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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루트비히(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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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E5C2><colcolor=black>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
Erzherzog Karl Ludwig von Österreich
파일:Archduke_Karl_Ludwig_of_Austria.jpg
이름 카를 루트비히 요제프 마리아
(Karl Ludwig Josef Maria)
출생 1833년 7월 30일
오스트리아 제국 쇤브룬 궁전
사망 1896년 5월 19일 (향년 62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배우자 작센의 마르가레테 공주[1] (1856년 결혼 / 1858년 사망)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
(1862년 결혼 / 1871년 사망)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테레자 (1873년 결혼)
자녀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토 프란츠, 페르디난트 카를, 마르가레테 조피, 마리아 안눈치아타, 엘리자베트 아말리
아버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어머니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형제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
파일:Anton_Einsle_Erzherzog_Karl_Ludwig_1848.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3. 자녀4. 여담

[clearfix]

1. 개요

카를 루트비히 대공은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공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의 동생이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유명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이자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1833년 오스트리아 제국 쇤부른 궁전에서 프란츠 카를 대공과 조피 프리데리케 대공비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황제는 그의 친할아버지 프란츠 1세였다.

2살 때인 1835년 할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하고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가 제위에 올랐으나 페르디난트는 심각한 지적장애로 일상생활조차도 심하게 불가능하여 결국 불안정한 치세 속에서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다 결국 1848년 조카인 큰형 프란츠 요제프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물러나야 했다.

그런 불안정한 치세 속에서도 카를 루트비히는 장남도, 차남도 아닌 삼남이었기에 황위 후계자로서 엄격한 후계자 수업을 받던 형들에 비하면 비교적 널널한 수업을 받았으며 이때 그는 지도교사에 의해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자라게 되었다.

오랫동안 제위에 앉으면서 다사다난한 재위기간을 보냈던 큰형 프란츠 요제프 1세만큼은 아니지만, 카를 루트비히 역시 다른 의미에서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냈다.

1856년 정략결혼으로 결혼한 작센의 마르가레타와는 금슬이 좋았으나 불과 2년 만인 1858년 장티푸스로 불과 18살에 사망함으로서 자녀 없이 사별하게 되었다.

1862년 양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도 2세의 딸 마리아 안눈치아타와 재혼하여 훗날 황위 승계 예정자가 될 프란츠 페르디난트 포함 3남 1녀를 낳았지만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1870년 막내딸을 출산하자마자 급격하게 위독해졌고 불과 그 이듬해인 1871년 5월 4일 결핵으로 28세에 요절했다.

1873년 세번째로 포르투갈 왕국 미겔 1세의 딸 마리아 테레자와 재혼해 두 딸을 보았다.

카를 루트비히는 계승서열 1위인 장조카 루돌프 황태자, 2위인 둘째형 막시밀리안이 있었기에 3위인 방계 황족으로서 삶의 대부분을 방계 황족으로서 평범하게 보냈으나 멕시코의 황제로 있던 둘째형 막시밀리아노 1세가 1867년 총살, 장조카 루돌프 황태자가 1889년 마이얼링 사건으로 자살하자 졸지에 큰형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896년 5월 19일, 카를 루트비히는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장티푸스에 걸린 이유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성지에서 따온 물을 성스럽게 여겨 매일 마시고 다녔다가 물에 장티푸스균이 옮아서였다.(...) 이후 계승권은 장남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이었다.

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Maria Annunziata di Borbone-Due Sicilie)
1남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Erzherzog Franz Ferdinand)
1863년 12월 18일 1914년 6월 28일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
슬하 2남 1녀[2]
2남 오토 프란츠 대공
(Erzherzog Otto Franz)
1865년 4월 21일 1906년 11월 1일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3]
슬하 2남[4]
3남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
(Erzherzog Ferdinand Carl)
1868년 12월 27일 1915년 3월 12일 베르타 추베르
1녀 뷔르템베르크 공작 부인 마르가레테 조피
(Herzogin Margarete Sophie von Württemberg)
1870년 5월 13일 1902년 8월 24일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슬하 3남 4녀[5]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테레자
(Maria Teresa de Portugal)
2녀 마리아 안눈치아타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nnunziata)
1876년 7월 13일 1961년 4월 8일
3녀 리히텐슈타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 공자비
(Erzherzogin Elisabeth Amalie)
1878년 7월 7일 1960년 3월 13일 리히텐슈타인의 알로이스 공자
슬하 6남 2녀[6]

4. 여담

  • 아버지 프란츠 카를과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삼남이고, 방계 황족으로 자유롭게 살았고, 형들이 후계자가 없어서 다음 황위계승자가 되었으나, 둘 다 황제가 되지 못하고, 아들이나 손자가 황제가 되었으며,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구성원들이[7] 프란츠 카를, 카를 루트비히의 자손들이여서 두 부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시조가 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란츠 카를은 아들들이 황제가 되는 걸 봤고, 한번 결혼해서 사별할 때까지 마누라한테 갈굼받으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했고, 아내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카를 루트비히는 3번 결혼했고, 첫번째 아내 작센의 마르가레타 공주, 두번째 아내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황제가 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만약 멕시코 제2제국이 유지되었다면 둘째형 막시밀리아노 1세의 뒤를 이어 멕시코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8] 다만 큰형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후에는 계승권이 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1] 작센 국왕 요한과 이모 아말리 아우구스테의 5녀로 이종사촌이다. [2] 노스티츠라이네크 백작부인 조피, 호엔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호엔베르크 후작 에른스트. [3] 게오르크의 4녀이자 페르난두 2세 마리아 2세의 외손녀이다. [4] 카를 1세 등. [5] 뷔르템베르크 공작 필리프 알브레히트 등. [6] 프란츠 요제프 2세 등. [7] 방계인 토스카나 대공가와 헝가리 궁정백 가문은 더 윗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이들의 남계후손이 아니다. [8] 막시밀리아노 1세는 매독 때문에 수은 치료를 받다가 불임이 되어서 총살되지 않았더라도 자녀를 만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