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1:36:02

카트완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셀주크 제국군3.2. 서요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1141년 9일 서요의 초대 황제 야율대석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 사마르칸트 북쪽의 카트완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야율대석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서요의 기반을 탄탄히 다진 반면, 산자르는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호라산 일대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했다. 하지만 야율대석이 호라산 일대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셀주크 제국은 얼마 안가 호라산을 다시 점유할 수 있었다.

2. 배경

11세기 말, 중동 전역의 패자였던 셀주크 제국은 수많은 내전과 분열로 인해 산산조각났다. 각지의 영주들은 이 때를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켜 술탄의 권위에 도전했고, 유럽에서 몰려온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여러 십자군 국가를 건국했다. 셀주크 제국은 이 혼란을 좀처럼 수습하지 못해 조만간 멸망하는 듯 했다.

그러던 1119년 9대 술탄에 오른 아흐마드 산자르는 무너져가는 제국을 복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는 변경을 번번이 침공하던 가즈니 왕조 카라한 칸국을 재복속하였고[1], 형제들의 반란을 모조리 진압했으며, 독립을 꾀하던 압바스 왕조 칼리프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연공 지불을 제대로 하지 않는 호라즘을 징벌하여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그는 20여 년간 전국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고, 셀주크 제국은 그의 활약 덕분에 부흥하는 듯했다.

한편, 요나라가 망한 뒤 금나라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달아난 야율대석은 툴라 강 상류의 카툰성에 입성한 뒤 인근 7주의 장관들과 18부의 수령들을 소집해 요나라의 부흥을 선포하고 서요를 건국했다. 이후 주변의 여러 유목민족을 복속시키고, 당시 서부와 동부로 나뉘어진 카라한 왕조를 공격하여 동부 카라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발라사군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서부 카라한 왕조의 칸 루큰 웃 딘 마흐무트는 1137년 5월 타지키스탄의 후잔트에서 야율대석과 맞붙었으나 크게 패하여 사마르칸트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야율대석은 서부 카라한 왕조의 영역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마흐무트는 사마르칸트로 도주한 뒤 산자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산자르는 1141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로 이동한 뒤, 서카라한 왕조 내에 거주하던 카를루크 족의 충성심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대거 추방했다. 카를루크족은 산자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기들이 계속 거주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산자르는 무시했다. 이에 그들은 야율대석에게 향했고, 야율대석은 카를루크 족을 거둬준 뒤 산자르에게 카를루크족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산자르는 야율대석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대군으로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특히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도발성 문구를 덧붙였다.
"나의 군대는 화살로 수염을 자를 수 있다."

야율대석은 편지를 읽은 뒤 셀주크 사신들에게 바늘을 쥐어준 뒤 수염 한 줌을 잘라보라 명했다. 사신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자, 그는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바늘로도 수염을 자르지 못하면서, 화살로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그 후 야율대석은 군대를 소집해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고, 산자르는 즉시 응전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사마르칸트 북쪽의 카트완 평원에서 맞붙었다.

3. 양측의 전력

3.1. 셀주크 제국군

3.2. 서요군

  • 지휘관: 야율대석
  • 병력: 당대의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는 30만 명으로 기록했고, 후사이니는 7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했다.[2]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수치를 지나친 과장으로 간주한다. 무슬림 연대기들은 서요군이 셀주크군보다 훨씬 우세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의 일부 무슬림 역사가들은 양측 모두 비슷한 규모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4. 전투 경과

요사에 따르면, 야율대석은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눴는데, 좌익과 우익에 각각 2,500명의 기병대를 배치했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서요군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우수한 기동력과 전투력을 발휘하여 셀주크군 좌우익을 삽시간에 격파하고 중앙 부대를 사마르칸트에서 약 12km 떨어진 다르함이라는 와디로 몰아갔다. 셀주크군은 와디에 밀어 넣어진 뒤 탈출구를 찾지 못하다 일방적으로 도륙당했고, 산자르는 몇몇 측근과 함께 간신히 도주했다. 이리하여 카트완 전투는 서요군의 압승으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당대 기록에 따르면, 셀주크 군은 카트완 전투에서 11,000 ~ 10만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산자르의 아내와 여러 장수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후 야율대석은 여세를 몰아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공략하였고, 더 이상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산자르는 화의를 요청했다. 야율대석은 화의의 조건으로 매년 3만 디나르를 조공으로 바칠 것 등을 요구했고, 산자르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 전투의 패배때 카쿠이 왕조의 가주가 전사하여 카쿠이 왕조가 멸망한다

야율대석은 서부 카라한 왕조의 본거지인 사마르칸트에 석달간 머물다가 마흐무트 칸의 동생을 옹립한 뒤 귀환했다. 또한 호라즘은 셀주크 제국을 배신하고 서요에게 귀부했다. 하지만 야율대석은 호라산 일대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산자르는 이 덕분에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1143년 야율대석이 사망한 뒤, 산자르는 1143년과 1147년에 연이어 호라즘을 공격해 다시 복종시켰다.

그러나 1153년 셀주크 제국에게 복속되어 있던 유목민족 오우즈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려 했다가 군 지휘관들의 배신으로 오히려 아내와 함께 오우즈인들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3년간 포로 신세로 지내다 가까스로 탈출하였으나 1157년 사망했고, 셀주크 제국은 붕괴되었다.

이후 셀주크는 두번다시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194년 완전히 멸망한다.

[1] 특히 카라한 칸국과의 전쟁에서 카디르 칸 지브라일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2] 여기에 카를루크 족 3만에서 5만 가량의 기병대가 합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