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990853><colcolor=#ece5b6>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황녀
태평공주 | 太平公主 |
|
출생 | 665년 |
사망 |
713년
7월 (향년 48세) |
본관 | 농서 이씨(隴西 李氏) |
아명 | 영월(令月)[1] |
부모 |
부 -
고종 모 - 측천무후 |
형제 |
4남 2녀 중 차녀 오빠 - 의종, 중종, 예종 언니 - 안정공주 |
배우자 |
설소(薛紹)(초혼 및 사별) 무유기(武攸曁)(재혼) |
자녀 |
4남 3녀 [설소 소생(2남 2녀)] 장남 - 설숭윤(薛崇胤)(683~?) 차남 - 설숭간(薛崇簡) 장녀[미상] 차녀 - 만천현주(萬泉縣主)(?~710) [무유기 소생(2남 1녀)] 삼남, 사남, 삼녀[미상] |
봉호 | 태평공주(太平公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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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의 공주.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딸.2. 생애
동복언니 안정공주는 측천무후가 후궁 시절에 낳은 아이인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측천무후가 일부러 안정공주를 죽이고는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를 범인으로 몰아 모함했다는 설이 있다.측천무후와 외모나 성격이 닮아서 측천무후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었다고 한다. 15살에 토번에서 화번공주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자 측천무후는 이를 거부하고 딸을 위해 태평관을 세워 태평공주를 출가시켰다.
그로부터 약2년 후, 태평공주는 당고종과 측천무후 앞에서 무관의 관복을 입고 춤을 춘다. 당고종이 웃으며 왜 그런 옷을 입었느냐고 묻자 태평공주는 이 옷을 부마에게 하사해도 되냐고 되물었다. 당고종은 태평공주가 혼인의 뜻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누이 성양공주의 막내아들 설소와 혼인시킨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설씨 가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설소의 형수들은 공주의 동서가 되기엔 격이 떨어진다며 트집을 잡았다.[4] 이런 잡음이 있었지만 태평공주와 설소의 혼례는 성대하게 치러졌고, 7년의 결혼 생활동안 2남 2녀를 낳았다. 이 7년 동안 태평공주와 설소는 권력과 거리를 두고 대부분의 공주와 부마처럼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황제 즉위를 앞두면서 설소의 가문에도 피바람이 분다. 측천무후의 남총인 풍소보가 설씨 가문임을 사칭하면서 설회의로 개명했는데 이 때문에 설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풍소보는 측천무후의 위세를 빌려 설씨 가문을 처형한다.[5] 설소는 아내가 막내딸을 출산한 직후에 곤장 백대를 맞고 옥에서 아사했다.
이후 측천무후는 태평공주의 식읍을 늘여주었고, 무유기의 처를 죽인 뒤 태평공주를 무유기에게 재가시킨다. 무유기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보았다.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공주는 측천무후를 곁에서 보좌하며 역지의 동생 장창종을 측천무후에게 천거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오빠, 설소와 무유기의 전처를 죽인 측천무후를 두려워하여 감히 권세를 부리지 못했다.[6] 세간의 인식과 달리 태평공주는 권력욕의 화신으로서 무주의 황위를 노리지 않았다.[7] 태평공주의 행보는 대부분 자신의 생존과 이씨 가문의 부흥을 위한 것이었다.
측천무후가 장역지 형제의 부추김으로 황태손 이중윤과 위왕 무씨의 적장손인 위왕 무연기를 처형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재상 장간지 등과 함께 측천무후를 폐위하고 당중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어 권세를 유지하였다. 705년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주살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진국(鎭國)의 태평공주로 봉해졌다.
당중종 사후에는 후의 현종이 되는 조카 임치왕 이융기와 결탁하여 무삼사 등 무씨 직계와 손잡은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를 죽이고 이융기의 아버지 예종을 (재)옹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건이 바로 당륭정변이다. 정변 이후 태평공주의 권세는 절정에 달해서 봉읍이 만호(戶)에 달하고, 자신의 자식 3명을 모두 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정권을 잡은 후 7명의 재상 중 5명은 태평공주의 심복 출신 인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도 있다.[8]
비슷한 나이인 상관완아와도 친밀했는데 상관완아가 당현종에게 살해당하자 자신의 딸 만천현주의 묘 인근에 상관완아의 묘를 조성했다. 또한, 당예종에게 청하여 상관완아의 작품을 수집했다.
그녀의 권세는 이융기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에 713년 재상 두회정(竇懷貞) 등과 함께 모의하는 등 이번엔 황태자 이융기와 대립했다.[9][10] 당예종이 이융기에게 양위한 뒤, 당현종이 된 이융기가 병사 300명을 이끌고 태평공주를 공격하여 태평공주 일파를 멸망시킨다. 태평공주는 종남산(終南山)의 남산사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으나 사흘 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사사당했다. 이 사건을 선천정변이라고 한다.
3. 매체
2012년 드라마 <태평공주>에서 어린 시절의 태평공주를 연기한 린먀오커(임묘가)[11] |
[1]
청나라의
사서 《전당서(全唐書)》에 기록된 내용. 그러나 이설도 있다.
[미상]
생졸년, 이름, 작호, 배우자명 등 기타 인적사항
불명.
[미상]
[4]
설소의 형수들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문제는 설소의 형수 중 한명이
숙비 소씨의 친족이어서 이런 불만을 내비친 것이다.
[5]
나중에 풍소보는 측천무후의 총애를 잃고 암살당했는데, 사서마다 암살을 지시한 자가 다르다. 구당서에는 태평공주의 유모가 장사들을 거느리고 풍소보를 때려죽였다고 한다.
[6]
야사에서는 태평공주가 측천무후에게 황위를 요구했다고 하나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측천무후는 후계자 문제에 대단히 민감했기 때문에 태평공주가 감히 그런 요구를 했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7]
태평공주는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적이 한 번도 없다.
[8]
그러나 병권은 이융기가 쥐고 있었다.
[9]
이융기가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10]
이융기는 무씨 세력을 척결하고자 했고, 태평공주도 원래 무씨의 반대파였으나 자신의 두번째 남편인 무유기와 세 아이들은 무씨였기에 이융기에게 반발하며 무씨 세력을 옹호했다.
[11]
청년 역할은
정솽, 중년 역할은
가정문이 연기했다.
[12]
어린 시절의 태평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