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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베츠 불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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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산케베츠 불곰 사건
<colbgcolor=#bc002d> 발생일시 1915년 12월 9일 ~ 12월 14일
발생 위치 일본 제국 홋카이도 루모이 지청 토마마에군 토마마에무라(苫前村) 오오아자리키비루무라(大子力晝村) 아자산케베츠(三毛別)
홋카이도 루모이 진흥국 토마마에군 토마마에초 아자산케이(三渓)
유형 에 의한 공격
가해자 에조불곰 (수컷 / 7~8살 추정)
인명
피해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6명[1]
부상 8명[2]
결과 불곰 사살 (1915. 12. 14)
[clearfix]
1. 개요2. 배경 및 과거 사건3. 사건
3.1. 사건의 예고3.2. 첫 번째 사건: 1915년 12월 9일3.3. 두 번째 사건: 1915년 12월 10일3.4. 수색과 사살: 1915년 12월 11일~ 14일
4. 피해5. 사건 이후6. 사건 이후 비슷한 사건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8. 여담9.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20180117180810.jpg
당시 사건을 재현한 모습.

[ruby(三毛別,ruby=さんけべつ)][ruby(羆,ruby=ひぐま)][ruby(事件,ruby=じけん)]

관련 블로그

1915년 12월 9일부터 12월 14일까지 일본제국 홋카이도 루모이 지청 토마마에군 토마마에무라() 오오아자리키비루무라(大字力晝村) 아자산케베츠(三毛別)의 로쿠센사와(轆線澤) 마을 #, 현재 일본 홋카이도 루모이 진흥국 토마마에군 토마마에초 아자산케이(三渓) 로쿠센사와(六線沢) 지역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상 단일 개체 맹수가 일으킨 최악 동물 재해 사건이다. 에조불곰에게 6명(임산부 희생자의 태아 포함시 7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3] 지명을 딴 '로쿠센사와 사건', 혹은 당시 불곰에게 붙여준 이름을 따서 '쿠마아라시(羆嵐) 사건'으로도 불린다.

2. 배경 및 과거 사건

19세기 에도 막부 말기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당시 일본제국은 미개발지가 많은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이주-개척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전까지는 토착민인 아이누를 제외하면 미개척지로 남아 있던 지역에 이주민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동물 서식지와 인간 거주지가 겹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동물들이 농작물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해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피해 규모와 잔혹성으로 인해 일본에서 최악의 동물 재해로 꼽힌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878년 1월 11일부터 1월 18일까지 홋카이도 제1대구 제6소구 (이시카리 국 삿포로군(札幌郡)) 오카다마무라(丘珠村), 현재 홋카이도 삿포로시 히가시구(동구) 오카다마쵸(丘珠町)에서 불곰이 엽사와 개척민 부부를 (되려) 습격해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삿포로 오카다마 사건'이 일어났다.

3. 사건

요약하자면, 1915년 12월 9~10일 이틀 동안 불곰은 마을로 내려와 두 차례에 걸쳐 오타 가와 메이케이 가를 습격해 여자와 어린이 등 6명을 죽이고 일부는 먹어치웠다. 12월 11~14일까지는 인명 사고가 없었고 12월 14일이 되어서야 불곰이 사살되었다.

3.1. 사건의 예고

불곰의 습격은 곰에 의한 학살 한 달 전인 1915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케다 가의 말 한 필이 놀라 옥수수 몇 개를 떨어트리고 도망치는 데에 그쳤고 이후 다시 마을에 내려온 곰은 마을 장정들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다. 사실 당시 마을이 그렇게 개척이 되지 않았던 곳인지라 이런 야생동물의 출현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고, 이 때까지는 아직 인명피해도 없었으나...

3.2. 첫 번째 사건: 1915년 12월 9일

첫 번째 습격은 1915년 12월 9일 오타 가의 가장인 오타 사부로(당시 42세, 1873년생)와 오타 가에 신세지고 있던 나가마츠 요키치(당시 59세, 1856년생)가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발생했다. 집에는 사부로의 아내 마유(당시 34세, 1881~1915)와 오타 가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하스미 미키오(당시 6세, 1909~1915)가 남아있었는데, 새참을 가지러 집에 돌아온 요키치는 뒷모습만 보면 졸고 있는 것 같았던 미키오를 보고 그를 놀래켜주려 다가갔다가, 그 아이가 끔찍한 시신이 된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이 사건에 크게 놀란 마을 사람들은 흔적을 보고 불곰의 짓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불곰은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미키오를 한방에 때려죽이고 마유는 산 채로 끌고 간 것으로 보였다.

이 사태로 로쿠센사와 사람들은 사이토 이시고로를 인근 경찰서로 급파하고, 이웃마을 산케베츠 사람들까지 합쳐서 수색대를 꾸린다. 7정의 엽총 및 낫이나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수색대는 문제의 불곰과 마주치지만 6정은 격발불량에 그나마 발사된 총알은 한참 빗나가고,[4] 곰한테 반격을 당하여 혼비백산해서 쫓겨났으나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다.

그렇게 위기를 면한 수색대는 다음날 아침, 피로 흥건하게 물든 눈을 파헤쳤고, 거기서 마유의 시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미 곰에게 80% 이상이 잡아 먹힌 상태였다고 한다. 수색대는 모두 잡아 먹히고 무릎 밑부분만 남은 마유의 참혹한 시신 상태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발견 당시 다리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고.

이때 마유의 시신을 수습해서 내려왔는 데, 이것이 아주 큰 실수였다. 곰은 집착이 매우 강한 습성을 가진 맹수이기에 한 번 자신의 소유물이 된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늑대들조차도 곰이 나타나면 목숨 걸고 사냥한 사냥감을 내주고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곰의 지능은 인간 7-9살 수준의 아이 만큼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영, 클라이밍, 달리기, 그야 말로 못 하는 게 없는 최상위권에 위치한 포식자다.[5] 즉, 사냥감을 빼앗으면 빼앗았지, 자신의 먹이와 소유물을 빼앗기는 법이 없다. 불곰 입장에서 보면, 마을 주민들은 갑자기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사냥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그런 주민들이 자신의 저장 식량을 훔쳐 달아났으니...

3.3. 두 번째 사건: 1915년 12월 10일

이 때문에 불곰은 자신의 먹이를 되찾으려고 또 다시 마을을 덮치는데, 처음에는 마유와 미키오의 시신을 모셔둔 오타 가를 다시 덮쳤지만 모여있던 사람들이 단체로 곰을 위협하며 곰을 쫓아냈아내는 데 성공한다.[6] 곰이 도망친 후, 모든 마을 남자들이 이 자리에 모여 되돌아올 곰을 대비해 무장하고 기다렸지만 어째서인지 곰은 돌아오지 않았다. 곰이 이들을 피해 도망친 곳이 하필이면 이시고로의 가족 등 여자와 아이들이 피신해있던 메이케이 가였고, 아이와 여자들만 모여있는 그 자리에서 잔혹한 학살극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명 소리를 들은 마을 남자들은 급하게 메이케이 가로 향했지만, 집 안은 캄캄했고, 뼈와 고기를 물어 뜯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주민들은 불을 질러 집째로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을 것을 우려하여 곰이 자발적으로 나올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총으로 쏴죽이기로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발탄이 많아 총알 한발만이 발사가 됐는데, 이 총알마저 적중하지 못하고 비켜나가면서 곰은 무사히 탈출하게 된다. 집안에 들어가자 피가 천장까지 튀어 그야말로 처참한 상황이었다고.

사망자는 임산부 타케(당시 34세, 1881~1915)[7]와 그녀와 함께 있던 3세 남자아이 2명. 그리고 6세 남자아이 1명은 곰에게 몸이 뜯어먹힌 채로 구조되었지만 약 20분 후 사망했다. 태아는 모체가 공격을 받을 때 배가 찢기면서 밖으로 꺼내졌는데, 미동이 전혀 없던 태아를 곰이 공격하지 않아 생존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타케가 사망하고서 1시간 뒤 뒤따라 사망한고 만다. 생존자는 숨어 있어서 불곰의 공격을 피한 아이 2명(리키조, 히사노)이었다. 그 즈음 검시를 위해서 산케베츠로 오던 의사 역시 곰의 변에서 옷 조각과 인골 조각을 발견한다.

3.4. 수색과 사살: 1915년 12월 11일~ 14일

이시고로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홋카이도의 경찰관인 스가 미츠구 경위는 헌병 경찰과 인근 마을 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조직하였고 60정의 총기와 사냥개 10마리를 동원하여 12월 12일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한 토벌대는 시신들과 현장을 보고는 경악하며 시신들을 수습하고 수색에 나선다. 하지만 토벌대가 하루종일 지역을 수색했으나 곰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곰이 이미 인육을 먹어본 경험이 있으므로 인육 맛을 들여 먹잇감으로 인식하였다 판단한 뒤에 인육을 먹으러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8], 미츠구는 조심스럽게 메이케이 가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미끼로 쓰자고 제안했다. 맨 처음에는 토벌대와 유가족들이 반대했으나 상황이 상황이였던지라 나중에는 토벌대와 유가족들도 이에 동의하여 명사수 7명을 매복시켰다. 하지만 곰은 시신이 있는 집 근처에 나타났다가 경계심을 가졌는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없는 다른 집들을 습격하여 겨울 양식을 먹어치우고 옷과 침구를 찢어놓고 갔다. 다음날인 13일 밤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 입구에 매복하던 토벌대는 낮에 세어놨던 나무들이 한 그루 더 늘어나있자 그것이 곰임을 알아채고 사격을 가했으나 도망쳐서 놓친다. 곰이 흘린 핏자국을 확인한 스가 경위는 만족스러워했지만 토벌대에 합류한 사냥꾼 야마모토 헤이키치[9]는 되려 곰의 화만 더 돋궜다며 걱정했다. 실제로 헤이키치는 곰 사냥꾼으로서의 전문성을 지닌 것에 걸맞게 피해 현장을 확인하자마자 불곰의 행태와 예상되는 움직임을 단번에 파악하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 한편으로 아사히카와에 위치한 일본 육군 7 사단 28 연대에서도 병력을 차출해 파견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건이 끝날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12월 14일 토벌대는 부상을 입은 곰을 추적했는데, 그동안의 경험으로 곰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헤이키치는 곰의 도망을 방지하려고 일부러 조용히 다른 대원들과 다른 길로 올라간 뒤 느릅나무 위에 올라가 숨었고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던 곰의 선수를 치는데 성공하여, 곰한테 첫 발에 심장을 맞추었고, 두 발째로 머리를 맞춰서 사살했다. [10] 곰한테 치가 떨렸던 토벌대는 사살한 곰의 사체를 때리고 발길질하며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사살당한 곰은 단단한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컸으며 군데군데 누런 갈색 털이 섞여있는 검은 털로 뒤덮인 몸에는 흉간 부위에서 등에 걸쳐서 하얀 얼룩 반점이 있었다. 그리고 7~8살로 추정되고 문단에서 뒷발 뒤꿈치까지 길이가 9척(약 2.7m)에 몸무게는 90관(약 340kg)에 달하는 거대한 수컷이었다. 당시 토벌대에 참가한 아이누족 사람들은 얼마 전 근처에서 사람을 잡아먹고 사냥꾼들한테 쫓기던 놈 같다고 했으며, 해부한 결과 내장에서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 조각 등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이미 적어도 3명의 사람을 잡아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가 나와서 이를 본 사람들 모두가 경악한다.[11] 곰의 사체는 가죽을 벗긴 뒤 고기는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가족들이 나눠 먹었으며,[12] 가죽과 간은 매각한 뒤 수익금 50엔을 토벌대가 유가족에게 위로금으로 건넸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공포심에 모두 마을을 떠나 이 마을에는 한 명도 살지 않게 되었다.

4. 피해

최종 피해는 사망자 7명(태아 포함), 중상자 3명. 중상자 중 1명은 태어난지 1년 남짓한 영아였으며, 이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몇 년 못 가 요절했다. 그래서 사망자를 이 아이까지 포함하여 8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사망자
    • 오타 마유: 당시 34세(1881 ~ 1915): 12월 9일 사망
    • 하스미 미키오: 당시 6세(1909 ~ 1915): 12월 9일 사망
    • 메이케이 긴조: 당시 3세(1912 ~ 1915): 12월 10일 사망, 메이케이 家 3남.
    • 사이토 하루요시: 당시 3세(1912 ~ 1915): 12월 10일 사망, 사이토 家 4남.
    • 사이토 다케: 당시 34세(1881 ~ 1915): 12월 10일 사망, 사이토 家 모친.
    • 사이토 다케의 태아: 12월 10일 사망
    • 사이토 이와오: 당시 6세(1909 ~ 1915): 12월 10일 습격, 동일 사망, 사이토 家 3남.
  • 사건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 메이케이 우메키치: 당시 1세(1914 ~ 1918): 12월 10일 습격 이후 2년 8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 메이케이 家 4남.
  • 생존자
    • 메이케이 유지로: 당시 8세(1907 ~ 1942):메이케이 家 2남. 27년 후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다.
    • 메이케이 야요: 당시 34세(1881년생): 메이케이 家 모친.
    • 메이케이 리키조: 당시 10세(1905년생): 메이케이 家 장남.
    • 메이케이 히사노: 당시 6세(1909년생): 메이케이 家 장녀.
    • 사이토 이시고로: 당시 42세(1873년생): 사이토 家 부친.
    • 메이케이 야스타로: 당시 40세(1875년생): 메이케이 家 부친.
    • 나가마츠 요키치: 당시 59세(1856년생) 사건 다음 해에 강에 빠져 사망했는데, 곰에게 받은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영향을 미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5. 사건 이후

곰을 사살한 직후 토벌대가 사체를 운반하려 하자 이전까지 맑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눈보라가 몰아쳤다고 한다.[13] 이를 두고 주민들은 '쿠마아라시(羆嵐. 곰 폭풍)'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으며, 이 사건의 충격으로 마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타지로 이주했다고 한다. 한편, 홋카이도에서는 이 사건 이후 곰 사냥 명령을 내려서 100여 마리의 곰들이 사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로쿠센사와 마을에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과 불곰과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냥꾼이 된 구장의 아들 오카와 하루요시(1909~1985)[14]가 은퇴 이후인 1977년에 세운 것이다. 불곰까지 추모하는 이유는, 그 불곰 역시 무분별한 인간의 미개척지 개발로 인해서 삶의 터전을 잃었고 그 때문에 굶주리게 되어 인간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현재 홋카이도 산케베츠는 곰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쿠센사와 근처를 지나는 도로는 잔인했던 실제 사건과는 다르게 '베어 로드'라 하여 귀여운 모습의 엄마곰과 아기곰 그림이 있는 등, 곰을 주제로 한 관광 도로로 지정되어 있어 왠지 더 섬뜩하고 기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6. 사건 이후 비슷한 사건

8년 후인 1923년 역시 홋카이도 지역에서 이시카리누마타 호로신 불곰 사건이 발생해서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1970년 역시 같은 홋카이도의 히다카 산맥에서 대학생 3명이 불곰의 습격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후쿠오카 대학 반더포겔부 불곰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100년도 넘게 지난 2016년 아키타현에서도 식인 일본반달가슴곰이 4명을 살해하고 잡아먹은 토와리산 반달가슴곰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에서 반달가슴곰에 의한 인명피해는 드물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곰이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특이한 사건이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은아 시리즈의 붉은 곰이 이 산케베츠 불곰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명견 실버에서도 이 사건처럼 곰들이 홋카이도의 개척민 마을을 습격한다.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가 쓴 1977년작 공포 스릴러 소설 <쿠마아라시(羆嵐)>가 이 사건을 다룬 첫 번째 창작물이다. 본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논픽션은 아니고 어느 정도 작가의 상상과 각색이 들어가 있는데,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무서운 사건이 더욱 무섭게 묘사된다. 어릴 때 이 소설을 읽고는 밤에 화장실을 못간 사람(특히 산골마을 거주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정도로 묘사가 무섭다. 지금도 아마존 재팬에서 605엔에 판매중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정발된 적은 없어서 정 읽고 싶다면 일본어 스킬을 완비해야한다.

'소년 낚시왕(원제 낚시왕 산페이)'으로 유명한 야구치 타카오가 그리고, 나오키상을 수상한 도가와 유키오가 글을 쓴 '야성전설 히구마카제'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 유리쿠마 아라시가 해당 사건과 1982년 소설 원작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따왔다는 얘기가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곰'인 데다 ' 식인'이라는 요소까지 들어갔으니 무엇보다 제목을 직역하면 " 백합곰 폭풍"이란 뜻으로, 문제의 곰에 붙여진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로 유명한 만화가 아라카와 히로무의 만화 백성귀족에서는 작가와 가족들이 TV를 보다가 곰이 을 2마리나 물고 갔다는 말에 이 사건의 곰과 같은 괴물이 나타났다며 공포에 떤다. 그나마 다행히(?) 물고 갔다는 말은 일반적인 크기의 말이 아니라 사람도 손으로 들 수 있는 작은 포니 품종.[15]

귀멸의 칼날이 이 불곰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괴담이 존재한다.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의 회상 속에서 이 사건의 곰과 동일한 특징을 가진 곰이 등장한다. 9척(2.7m)에 사람을 여섯 명 잡아먹은 곰이라는 말이 나온다.

또한, 토미오카 기유의 외전 만화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북부 지방에서 식인곰이 사람을 여럿 사냥한다는 소문을 듣고 혈귀의 소행이라 판단한 귀살대에서 기유를 파견하는데 이 때의 묘사가 이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게 전개 된다.[16]

8. 여담

한때 해당 불곰을 사살한 직후을 찍었던 당시 사진이라고 알려졌었던 것이 인터넷에 계속 떠돌아다니지만 사진 조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눈치챌 수 있듯이 사진 속 곰이 무슨 마블 코믹스 데몬 베어 마냥(...)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크기 때문에 판별해 본 결과 결국 조작한 사진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사진의 진위 여부를 고찰한 영상

9. 관련 문서



[1] 사이토 다케의 태아를 포함해 7명이라 보기도 하고, 중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메이케이 우메키치를 포함해 8명이라 보기도 한다. [2] 중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메이케이 우메키치를 제외한 7명이라 보기도 한다. [3] 게다가 토벌후의 해부 결과와 증언에 따르면 그 이전에 이미 해당 곰에 의한 희생자가 3명 더 있었으므로 최대 10명의 사람이 죽었다. [4] 무라타 엽총이 사용하는 엽탄은 흑색화약을 사용해 무연화약을 사용하는 타 엽총들과 비교했을 때 불발률이 높은 편이었다. [5] 전문가들도 곰의 넘사벽인 능력치 때문에 만나게 되면 그냥 죽은 목숨이라고 할 정도다. 도망가면 시속 50-70km로 단숨에 쫓아오고, 죽은 척을 하면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로 수차례 내려찍으며, 나무에 올라가면 엄청난 속도로 따라 올라오고, 물로 도망치면 발에 모터가 달린 것마냥 빠르게 돌진한다. 나뭇가지 같은 물체를 이용해서 몸을 부풀려 봤자, 7-9살 수준의 인간 지능을 가진 곰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호기심을 다른 물체에 갖게 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게 그나마 생존 확률을 조금이나마 올리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6] 이때 한 남자가 아내를 밟고 천장으로 도망쳤다고 하며, 그 때문에 이후 부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고 한다. [7]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곰에게 먹히기 직전 배는 건드리지 말고 차라리 머리를 먹으라고 소리쳤지만, 불곰이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기에(설령 인간의 말을 알아들었다쳐도 애원대로 행했을지는 미지수다.) 상체부터 뜯어먹혔다고 한다. [8] 실제로 한번 인육과 피를 먹은 동물은 이후 사람을 먹잇감으로 보고 계속 잡아먹기 때문에 사살이 원칙이다. [9] 이 인물은 1858년생으로서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당시 썼던 군모와 전장에서 획득한 베르단을 가지고 곰사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이 사건 전까지 고등어 손질에 쓰는 식칼로 불곰을 잡는 등 야생동물을 100마리 넘게 잡았을 정도로 솜씨가 좋은 베테랑 사냥꾼이지만, 툭하면 술 먹고 싸움을 벌이는 등 행실이 거칠어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해서 촌장이 직접 불러왔던 것이며 다큐멘터리를 통해 재연된 당시 상황에 따르면 토벌대원들은 당연히 헤이키치를 껄끄러워한데다 스가 경위 역시 그를 믿지 못해 토벌대에 참여시키는 것을 보류하나 촌장이 내가 다 책임질테니 곰을 잡기 위해서라도 허락해달라고 강권하여 합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정한 면도 존재하였으며 1950년 7월에 9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300마리가 넘는 곰을 잡았다고 한다. [10] 이때 헤이키치가 심장을 적중시켰음에도 덤벼드는 곰의 발악에 당황해서 재빨리 장전하여 재사격하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을 정도로 곰의 맷집과 집착에 질린 반응을 보여 베테랑 사냥꾼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불곰의 위험성이 돋보여졌다고 한다. [11] 이 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위에도 서술했지만 한번 인육을 맛본 동물은 그 이후로는 인간을 사냥감으로 인식하여 끝없이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끝까지 추적해서 사살해야 하며 멸종위기종이나 보호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식인 경험이 있는 개체를 빠르게 솎아내지 않으면 자위를 위한 인간 집단의 공격을 받아 아예 멸종할 수 있다. [12] 다만 이 곰의 고기는 질기고 단단하면서 근육이 많아 맛이 없었다고 한다. [13] 참고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영물을 죽이면 재앙이 닥친다는 미신이 있다. [14] 사건 당시 6세였고 공교롭게도 사건 70주년이 되던 1985년 12월 9일에 향년 76세로 사망했다. 그것도 단순히 날짜만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 아니라 70주기 위령제 때 인삿말을 하던 도중 쓰러져 사망했다. [15] 미니어처 호스라고 흔히 불리는데, 대형견 정도 사이즈라서 '개만한 말'로 인터넷에 알려졌다. 일반적인 미취학 아동이라면 잠깐 탈 수 있는 크기라서 동물 체험장소에서도 인기가 있다. [16] 당연하지만 식인곰의 소행이 아닌 모종의 이유로 혈귀로 급변한 사냥꾼 소녀의 아버지가 벌인 짓이었고 토미오카 기유와 기유보다 나중에 도착한 코쵸우 시노부의 도움으로 혈귀가 된 아버지를 토벌하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