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린 휴즈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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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스미스 (1970~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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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린 휴즈 (1973~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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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톰슨 (1979~1981) |
엠린 휴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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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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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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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엠린 휴즈 OBE Emlyn Hughes OB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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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엠린 월터 휴즈 Emlyn Walter Hugh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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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7년 8월 28일 | |
잉글랜드 컴브리아주 바로-인-퍼니스 | ||
사망 | 2004년 11월 9일 (향년 57세) | |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셰필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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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선수(
수비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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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블랙풀 FC (1964~1967) 리버풀 FC (1967~1979)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1979~1981) 로더럼 유나이티드 FC (1981~1983) 헐 시티 AFC (1983) 맨스필드 타운 FC (1983) 스완지 시티 AFC (1983~1984) |
감독 | 로더럼 유나이티드 FC (1981~1983 / 선수 겸 감독) | |
국가대표 | 62경기 1골 ( 잉글랜드 / 1969~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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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엠린 휴즈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다. 그는 데뷔 이후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동했지만 얼마 안가 하프백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센터백, 윙백, 중미 등 수비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는 수비수로서 상대의 공격을 원천 차단했고 측면 공략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으며 골을 넣는 능력도 준수해서 팬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다.[2] 또한 거친 플레이를 서슴없이 하여 미친 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그가 보유한 능력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바로 리더십이었다. 그는 리버풀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선수단을 통제하고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산시켜 목표를 달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리버풀에서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잉글랜드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 클럽 경력
2.1. 블랙풀 시절
휴즈의 아버지 프레드 휴즈는 유명한 럭비 선수였다. 프레드는 아들이 자신처럼 럭비 선수가 되기를 원했고, 휴즈는 이에 따라 기본적인 럭비훈련을 받은 뒤 지역의 럭비 프로팀인 바로우 A.F.C에서 트라이얼을 받았다. 그러나 바로우는 그의 입단을 거부했고, 휴즈는 할 수 없이 축구로 진로를 전환하여 1964년 17살의 나이에 블랙풀에 입단했다. 그는 1964년에 데뷔전을 치렀고 지미 암필드, 앨런 벨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휴즈는 인사이드 포워드로서 활동했지만 플랙풀은 얼마 후 그를 좌측 하프백으로 변경했고 1965-66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하프백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7년 2월, 그는 1966-67 시즌 동안 28경기를 출장하던 중 6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고 리버풀로 이적했다.
2.2. 리버풀 시절
휴즈가 리버풀로 처음 입단했을 때, 당시 리버풀의 감독 빌 샹클리는 휴즈를 친히 차에 태우고 훈련장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경찰이 차를 멈춰세우게 하고는 속도 위반을 했으니 면허증을 제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샹클리는 이렇게 말했다.당신은 내가 차에 태운 사람이 누군지 모르나? 잉글랜드의 주장님이시다!
경찰은 창문을 통해 휴즈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자신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샹클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그래야만 해!
훗날 휴즈는 정말로 잉글랜드의 주장이 된다. 빌 샹클리의 눈썰미가 대단했음을 알게 해주는 일화.
아무튼 휴즈는 1967년 3월 4일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스토크 시티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날 리버풀은 2:1로 승리했다. 이후 휴즈는 1967년 8월 26일 안필드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데뷔 첫 골을 기록했고, 팀은 6:0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휴즈는 뉴캐슬의 윙어 알베르트 바넷을 상대로 럭비에서나 할 만한 위험한 태클을 가했다. 이로 인해 그는 미친 말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리버풀을 싫어하는 팬들로부터 거센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했다.
리버풀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4 시즌 동안 아무런 트로피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휴즈는 이 기간 동안 열정과 투지, 그리고 충성심을 유감없이 보여줬고 샹클리는 그를 매 경기에 출장시키며 애지중지했다. 그러다가 1970년, 리버풀이 FA컵 준결승전에서 2부 리그 팀인 왓포드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자, 샹클리는 위너스컵과 FA컵 우승에 기여했던 나이가 많은 선수들을 배제하고 나이가 어린 선수들을 투입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로서 23세가 채 안 된 휴즈는 나이가 어린 선수들의 리더가 되어 팀의 미래를 이끌게 되었다.
휴즈는 1971년 FA컵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팀은 아스날에게 2:1로 패했다. 이때 휴즈는 준우승을 차지한 팀에게 주어지는 메달을 박살내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1973년, 휴즈는 마침내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위너스컵을 확보했다. 또한 그는 에버튼 원정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팬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을 승리를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토미 스미스가 빌 샹클리가 떠난 뒤 주장직에서 물러나자 그 대신 주장이 되었다. 1973-74 시즌, 휴즈는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을 상대로 탁월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3:0 승리를 이끌어내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휴즈는 팀의 주장으로서 동료들을 잘 이끌어 1976년과 1977년에 리그 2연패를 달성했고 1979년에 다시 한 번 리그를 제패했다. 또한 위너스컵을 1978년에 또다시 우승했고 1977년과 1978년에 유러피언컵을 2번 연속 제패했다.
휴즈는 센터백, 윙백 등 많은 수비 포지션을 소화했지만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는 넒은 활동 범위를 자랑했으며 언제나 심판과 언쟁을 벌이며 트러블메이커로 자리잡았다. 당시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 중 일부는 그가 위대한 선수였다고 주장하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좋은 선수인 건 맞지만 당시 리버풀이 워낙 엄청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그가 대단한 리더십을 가지고 팀을 잘 이끌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에겐 승부조작을 꾀한 혐의가 있다. 2008년, 휴즈 이전 리버풀의 주장이었던 토미 스미스는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1972년 5월 8일, 휴즈가 내게 말했다. "나는 수많은 아스날 선수들에게 말해뒀어. 하이버리(아스날의 홈구장)에서의 경기를 져 준다면 한 사람 당 50파운드씩 주기로 했어."
스미스는 휴즈의 말을 듣고 역겨움을 느꼈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고 밝혔다. 그는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오직 이안 캘러한 뿐이었으며 자신은 휴즈가 정말로 아스날 선수들에게 뇌물을 줬는지, 아니면 짓궂은 농담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밝혔다.
분명한 건 그런 시도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리버풀은 아스날을 이기지 못했고 더비 카운티가 리버풀 대신 1972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스미스는 휴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샹클리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랬다가는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아무튼 휴즈는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3년간 리버풀에서 활동하며 474경기에 출전하여 35골을 기록하며 팀의 호성적에 톡톡히 기여했다. 그러나 1978-79 시즌에 그는 경쟁에서 밀려 단지 16경기에만 출전했고 밥 페이즐리는 그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1979년 8월에 9만 파운드를 받고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이적시켰다.
2.3. 울버햄튼 원더러스 시절
휴즈는 1979년 8월 22일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날 울버햄튼은 1:0으로 승리했다. 또한 1979-80 시즌에 리그컵을 우승했다. 이후 휴즈는 대영제국 훈장 4등급인 OBE를 받았고 "This is Your Life"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울버햄튼에서 2년간 58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고 1981년에 로더햄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2.4. 로더햄 유나이티드 시절(선수 겸 감독)
1981년, 휴즈는 3부리그 클럽인 로더햄 유나이티드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로더햄은 그의 지도하에서 별로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였고 1월엔 강등권에 머물렀다. 다행히 로더햄은 이후 9경기 연속 승리하며 올라갔고 시즌 후반엔 3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막판엔 선수들이 기복을 보였고 결국 팀은 승격권과는 승점 4점이 모자란 7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성적은 당시 로더햄이 1960년대 이래 기록한 가장 높은 순위였다.이듬해, 휴즈는 다시 한번 승격에 도전했고 로더햄은 1983년 1월 1일 경 9위를 기록하며 승격을 향한 꿈을 키웠다. 그러나 로더햄은 그 다음 경기들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거뒀고 결국 승격권과 멀어지고 말았다. 3월 20일, 로더햄 보드진은 감독에서 사임하고 선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휴즈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보드진은 그를 경질했다. 그러나 로더햄은 휴즈 경질 이후 겨우 1경기만 이기는 수모를 겪었고 결국 4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휴즈는 로더햄에서 56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2.5. 말년
휴즈는 로더햄에서 쫓겨난 뒤 1983년 여름 헐 시티로 이적하였고 9경기를 소화했다. 그러다가 시즌 중간에 잠시 맨스필드 타운으로 옮겼지만 단 한 경기도 뛰지 않았고 1983년 12월에 스완지 시티로 이적하여[3] 7경기를 소화했다. 이후 휴즈는 1984년 여름에 은퇴를 선언했다.3. 국가대표 경력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알프 램지는 그가 좌측 윙백과 센터백에 적합하다고 보고 1969년에 그를 대표팀 로스터에 포함시켰다. 램지는 그해 11월 5일 네덜란드와의 친선경기 때 휴즈를 데뷔시켰다. 이날 잉글랜드는 1:0으로 이겼는데, 휴즈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해 소화했다. 그는 1972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대회에서 웨일즈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여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골은 그가 국대에서 기록한 유일한 골이었다.1970년 6월, 영국은 월드컵 디팬딩 챔피언의 자격으로서 멕시코 월드컵에 참여했다. 렘지는 현지 적응을 위해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친성 경기를 갖기로 했다. 이때 휴즈는 이 두 경기 모두 결장했지만 램지는 그를 최종 로스터에 포함시켰다. 이 월드컵에 참여한 영국 선수들 중 리버풀 선수는 휴즈 뿐이었고 가장 어린 선수 또한 휴즈였다. 그러나 휴즈는 이 월드컵에서 단 한경기도 뛰지 못하고 벤치에서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휴즈는 이후 리버풀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197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당당한 주전으로 출전했다. 알프 램지 감독은 그를 좌측 풀백으로 기용하며 굳건한 신임을 보여줬다. 1973년 10월, 잉글랜드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 위한 최종 경기를 웸블리에서 치르게 되었다. 상대는 폴란드였다.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서 이겨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휴즈는 좌측 풀백으로 출전했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폴란드의 골키퍼 얀 토마스제브스키의 환상적인 선방으로 번번히 득점에 실패했다.
그러다가 후반전이 중반에 이를 무렵, 잉글랜드의 센터백 노먼 헌터가 잘못된 볼터치로 상대에게 어이없이 공을 뺏기고 말았고, 폴란드 공격수들 앞에는 휴즈와 피터 실턴 골키퍼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폴란드의 공격수 얀 도메스키는 측면으로 치고 들어간 뒤 슛을 날렸다. 휴즈는 이를 막아보려고 태클을 시도했지만 공은 그의 태클을 벗어났다. 그래도 도메스키의 슛은 약했기에 실턴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피터 실턴이 공을 뒤로 흘리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잉글랜드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문제의 실점 장면. 참고로 피터 실턴은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가장 많은 A매치를 소화한 골키퍼였고 클럽팀에서도 통산 1000여 경기를 출장하며 엄청난 선방 능력을 선보인 대단한 능력자다. 그런 능력자가 저런 실책을 범했으니 당시 잉글랜드 팬들이 받았을 충격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잉글랜드는 승리에 실패했고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었다. 알프 램지감독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실턴이 실수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휴즈 또한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비록 다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잉글랜드 선수들이 빠르게 복귀하고 있었으니 섣불리 태클하지 말고 도메스키에게 접근하여 그가 슛을 쏘지 못하게 방해하며 시간을 끌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휴즈는 대표팀에서 계속 중용되었다. 그러나 1976년 유로 대회 지역 예선에서 2경기를 치른 후, 돈 레비 감독은 휴즈를 팀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결국 휴즈는 대표팀 주장직에서 물러났고 1975년엔 단 2경기만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잉글랜드는 1976 유로 대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후 돈 레비가 갑자기 UAE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잉글랜드 감독이 바뀌자, 휴즈는 대표팀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또다시 진출하지 못했다. 이후 휴즈는 1980년까지 대표팀에서 활동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4. 은퇴 이후
휴즈는 축구계를 떠난 뒤 TV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1984년, 휴즈는 BBC의 장기 프로그램인 " quiz A Question of Sport"에 출연하여 한 팀의 주장이 되었다. 그의 상대는 잉글랜드의 前 럭비 대표팀 주장인 빌 버우먼트였다. 휴즈는 이 프로그램에서 훌륭한 예능감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고 곧 여러 방송국에 출연하여 패널로서 활동했다. 그는 종종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여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5년 헤이젤 참사가 발생했을 때, 그는 "축구는 죽었고 훌리건이 이겼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그는 1986년 월드컵 때 BBC TV의 페널로서 활동했다.1987년, 휴즈는 quiz A Question of Sport를 떠나 ITV로 이적했고 Sporting Triangles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시청률 저조로 조기 종영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ITV의 여러 프로그램에 간간히 출연했고 10대들을 위한 축구 매거진 "Match"의 주필로 활동했다. 1989년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났을 때는 병원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휴즈는 바바라라는 여성과 결혼했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뒀다.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목격된 것은 그의 딸의 결혼식에서였다. 그로부터 9개월 후인 2004년 11월 9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경색이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리버풀 FC (1967~1979)
- 잉글리시 풋볼 리그: 1972-73, 1975-76, 1976-77, 1978-79
- FA컵: 1973-74
- FA 커뮤니티 실드: 1974, 1976, 1977
- 유러피언 컵: 1976-77, 1977-78
- UEFA컵: 1972-73, 1975-76
- 유러피언 슈퍼컵: 1977
5.2. 개인 수상
- 올해의 축구 선수: 1977년
- FWA 올해의 선수: 1976-77
5.3. 서훈
[1]
1980년 수훈, 4등급 대영제국 훈장 Offic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
[2]
휴즈는 리버풀에서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 또는 센터백으로 활동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좌측 풀백 및 윙백으로 활약했다.
[3]
이때
스완지에서 과거
리버풀시절 동료였던
존 토샥이 선수 겸 감독으로 있었다
분류
- 1947년 출생
- 1964년 데뷔
- 1984년 은퇴
- 2004년 사망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 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 블랙풀 FC/은퇴, 이적
- 리버풀 FC/은퇴, 이적
- 울버햄튼 원더러스 FC/은퇴, 이적
- 로더럼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헐 시티 AFC/은퇴, 이적
- 맨스필드 타운 FC/은퇴, 이적
- 스완지 시티 AFC/은퇴, 이적
- 로더럼 유나이티드 FC/역대 감독
- 선수 겸 감독/축구
-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잉글랜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
- FW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대영제국 훈장 4등급
- 컴브리아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