이드가 이곳 출신이다. 1997년 무장 조직에 의해 120여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