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치카모가 전투 Battle of Chickamaug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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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63년 9월 18일 ~ 9월 20일 | |
장소 | ||
교전국 | 미합중국(북부) | 미연합국(남부) |
지휘관 |
윌리엄 로즈크랜스 조지 H. 토머스 |
브랙스턴 브래그 제임스 롱스트리트 |
병력 | 60,000명 | 65,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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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 전쟁 기간에 벌어진 전투 중 하나. 1863년 9월에 테네시로부터 산맥을 건너서 조지아로 침투해온 북군 컴벌랜드군(Army of the Cumberland)과 남군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이 맞붙은 전투이다. 남북전쟁 서부전선의 주요 전투 중에서 유일하게 남군이 승리한 전투로 꼽힌다.2. 배경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제 막 안정이 된 테네시주에 주둔한 컴벌랜드군의 로즈크랜스 장군에게 조지아로 진군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한동안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미루면서 해당 방면의 철도를 깔면서 보급과 병력을 받으면서 준비 작업을 한다. 그 일환으로 6월 말 조지아로 가는 길목에 있는 툴라호마를 공략하는 작전을 벌인다. 이에 맞서서 남군의 지휘관 브랙스턴 브래그는 유리한 방어 위치를 선점했지만, 로즈크랜스는 브래그를 속이는 여러 기동을 통해 주요 교통로를 장악했고, 브래그는 후퇴를 반복하다가 결국 조지아의 채터누가까지 물러난다. 로즈크랜스의 툴라호마 전역은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한 기동 중 하나로 꼽히며, 북군은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툴라호마를 점령하고 중부 테네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군 또한 인명 피해가 적은 편이었고, 이는 치카모가에서 남군이 성공적으로 반격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툴라호마 전역의 전과는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게티즈버그 전투와 빅스버그 포위전이라는 대전과에 묻혀 버렸다.이렇게 마침내 진격로가 확보되자 링컨과 연방군 총사령관 헨리 할렉은 다시 로즈크랜스에게 진군을 종용했다. 1863년 8월, 컴벌랜드군 6만은 험준한 아팔라치아 산맥을 넘어서 조지아로 향한다(치카모가 전역). 북군이 목표로 삼은 것은 채터누가였다. 여기는 캐롤라이나부터 미시시피 일대의 철도가 지나가는 딱 중간인 지점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면 남군을 양분해서 서로 협조 못하게 만들 수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길은 산골짜기와 숲과 하천이 매우 많아서 북군은 기동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로즈크랜스는 3개로 군대를 나누어서 움직이는데 빠르게 기동해서 채터누가의 브래그의 4만의 군대를 포위해서 제2의 빅스버그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북군이 아팔라치아를 빠져나와서 채터누가 근방에 나타나자 남군의 브래그는 빠르게 채터누가를 포기하고 보다 남쪽의 마을로 후퇴한다. 때문에 로즈크랜스의 포위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찌되었던지 단 한번의 교전없이 북군은 채터누가를 점령했다. 하지만 남군의 브래그는 급히 지원군을 요청한다. 채터누가를 잃으면 내륙이 양단된다는 점에 위기감을 느낀 남부는 빅스버그 점령 때도 보내지 않았던 동부군을 제임스 롱스트리트 지휘하에 차출하여 급파한다. 이로 인해서 북군은 작전 시작에 누렸던 3:2의 숫적 우세가 뒤집혀서 오히려 약간 더 많은 수의 남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북군이 3개로 나뉘어있고, 서로 공조가 힘든 상황이란 것을 간파한 남군은 통합병력을 지휘하게 된 브래그의 지휘 아래 북군에 대한 기습을 가한다. 하지만 남군은 연이은 패전 소식으로 사기가 꺾인 상태였고, 남군 사단급 지휘관들은 소극적으로 군대를 움직이면서 기습의 기회를 날려버린다. 브래그는 노발대발하며 공격을 명령을 재차 내리지만, 이미 북군은 반나절 사이에 빠져나가버린 이후였다.
남군이 각개격파를 노린다는 것을 깨달은 북군은 3개의 부대를 채터누가에 집결시키는 명령을 내리는데, 길이 워낙 험준해서 길고 얇게 행군해야만 했다. 길게 늘어져 움직이는 북군을 발견한 남군은 다시 한번 기습의 기회를 포착하고 공세에 나서는데, 이것이 치카모가 전투이다.
3. 진행
첫째날 북군의 민티 기병여단과 와일더 보병여단이 북쪽의 다리 2개에서 하루종일 영웅적인 지연전에 나서면서 남군의 공격은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특히 와일더가 방어하는 다리는 끝내 장악에 실패하고, 남군은 어쩔 수 없이 방금 민티 기병대를 쫒아내고 겨우 얻은 다리를 통해 군대를 움직여야만 했다. 이렇게 남군의 움직임이 지지부진한 동안 북군의 토머스 군단은 재빨리 접근해서 다리를 건너오는 남군을 마주보고 반원 모양의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해버린 상태였다. 남군은 측면으로 들어가서 공략을 시도하지만, 강과 북군의 간격이 너무 좁아서 우회기동이란 것이 가능할 여지가 없었고, 매우 지지부진한 공격에 머무른다. 혹자는 남북전쟁 통틀어서 가장 답답한 공격으로 꼽기도 한다.이렇게 북쪽이 안정된 것을 확인한 북군의 로즈크랜스는 북쪽을 조지 H. 토머스 장군에게 맡기고, 본인은 남부 방면을 지휘해 방어한다. 남쪽은 북군이 길게 늘어져서 취약했지만, 이동이 느린 남군의 공세 또한 애초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양측은 이 지역의 하천과 숲 속을 뛰어다니며 게릴라전을 방불케하는 혼란스러운 전투를 치러야 했으며 심지어 중대 단위의 지휘마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북군의 두 장군은 첫 이틀간은 모범적인 공조를 통해 남군을 잘 방어한다.
그러나 셋째 날 로즈크랜스의 착오로 남쪽의 병력 일부가 후방으로 빠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지난 이틀간의 전투에서 북쪽의 토마스가 병력 열세로 적의 2개 여단의 후방 침투를 허용하면서, 큰 위기에 빠졌던 만큼 2개 여단을 남쪽에서 줘야한다고 로즈크랜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2개 여단이 빠져나가서 생긴 전선의 갭을 우드 사단으로 하여금 메꾸라고 명령하는데, 우드는 이 명령을 받고서는 의아해한다. 왜냐면 실제로는 위 2개 여단은 아직도 제자리에 있었기 때문. 오히려 우드 사단은 전선의 가운데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드사단이 이동하면 커다란 구멍이 생길 상황이었다. 로즈크랜스가 지난 며칠간 전투의 압박감에 전혀 잠을 못자고 있었는데 여기서 나온 실수였던 것이다. 로즈크랜스가 거듭해서 명령을 내리고 군단장도 바로 다른 부대로 메꾸겠다고 설득하자 우드는 마지못해 움직이는데, 문제는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여기에다가 5개 여단을 밀어넣을 생각을 하고 막 공격을 시작하는 찰나였다는 것이다. 롱스트리트는 북군의 이러한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앞의 이틀 동안 남군 중앙을 지휘하면서 한번은 중앙에서 남쪽방향으로, 다음날은 중앙에서 북쪽방향으로 공격했다가 북군의 방어에 각각 막혔었다. 그래서 어차피 남군 중앙에서 북군 중앙을 공격한것만 선택지로 남은 상황이었다. 다시말해 여기저기 찔러보다가 운좋게 얻어걸린 것이었다.
이에 남군이 집중 공격을 받은 남쪽의 로즈크랜스의 부대는 롱스트리트에 의해서 양분되면서 붕괴한다. 다행히도 북쪽에 있던 토마스의 군단이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남군을 저지하는데, 이틈에 로즈크랜스는 가까스로 언덕하나를 끼고 방어선을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남군은 쏟아지듯이 북군의 양 측면으로 밀려들어오고, 이로 인해 반포위 당하자 북군은 야음을 틈타서 철수를 결심한다. 이 와중에 두개의 연대가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군의 집중 화망에 걸려서 결국 포로로 잡히지만, 북군은 채터누가로 철수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남군이 결국 해당 지역을 확보했으나 무리한 공세가 첫째와 둘째날에 집중되면서 인적 피해는 오히려 이쪽이 컸다.
4. 결과
북군 16,000명, 남군 18,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는데, 남북전쟁 통틀어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승리한 브래그의 남군은 채터누가로 후퇴한 로즈크랜스의 연방군을 포위하여 보급을 차단했고, 이에 연방군은 포위를 풀기 위해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테네시군, 조 후커의 포토맥군 분견대 등 대규모 지원군을 파견하여 채터누가 전역으로 이어지게 된다. 북군이 채터누가로 좁은 보급로를 연결한 뒤 고지대에 자리잡은 남군을 몇 번의 공세 끝에 몰아내면서 채터누가의 포위는 풀렸고, 남군은 기껏 확보한 지역을 내주고 다시 후퇴해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성공적인 방어를 펼친 조지 토마스는 "치카모가의 바위"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인으로 떠올랐지만, 반면에 지휘관이었던 로즈크랜스는 율리시스 그랜트에게 찍혀서 결국 물러나야만 했다. 토머스는 로즈크랜스를 대신해서 컴벌랜드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후 채터누가 전역과 애틀랜타 전역, 내슈빌 전투까지 활약했다.
5. 기타
-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제임스 A. 가필드 또한 로즈크랜스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토머스를 보고 "토머스가 바위와 같이 버티고 있다"는 말을 남겨 토머스의 별명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 롱스트리트의 돌격으로 무너진 북군의 부대 중에는 나중에 북군의 기병대장으로 활약하는 필립 셰리든의 보병사단도 있었다. 셰리든은 자신의 사단을 최대한 규합하여 후퇴하다가 조지 H. 토머스가 전장에 남아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와 합류하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비록 토머스와 합류하는 데는 실패하고 다시 후퇴했지만 그의 시도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