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6:37:25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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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제5대 수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Theobald von Bethmann-Hollwe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obald_von_Bethmann-Hollweg_1913b.jpg
풀네임 Theobald Theodor Friedrich Alfred von Bethmann-Hollweg
테오발트 테오도어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폰 베트만홀베크[1][2]
출생 1856년 11월 29일
사망 1921년 1월 1일 (향년 64세)
출신 정당 무소속[3]
재임 기간 1909년 7월 14일 ~ 1917년 7월 31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수상 재임기2.3.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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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정치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제국의 제5대 수상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1856년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법률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군 출신의 융커였으며, 어머니는 스위스인이었다. 전통과 권력을 겸비한 가문 출신으로서 고등교육은 착실히 받았고,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대학교 공부를 마친 이후 행정 관료가 되었다.

행정 관료로의 능력은 출중하여 1899년 브란덴부르크 주지사로 임명된 데 이어 1905년에는 프로이센 왕국 전체의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9년 베른하르트 폰 뷜로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의 최정점에 올랐다.

2.2. 수상 재임기

베트만홀베크가 취임할 당시 독일은 말 그대로 유럽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대부분의 강대국들과 적대관계였기 때문.[4] 이에 빌헬름 2세와 베트만홀베크는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던졌다. 1911년 술탄에 대항하여 모로코에서 일어난 폭동을 프랑스가 진압하자 제1차 모로코 위기 당시 체결한 협정에 어긋남을 지적하면서 모로코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신변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을 파견한 것. 하지만 이번에도 망했어요. 급기야 영국은 1911년 7월 제3국이 프랑스를 침공할 경우 프랑스를 지원할 원정군을 파병할 것을 약속하는 방위조약까지 체결했다.[5] 답이 없는 독일의 외교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고자 베트만홀베크는 건함 경쟁을 완화하고 영국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해군력 감축 협상을 시도했지만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이끄는 독일 군부의 반대에 발목이 잡혔다. 게다가 양국의 이견 역시 좀처럼 좁혀지지 못해 결국 해군 협상은 아무런 성과없이 중단되었다. 이로 인하여 베트만홀베크 내각은 각계각층으로부터 십자포화를 얻어맞고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6]

그나마 뷜로 내각 말기의 경제적 위기를 괜찮게 제어했던 덕분에 베트만홀베크 내각은 붕괴되지 않고 그냥저냥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1914년 6월 문제의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면서 전 유럽이 혼돈에 휩싸인다. 빌헬름 2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사라예보 사건의 해결책에 대한 외교적인 백지수표[7]를 제시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졌다. 베트만홀베크는 긴장을 조성하지 않기 위하여 빌헬름 2세에게 예정대로 북해 휴가를 떠날 것을 설득했고, 참모총장 몰트케도 마찬가지로 휴가로 자리를 비우게 된다.[8]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 된 후,[9] 결국 일련의 사태 끝에 7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거의 모든 독일의 대내외 정책은 군부에 의하여 주도되고 베트만홀베크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1915년 이후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 분명해지자 베트만홀베크는 미국이 중재하여 평화협상을 진행할 것을 꿈꿨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주도하는 군부는 이러한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급기야 1917년에는 미국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시했다. 베트만홀베크는 이에 반발하여 사임할 생각까지 품었지만, 이러한 행동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라이히스탁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동의안 의결을 요구해야만 했고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치머만 전보 사건과 함께 미국의 참전을 야기했다. 미국의 참전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베트만홀베크의 정치적 힘을 앗아가버렸고 결국 1917년 7월 베트만홀베크는 제국 수상 자리에서 사임했다.

여기까지보면 무능한 인물로 보이지만, 사실은 7월 위기가 대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오스트리아에 압력을 넣거나[10] 처절히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게르하르트 리터 또한 프리츠 피셔가 협상국의 선전물을 재탕하여 베트만홀베크를 욕심 많고 교활한 인물로 묘사했다며 그를 비판하고 베트만홀베크를 옹호한 바 있다.

2.3. 이후

수상직에서 물러난 이후 베트만홀베크는 정계에서도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1921년 폐렴에 걸려 사망한다.

3. 기타

  • 무척이나 비관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을 정도.
    브란덴부르크 일대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를 관리인이 보리수로 꾸미려고 하자, 베트만홀베크는 그 관리인을 말렸다. "얼마 있지 않아 이곳은 러시아 영토가 될 것이니 괜한 헛수고하지 말라"고 하면서.
  • 비스마르크, 뷜로를 필두로 대부분의 독일 수상들이 수상직에서 내려온 이후 빌헬름 2세와 사이가 나빴는데, 그래도 베트만홀베크는 빌헬름 2세에게 미운 정이 들었는지 마지막까지도 빌헬름 2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1차 대전 종전 후 협상국이 빌헬름 2세를 전범으로 기소하려고 하자 자기가 대신 기소되겠다고 나설 정도.
  • 한동안 외교가에서 베트만홀베크의 이름은 개전 시의 독일 수상이었다는 이유로 패배자의 대명사 취급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중화민국 대표로 참석했던 루정샹 구웨이쥔 21개조 요구를 비롯한 불평등 조약과 일본의 산동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클레망소는 중국 대표들에게 자기 땅도 아니면서 "당신들도 베트만홀베크처럼 되고 싶은 것이냐?"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은 베르사유 조약 조인을 보이콧하고 독일과 1919년 독자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2] 그런데 위키백과 항목에서는 성씨에 붙임표가 없다. 독일어 위키백과 [3] 실질적으로는 자유보수당(Freikonservative Partei) 소속. [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기는 했지만 나중에 1차 대전에서도 보이듯이 그리 도움이 되는 동맹국은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말만 삼국 동맹의 일원이지 거의 독자행보였고. [5]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이지만 1차 대전 당시 영국이 참전한 근거는 영불협상이 아니라 이 방위조약 때문이었다. 영불협상은 상호간의 군사적 지원의 의무는 없는 친선조약이었다. [6] 아예 1912년 실시된 라이히스탁 선거결과를 보면 독일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이 전체 의석의 2/3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나마 독일 제국의 수상이 의회가 아니라 황제에게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실각하고도 남는 상황. [7]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원하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유일하게 붙은 조건은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이 번복되는 일이 없을 것."이었다. [8]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 사건이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여행에서 복귀하면서 빌헬름 2세는 베트만홀베크에게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냐?"면서 강하게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에 베트만홀베크가 사의를 표하자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책임지고 수습해라!!!"면서 사의도 불허했다. [9] 그런데 베트만홀베크도 이 시점에서 프랑스 러시아가 참전할 것은 예상했어도 영국이 참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다. 영국의 대독 선전포고 직후 주독 영국 대사에게 "고작 휴지 조각 하나(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1839년의 런던 조약을 지칭)로 우리와 전쟁을 하느냐?"라면서 노발대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0] 세르비아를 상대로 접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독일과 영국의 전쟁은 피하려고 했다는 점, 오스트리아를 압박해 이탈리아 왕국이 요구하던 오스트리아 영토 할양에 동의하게 한 점(이는 이탈리아가 협상국으로 참전하며 무위가 된다.), 협상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카이저에게 페르디난트의 장례식 대신 북유럽 여행을 가게 한 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