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質
(? ~ 1015)
1. 개요
고려 제8대 현종때의 무신으로 2차 여요전쟁 당시 중랑장이며, 전후 상장군에 역임되었다. 김훈·최질의 난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1015년(현종 6)에 반란 진압과 동시에 처형당했다.2. 생애
중랑장으로 있던 중 1010년에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에서 강조 휘하의 고려군이 통주에서 크게 패배했을 당시 거란( 요나라)군에서 노전과 마수 등을 통주성에 사신으로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때 최질은 홍숙과 함께 노전 및 마수를 역으로 붙잡아 거란군에게 계속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1] 그렇게 항전론을 관철시킨 최질은 홍숙, 이원구, 최탁, 채온겸,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통주를 끝까지 지켜내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이렇게 북변을 지킨 전공으로 여러 차례 무반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정작 문관에는 임명되지 않아서 평소 이에 대해 크게 원망하다가[2], 때마침 중추원의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3]가 경군의 영업전으로 문관들의 녹봉을 충당하면서 영업전을 빼앗기게 되자 1014년 11월 25일에 김훈, 박성, 이협, 이상, 이섬, 석방현, 최가정, 공문, 임맹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그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간 다음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려 거의 초주검으로 만든 뒤 이들을 귀양보내고, 그 후 상참관 이상의 무관은 문관을 겸하게 해달라며 현종에게 협박성 요구를 해서 결국 이 또한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다.[4]
하지만 1015년 4월 5일에 현종이 이자림[5]의 계책에 따라 장락궁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당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술에 취한 사이에 최질은 김훈 등 18명과 함께 그대로 주살되었다.
3. 대중매체
- < 천추태후>에서 1차 여요전쟁 때부터 등장한다. 배우는 최왕순.
3.1. 고려 거란 전쟁
[1]
다만, 노전이 제9대
덕종때까지 고위직에 오른 기록이 있고, 훗날
충선왕 즉위년에는 노전과 더불어 서희, 양규, 하공진의 손자와 현손에게 관직을 주라는 내용의 교서를 충선왕이 내린
기록이 있는지라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요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세 명처럼 공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다.
[2]
고려는 무관들이 조선처럼 종2품 이상으로 승품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탓에 더 높게 승품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문관에 임명되어야만 했다. 참고로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종2품 이상으로 승품이 가능하여, 조선 초기 일부이긴 하지만
조영무나
최윤덕 같은 무관 출신 정승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3]
참고로 장연우는 거란의 제2차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도망쳤을 때 왕을 호종하던 신하들이 대부분 도망치던 와중에도 몇안되게 현종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다.
[4]
고려사에 따르면 여러 전공을 세웠으나, 문관이 되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5]
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국성인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이자림의 첫째딸은 현종의 후궁이고, 둘째딸은 제9대
덕종의 2비인 경목현비이며, 아들은 제11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때 처벌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인 왕무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