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1:08:23

카를로 체레졸리

카를로 체레졸리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파일:ceres1.jpg
카를로 체레졸리
(Carlo Ceresoli)
<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1910년 6월 14일 /
롬바르디아 베르가모
사망 1995년 4월 22일 (향년 84세) /
롬바르디아 베르가모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포지션 골키퍼
신체조건 178cm / 72kg
선수경력 아르덴스 칼초 (1923~1927 / 유스)
비르투스 베르가모 (1927~1928)
아탈란타 BC (1928~1932)
암브로지아나 인테르 (1932~1936)
볼로냐 FC 1909 (1936~1939)
제노아 CFC (1939~1941)
유벤투스 FC (1941~1942)
국가대표
(1934~1938)
8경기
감독경력 AC 파라촐로 (1949~1951)
아탈란타 BC (1951~1952)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52~1953)
아탈란타 BC (1963~1964)
아탈란타 BC (1968~1969)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이자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체레졸리는 1927년부터 성인팀 명단에 들었고 1929년 1월 18일에 아탈란타 BC에서 디비지오네 나치오날레[2]에 데뷔했다. 하지만 체레졸리의 소속팀 아탈란타는 디비지오네 나치오날레에서 강등당했고 새로 출범되는 세리에 체제에서 세리에 B로 시작해야했다.

아탈란타는 1932년까지 세리에 A 승격에 계속 실패했지만 체레졸리에게는 세리에 A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다. 인테르 밀란이 체레졸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인테르 밀란의 골문을 4시즌간 지켰다. 하지만 체레졸리의 입단 당시 세리에 A는 유벤투스 FC의 5연패 시기라 인테르는 3년 연속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35~36 시즌에서야 드디어 유벤투스가 1위 자리에서 5위로 끌어내려졌으나 정작 인테르도 4위에 머물러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체레졸리는 해당 시즌의 우승팀이었던 볼로냐 FC 1909로 이적했다.

체레졸리는 결국 볼로냐에서 꿈에 그리던 스쿠데토를 2번 드는데 성공했고 1939년에 제노아 CFC로 다시 팀을 옮겼다. 체레졸리의 마지막 시즌은 유벤투스 FC에서 보냈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1.2. 국가대표

1934년 2월, 자국에서 열릴 월드컵을 3달 앞두고 토리노에서 분더팀 오스트리아와 친선 경기가 있었는데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2대4로 충격적인 대패를 당해 월드컵 우승의 시나리오를 대대적으로 고쳐야했다. 그 중 하나가 대표팀 멤버들의 세대 교체였고 선수 은퇴를 발표한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의 후계자로 체레졸리가 낙점되었다.

체레졸리는 지역 예선 그리스전에서 역사적인 활약을 펼쳐 이탈리아의 4대0 낙승을 이끌었다. 그렇게 이탈리아의 월드컵 주전 골키퍼 자리는 그대로 확정되는듯 했다. 하지만 체레졸리가 월드컵 직전의 훈련 중에 피에트로 아르카리의 슈팅을 막다가 팔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그의 본선 합류는 아예 무산되었다. 체레졸리의 공백은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던 콤비가 다시 대표팀에 합류해서 메웠고 이탈리아는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콤비는 월드컵 우승을 끝으로 명예롭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고 이탈리아는 11월 14일, 런던에 건너가 잉글랜드 하이버리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가졌다.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계에서 자타공인 세계 최강팀이었고 이탈리아는 월드컵 우승팀이었으니 두 팀의 경기는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체레졸리는 다시 이탈리아의 골문을 지켰고, 경기 시작 1분 만에 자신의 파울로 인해 페널티 킥을 허용했다. 체레졸리는 결자해지라도 하듯 에릭 브룩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고 이후에도 몇 차례 번뜩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탈리아는 잉글랜드에 2대3으로 패했다. 하지만 이 경기는 다른 의미로 유명한데 바로 루이스 몬티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경기이자 양팀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가 속출해 하이버리의 전투로 더욱 유명하다.

이후는 1938년 월드컵 주전 골키퍼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월드컵 직전에 열린 유고슬라비아전에 체레졸리가 출전해 이탈리아의 4대0 승리를 이끌었지만 포초 감독의 선택은 알도 올리비에리였다. 결국 체레졸리는 귀도 마제티와 함께 서브 골키퍼로 이탈리아의 우승을 함께했다.[3]

체레졸리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8경기에 출전, 10골을 실점했다.

2.2. 감독 생활

체레졸리의 감독 생활 중 중요한 팀은 자신이 프로 데뷔를 했던 팀 아탈란타 BC였다. 아탈란타의 좋은 성적을 위해 노력했지만 눈에 띄는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래 감독직을 수행할 순 없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930년대 세리에 A를 대표하는 골키퍼 중 한 명. 잔피에로 콤비, 리카르도 사모라,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었지만 대표팀의 활약이 다소 불운하게 진행되어 그들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1926년부터 1929년까지의 이탈리아 축구 1부 리그이다. 1929년부터 세리에 A가 출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일부 기록에 따르면 1938년 월드컵 당시 포초의 원래 선발 골키퍼는 체레졸리였지만 여기서도 부상으로 인해 올리비에리가 대안으로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이라면 체레졸리는 국가대표로써는 지독히도 운이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