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1:25:14

토미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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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스미스의 역임 직책
{{{#!folding ▼
리버풀 FC 주장
론 예이츠
(1961~1970)
토미 스미스
(1970~1973)
엠린 휴즈
(1973~1979)
}}}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잉글랜드의 축구인
파일:liverpool-footballer-tommy-smith-august-1967-21426344.jpg.webp
토미 스미스
Tommy Smith
본명 토마스 스미스, MBE
Thomas Smith, MBE
출생 1945년 9월 25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사망 2019년 4월 12일 (향년 74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크로스비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 체중 79kg
직업 축구선수 ( 센터백, 라이트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유스 리버풀 FC (1960~1962)
프로 리버풀 FC (1962~1978)
→ 탬파베이 라우디스 (1976 / 임대)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 (1978)
스완지 시티 AFC (1978~1979)
감독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 (1978)
국가대표 1경기 ( 잉글랜드 / 1971)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서훈
5. 여담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축구인.

2. 선수 경력

스미스는 리버풀에서 태어나 평생을 리버풀 서포터로 살았으며, 처음에는 중앙 공격수로 뛰며 빌 샹클리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클럽 리저브팀에 합류했다. 당시 리저브팀의 4단계 연령별 팀 중 2개 팀을 건너뛰고 스미스는 곧바로 최상위 연령 팀에서 뛰게 되었을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1961-62 시즌 프리시즌에 스미스는 당대 핵심 중앙 수비수였던 론 예이츠를 상대로 헤딩슛을 성공시키며 훈련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이후 1962년 여름, 주급 18파운드의 프로계약을 맺었다.

1963년 5월 8일 버밍엄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부상당한 지미 멜리아를 대신해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1962-63 시즌 남은 기간 동안 더 이상 출전하지 못했고, 1963-64 시즌 1부 리그 우승 시즌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1964년 8월 29일, 이우드 파크에서 열린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두 번째 출장에 성공하여 리버풀 소속으로 첫 득점까지 올렸다. 스미스는 이후 다음 경기에도 자리를 지켰고, 리버풀이 리즈 유나이티드를 2-1로 꺾은 경기에서 다시 득점에 성공했다. 스미스는 이후 두 차례 더 출전한 뒤에 리저브로 복귀했지만, 유러피언컵 RSC 안데를레흐트전에 다시 출장하여 3-0 승리에 기여한 후 완전히 1군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스미스는 리그 25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1964-65 시즌을 마감했으며, 대부분 오른쪽 수비수로 출장했다. 또한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스톡포트 카운티, 볼턴 원더러스, 레스터 시티, 첼시를 꺾고 1965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결승전에도 진출하는 등 리버풀의 해당 시즌 FA컵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해당 경기에서 리버풀은 2-1로 승리했고, 스미스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1965년 스미스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 채리티 쉴드 경기에 출전하여 2-2 무승부를 거두며 공동 우승에 기여했다. 이어진 1965-66 시즌에서도 스미스는 계속해서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주전으로 단단한 모습을 보였고, 팀이 리즈 유나이티드를 제치고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데 기여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단 34골만을 허용하며 최소 실점 팀에 올랐다.

이후 계속해서 팀의 주장으로 좋은 시간을 보낸 스미스는 클럽 주장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그는 1971년 FA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이끌고 연장전 끝에 아스날에 2-1로 석패했으나, 1972-73 시즌에 스미스가 이끄는 리버풀은 아스날을 승점 3점 차로 제치고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해당 시즌 리버풀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UEFA컵 결승전에서 합계 3-2로 꺾고 더블을 달성했다.

그러나 1973년 11월, 스미스는 샹클리에게 팀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후, 엠린 휴즈에게 주장직을 빼앗기는 큰 불명예를 얻었다. 이 사건으로 스미스는 리버풀을 떠날 뻔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스쿼드로 복귀한 후, 그는 자신이 선호하던 중앙 수비수 자리를 잃고 풀백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미스는 결국 샹클리와의 불화를 해결했지만, 스미스와 휴즈 사이에 새로운 불화가 발생하여 리버풀 선수단 내에선 긴장감이 감돌았다.[1]

스미스는 주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펼쳐 1974년 리버풀이 웸블리 결승전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3-0으로 완파하며 FA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해당 경기 스미스는 특히 케빈 키건과 놀라운 팀 골을 만들어 내며 기념비적인 순간을 남겼다.

황혼기가 다가옴에 따라, 리버풀 커리어 말년에 그는 출장 횟수가 점점 줄어갔고, 필 톰슨과 필 닐이 각각 중앙 수비수와 풀백 위치에서 혜성처럼 등장하며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1976년 리버풀이 리그와 UEFA컵 더블을 또다시 이룩하는 과정에서 스미스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해당 시즌 리그에 24번 출전했고, UEFA 결승전에서 레프트백 역할을 맡았다.

이후 스미스는 출장 기회를 위해 1976년 여름 미국 탬파베이 로디스로 임대를 떠나 경기를 뛰었고, 트레이드 마크인 강인함을 토대로 '더 탱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리버풀로 돌아와서는 경쟁력을 잃어 1976-77 시즌 팀 스쿼드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해당 시즌 3월, 리버풀이 뉴캐슬을 상대로 1-0으로 승리한 후 톰슨이 부상을 당하여 수비진에 예상치 못한 공백이 발생하자 스미스는 다시 스쿼드로 복귀했고 팀이 리그 우승을 지키는 데에 기여했다.

이후 스미스는 1977년 FA컵 결승전에까지 출전했지만 리버풀은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패해 트레블 기회를 잃었다. 그러나 며칠 후 로마에서 열린 클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미스는 웸블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듯 멋진 경기를 펼치며 옛 UEFA 컵에서도 만났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3-1로 꺾는데 크게 기여했다. 스미스는 스티브 하이웨이가 올린 코너킥을 헤딩으로 연결하며 득점에 성공했고 2-1을 만들었다. 이 골은 그의 시즌 첫 골이자 클럽에서 올린 48번째 득점이었고, 해당 경기의 결승골이었다. 화려한 커리어의 마침표였다.

스미스는 은퇴를 미루기로 결정하고 리버풀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지만, 곡괭이를 발에 떨어뜨려 발가락이 부러지는 불운한 부상을 입어 유러피언컵 2연패 과정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리버풀의 사상 첫 리그컵 결승에 출전했고, 준우승 메달을 받았다.

638경기를 치른 친정팀 리버풀을 떠난 후, 1978년 여름부터는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과 함께 NASL에서 새롭게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선수로 입단했지만 시즌 중반부터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네덜란드의 전설 리누스 미헬스가 후임 감독이 되었다.

스미스는 1979년 스완지 시티로 떠나 경력을 더 이어갔다. 스미스는 이 때 축구 경력으로 쌓은 공로로 MBE를 수여받았다. 스미스의 전 리버풀 팀 동료였던 존 토삭이 당시 스완지의 감독을 맡고 있었고, 스미스는 스완지의 3부 리그 승격을 도왔다. 이후 1979년, 스미스는 장대한 커리어를 종료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안필드를 위협했던 공격수들을 무덤으로 이끌었던, 리버풀 역사상 가장 터프했던 센터백. 강하고, 거칠고, 투쟁적인 수비로 매우 유명했다. 당시 그의 플레이는 흡사 전쟁터의 전사로 묘사되곤 했으며, 서포터로부터 '안필드의 철인'이라 불렸을 정도인데 실제 샹클리는 그를 두고 "토미 스미스는 태어난게 아니라 채석장에서 채석된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스미스는 단순히 수비 뿐 아니라 세트피스, 중거리 슈팅 등으로 심심찮게 결정적인 득점도 해냈으며 특히 1977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도 클러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결승골을 뽑아냈고, 팬들에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론 예이츠와 함께 샹클리의 리버풀에 절대적인 수비력을 불어넣었으며, 예이츠의 후임 주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으며 이후 페이즐리 시절까지 무려 16년을 리버풀 수비에 헌신하는 등 팀에 여러모로 기여한 바가 굉장히 많은 선수였다. 센터백이 주 포지션이었지만 우측 풀백으로도 능숙하게 활약할 수 있는 선수였고, 말년에는 좌측 풀백으로 포지션을 이동하기도 했을 정도로 상당한 유틸리티를 자랑하는 전천후 수비수이기도 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서훈

5. 여담

  • 1979년부터 2014년 8월까지 35년 동안 리버풀 에코에서 주간 칼럼을 썼다.


[1] 고참 선수들은 스미스에게 충성심을 유지했고, 휴즈의 수다스러움이 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2008년 발간된 스미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1972년 5월 8일, 휴즈가 "한 사람당 50파운드 내기로 경기를 치를 의향이 있냐"면서 아스널 선수들과 농담하는 모습을 스미스가 본 후, 휴즈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리버풀은 하이버리에서 열린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더비 카운티가 리그 우승을 가져갔다. 스미스는 휴즈의 말에 역겨워서 다시는 경기장 밖에서 그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며, 스미스와 함께한 유일한 목격자는 이안 캘러한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