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1 19:28:52

케이카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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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야스 웃 딘 카이쿠스라우
페르시아어, 아랍어 : عز الدين كيكاوس بن كيخسرو
터키어 II. Izzeddin Keykavus

생애 1235년 ~ 1279년
재위 1246년 ~ 1256년

1. 개요2. 생애
2.1. 새 술탄의 시대2.2. 몽골의 재침과 망명2.3. 말년
3. 기타

1. 개요

룸 술탄국의 12대 술탄. 카이카우스 2세로도 불린다. 케이휘스레브 2세의 사후 동생들을 제압하고 술탄에 올랐다. 그는 몽골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1256년 바이추에 패배하고 니케아 제국을 거쳐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권신 페르와네와 함께 몽골에 복속한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 4세가 술탄이 되었다. 망명 중에도 케이카우스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종종 그의 이름을 빌린 반란이 일어나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케이휘스레브 3세 부자를 괴롭했다. 결국 후자가 처형된 후 케이카우스의 아들 메수트 2세가 술탄으로 추대되었다.

2. 생애

케이휘스레브 2세의 장남으로, 그리스계 여인 프리둘리아의 소생이다. 부왕의 사후 재상 샴셋틴 메흐메트 이스파하니의 도움으로 기존 후계자였던 동생 케이쿠바트를 제치고 술탄에 즉위하였다. (1246년) 다만 다른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은 같은해 카라코룸으로 향하여 구유크 칸의 대관식에 참석, 복속을 표하는 등 대칸의 환심을 산 후 술탄으로 봉해졌다. 2년 후 토카트로 돌아온 클르츠 아르슬란 4세는 술탄을 칭하였고, 1249년 대칸의 칙령을 내세워 재상 이스파하니를 소환한 후 처형하였다. 그후 나입 (궁재)이다가 재상에 오른 젤랄레틴 카라타이는, 형제들의 분란을 종식시키고자 케이카우스-클르츠 아르슬란-케이쿠바트 모두를 술탄으로 인정하는 협정을 맺게 하였다.

2.1. 새 술탄의 시대

셋 모두 각자 명의의 주화를 발행하고 금요 예배문 (쿠트바)에서 언급되었다. 아나톨리아 중북부를 흐르는 크즐으르막 강을 경계로 서쪽은 케이카우스, 동쪽은 동생들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실상 제1술탄이던 케이카우스는 클르츠 아르슬란이 카이세리에 따로 조정을 차리자, 카라타이와 함께 그를 공격하여 패배시킨 후 사로잡았다. 다만 카라타이의 조언으로 죽이지는 않고 그에게 카이세리- 말라티아- 시바스 일대의 지배권을 인정해주었다.[1] 이러한 삼두정은 케이카우스와 타라가이의 주도 하여 약 5년간 계속되었다.

2.2. 몽골의 재침과 망명

한편 몽골측 룸 총독 바이추는 종종 1243년에 합의된 것보다 더 많은 조공과 몽골 기병들을 위한 아나톨리아 내의 목초지를 대거 요구하였다. 케이카우스는 10만 디르함과 각종 선물을 보내며 그에게 협정 준수를 요청했지만, 바이추의 분노를 야기했을 뿐이었다. 바이추의 상소를 접한 뭉케 칸은 세 술탄들을 카라코룸으로 소환하였고, 1254년 형제들은 시바스에 다다랐으나 재상 카라타이의 부고에 되돌아갔다. 이후 케이카우스와 클르츠 아르슬란은 막내 케이쿠바트를 보내기로 합의했는데, 후자는 에르진잔에 이르러 연회 직후 급사하였다.

독살로 추정되는 그의 죽음과 함께 몽골측 인내심 역시 바닥이 났고, 그러한 상황에서 케이카우스와 클르츠 아르슬란은 내전을 벌였다. 결과는 케이카우스의 승리였으나, 같은해 재차 몽골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256년) 서아시아를 관장하러 당도한 훌라구 칸은 바이추에게 토벌을 지시하였다. 바이추는 악사라이 근처에서 케이카우스를 격파하였고, 이에 후자는 알라니아를 거쳐 니케아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케이카우스는 테오도로스 2세의 환대를 받았으나 1257년 역모 혐의로 감금되었고, 왕국 서부에서 저항하던 케이카우스의 잔존 세력도 1261년까지 토벌되었다.

2.3. 말년

케이카우스는 약 8년간 감금을 겪다가 1265년, 반몽골 왕공들의 요청을 받은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 칸이 노가이를 보내어 트라키아를 공격한 후에야 미카일 8세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후 킵차크 칸국으로 향한 케이카우스에 대해 베르케 칸은 자신의 딸 우르바이 하툰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고, 크림 반도의 수닥을 영지로 내리는 등 후히 대접하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 친한 클르츠 아르슬란 4세 및 일 칸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여겨진다. (당시 킵차크 칸국은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일 칸국에 맞서고 있었다)

망명 중에도 케이카우스는 몽골에 맞섰던 전력 덕에 룸 셀주크 귀족들의 존경을 받았고, 1271년 재상 파크렛틴 알리 (사힙 아타)가 그와의 내통 혐의로 감금되었을 정도였다. 1276년에는 맘루크 왕조와 함께 일 칸국에 맞서려 했던 카라만 왕조가 술탄 추대 의사를 밝혔고, 여의치 않자 왕족 지므리를 그의 아들이라며 술탄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 비록 일 칸국에 진압되었지만, 그후 케이카우스는 아들들을 아나톨리아로 보내어 술탄위를 노리게 하였고 그중 메수트 2세가 성공하여 최후의 술탄이 되기에 이른다. 케이카우스는 그것까지는 보지 못하고 1279년 망명지인 수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3. 기타

룸 셀주크의 이러한 혼란기에 일단의 튀르크멘이 동로마에 귀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도브루자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 후예가 현재의 가가우즈인으로, 케이카우스 2세의 혈통을 주장한다. (가가우즈는 케이카우스가 변형된 형태다)

약 한세기 반 후의 오스만 공위기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수피 셰이크 베드렛틴은, 스스로 케이카우스 2세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1] 카라타이는 케이카우스가 지나치게 강해지길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