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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체르머니크 야노시 요제프 (Czermanik János József)[2] |
출생 | 1912년 5월 2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피우메 (現 크로아티아 리예카) |
|
사망 | 1989년 7월 6일 (향년 77세) |
헝가리 인민 공화국 부다페스트 | |
소속 |
헝가리 사회노동당 (
1956년 ~
1989년) 헝가리 노동인민당 ( 1948년 ~ 1956년) 헝가리 공산당 ( 1931년 ~ 19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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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사회노동당 서기장 겸 장관회의 주석으로 두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한 정치인.동구권에 속했던 헝가리에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 구야시 공산주의(Gulyáskommunizmus, Goulash Communism)'를 표방하며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이 덕분에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도 헝가리가 체제 전환을 순조롭게 하여 동구권 내에서도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러한 경제적 성과와는 별개로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너지 임레의 처형에 관여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2. 초기 생애
1912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방 도시인 피우메(Fiume, 현 크로아티아 리예카·Rijeka)에서 군인 크레징게르 야노시(Krezinger János)와 하녀 체르머니크 보르발러(Czermanik Borbála)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1918년에 모친과 함께 수도 부다페스트로 이주했고 1928년 경부터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서적을 접하면서부터 공산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했으며 193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호르티 미클로시 정권 하에서 당국에 의해 여러 번 체포되기를 반복하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점령당한 헝가리가 1946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에 의해 공산화되자 조직력을 인정받아 내무부 간부의 자리에 올랐는데 개혁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던 그는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라코시 마차시에 의해 강력한 탄압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지만 스탈린의 사망 직후 너지 임레가 총리 자리에 오르자 사면받고 부다페스트의 지역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3. 1956년 헝가리 혁명
1956년에 발생한 헝가리 혁명 당시 그가 보인 행적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은데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0월 25일에 그가 신정부에 의해 당 서기장에 오르고 너지 임레의 내각 구성에도 참여하는 등 개혁 작업에 참여한 적도 있지만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해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곧바로 소련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며 혁명 주동자 체포에도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적으로 인해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그가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었으며 그가 사망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던 1989년에 이르러서야 공개적인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여하튼 그는 헝가리 혁명 이후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는데 헝가리 혁명 이후 5년 남짓의 기간 동안 26,000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정확히 277명이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고[3][4] 정확히 21,668명이 투옥되었으며 16,000~18,000명이 추방되었고 소련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수백 명이 소련의 군법회의에서 처형되었으며 약 860명이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헝가리에서는 1959년, 1963년에 많은 수감자들이 사면되긴 했으나[5] '중요하다'고 판단된 수감자들은 1970년대에야 사면되었다.
4. 개혁 정책: 구야시 공산주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굳힌 그는 이후 곧바로 경제 개혁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 경제 계획은 주로 시장 경제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경공업 육성을 통한 소비재 생산 증가 및 부분적인 이윤 추구 허용도 신 경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고 서방권 문화도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다만 급격한 개혁을 추진했다가 처형당한 너지 임레와는 달리 카다르는 소련을 의식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개혁을 추진해 나갔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에도 헝가리군을 바르샤바 조약기구 소속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시키는 등 친소 노선을 밟아갔다. 이러한 개혁 정책과 부분적 문화 개방 정책은 꽤 성과를 거두어 헝가리는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 가장 삶의 질이 높은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동 시기 유고슬라비아 등 일부를 제외한 타 공산권 국가들처럼 물품이 일찍 동이 나거나 제한적 배급을 해서 줄을 길게 서야 된다거나 하는 일어나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다만 그가 이 같은 개혁 정책을 1970년대 들어서 더 급진적으로 시행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공산당 내부에서 반발이 잇달아 충돌을 빚기도 했으며 이 같은 경제적 성과들이 상당수 서방의 외채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석유 파동에 따른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벌어지자 헝가리도 빚더미에 오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정책은 계속 이행되어 헝가리는 1982년 IMF에 가입하게 했다. 이러한 헝가리의 개혁 정책은 중국의 덩샤오핑이 시행한 개혁 개방 정책보다도 20여년 가까이 일찍 이루어진 것이며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의 영향으로 소련을 포함한 타 동구권 국가들도 이를 따라하게 된다.
5. 말년
경제 위기가 동구권을 강타하고 민주화 열망이 점점 높아져가던 1988년 봄 그는 경제 위기에 따른 책임 의식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당 서기장 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경제적 개혁 작업 뿐만 아니라 정치 개혁 작업도 속도를 내게 되어 1989년 초부터 헝가리에서 민주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 승인과 함께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첫 막을 열었다. 사임 이후 자택에 은거하던 그는 사망 직전 자신이 너지 임레의 처형에 관여했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너지 임레의 국장이 31년만에 이루어져 헝가리 혁명이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인 재평가를 받은 지 20일이 지난 7월 6일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6. 여담
사망 직후 한동안은 헝가리 혁명에서의 행적 때문에 온 헝가리인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지만 헝가리의 순조로운 체제 전환과 동구권 내 입지 강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2007년에는 가장 능력있었던 헝가리인 정치인 중 3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헝가리 경제가 잠시 막장을 달리던 2000년대 후반에는 카다르 정권 시절에 대한 향수가 더욱 깊어져서 헝가리인들의 과반 이상이 공산주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집권 여당이 공산당의 후신인 헝가리 사회당이었고 사회당 정권에서 사회복지축소 등의 긴축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정작 당시 만연했던 그에 대한 향수를 잘 이용한 인물이 우파 정당 청년민주동맹 소속의 오르반 빅토르였고[6]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가 압승한 후 사회당은 극우 정당 요빅과 2-3당을 다투는 신세가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서는 그를 증오하는 여론이 상당하며 2007년 5월 2일에는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그의 묘가 파괴되어 유해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1]
헝가리는 동아시아처럼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기 때문에 성씨가 '카다르', 이름이 '야노시'다.
[2]
이탈리아인 병원인 산토 스피리토(Santo Spirito) 병원에서 태어나서 출생 당시에는 이탈리아어식인 '조반니 주세페 체르마니크(Giovanni Giuseppe Czermanik)'로 기록되기도 했다.
[3]
참고로 혁명 이후 헝가리 혁명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1956년에 9명, 1957년에 83명, 1958년에 116명, 1959년에 67명, 1960년에 11명, 1961년에 8명, 총합 294명에 달한다.
참고 자료 참고로 최대 처형 추정치는 무려 400명에 달한다.
[4]
사실 1945년부터 1988년까지 헝가리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1,200명이 넘지만 이들 중 90%가 1961년 이전에 처형되었고, 1963년부터 1988년까지 처형된 사람은 102명(대부분 살인범)으로 급감했다.
[5]
실제로 1963년 3월 21일 하루에만 무려 3,480명이 동시에 석방되었다.
[6]
2010년대 재집권 이후에는 권위주의적인 행보 때문에 눈총을 많이 사지만 카디르 야노시가 물러난 후 치러진
너지 임레의 장례식에서 소련군의 철수와 전면적 다당제-자유선거 시행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정도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