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 |||
|
|||
출생 | 1897년 7월 3일 | ||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3] |
|||
사망 | 1965년 5월 11일 (향년 67세) | ||
서울특별시 성동구 도선동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46호 | ||
본관 | 경주 최씨[4]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학력 | 윈난성 육군무관학교 (졸업)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1 | ||
별칭 | 해광(海光) |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노태우 정부 때 제29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최세창은 그의 아들이다.[5]
2. 생애
2.1. 해방 이전
1897년 7월 3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부 명치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8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1909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안희제, 이수영(李遂榮), 배천택(裵天澤), 남형우, 김동삼, 김사용(金思容), 윤세복(尹世復), 김홍량 등과 함께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6년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망명하여 독립단 소속 배천택 등과 함께 만났고, 이어 윈난성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가을에 졸업하였다. 이후 윈난성 신군(新軍) 장교로 임관하여 윈난성 다리현(大理縣)[6]에 주둔한 제2사단 본부에서 복무하여 중위에까지 올랐다.[7]
1919년 3.1 운동 직후, 그해 5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군대에서 퇴역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9월 임시정부로부터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8]에 파견되어 군무국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하다가 그해 10월경 군자금 모금을 위해 경기도 경성부로 입국하였다. 이때 이수영· 이동하(李東廈)· 박중화· 이경희· 이원혁(李源赫) 등과 여러 차례 만나 조선 내 각지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모의를 하던 중 체포되어, 약 1개월간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그해 12월경에 풀려났다.
그후 위 동지들과 조선 내지 및 국외의 연락을 취하기로 약속한 뒤 고향 경상북도 대구부를 들렀다가 다시 중화민국으로 돌아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에 취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 때 김좌진 장군 휘하 지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고, 만주지역에서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대한독립군 의용단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동료 배천택의 권유로 다시 베이징시로 갔고, 6월에 베이징시에서 개최된 해외 소재 조선인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 회의격인 군사통일책진회(軍事統一策進會)에 참석하였다. #
1924년 5월 18일 조선일보 기사에 삽입된 사진. |
1921년 9월 귀국하여 대구부에 곡물상을 열어 겉으로는 상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1922년 9월부터 경성부 인사동 장안여관에서 이곳에 기거하던 이수영 및 여러 동지들과 회합하여 군자금 모금에 대한 모의를 계속하던 중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의 홍정수(洪禎修, 1878 ~ 1964. 1. 17)[9]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에 1923년 12월 3일 홍정수의 자택으로 가던 중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근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관련자인 송두환(宋斗煥)·이수영· 노기용· 정동석· 정두규(鄭斗奎)· 정두은(鄭斗殷)· 정내영(鄭騋永)· 김봉규(金鳳奎)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폭발물취체벌칙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강도 예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 90일 산입)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6년 9월 29일 가출옥하였다.
1928년 12월 16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출옥한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운남육군강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귀국하였는데, 불명의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9월 11일 경기도경찰부 유치장에 투옥되었다가, 그해 10월 29일 무사 방면되었으며, 위 사진처럼 이후 한 차례 더 구류되기도 했다.
그 뒤 신간회 대구지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8년 중외일보사 창립에 참여하여 영업국장,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중외일보사 이사 #를, 1934년 상무이사를 거쳐 이후 전무취체역에 취임하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경북상공주식회사 감사를 맡기도 했다. #
2.2. 해방 이후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한국민주당에 입당, 중앙본부 연락부장 및 중앙상무위원 등에 취임하였다.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 부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국방·외무위원장을 맡았다.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외무국방위원회실에서 내무차관 황희찬과 국방부참모장 채병덕을 초청하여 여순사건 관련 회의를 주도하였으며,[10] 10월 29일에는 직접 사건 현장에가서 국회에 보고를 하였다. 그는 현지조사에서 반란군이 재작년부터 군에 잠복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말했고, 반란군에게 대략 2000여명이 희생당했다고 말했다.[11] 11월 외무국방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외무국방위원회에서 회부된 국군조직법을 국회에서 설명, 질의응답하여 국군조직법 제정에 큰 힘을 쏟았다. 한편 그는 국군조직법을 설명하면서 11월 20일 대한민국의 방비 태세가 정비될 때까지 미 주둔군의 남한 주둔이 필요를 인정하는 '미군주둔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1949년 7월에는 병역법을 국회에서 설명 질의응답 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경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대구 코앞까지 밀어닥치자, 발벗고 나서서 독자적으로 학도병 모병 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모인 학도병들은 제1 유격대대에 편입되어 장사 상륙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후 1957년에는 김준연의 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는 육해공군 출신 청년 의용단 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5년 5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도선동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경북 대구 갑[12]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8,577표 (38.52%) | 당선 (1위) | 초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
2,052표 (5.9%) | 낙선 (5위) |
4. 둘러보기
경상북도 제헌 국회의원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
대구 갑 | 달성 | 군위 | ||
최윤동 | 서상일 | 백남채 | 김우식 | 박준 | |
의성 갑 | 안동 을 | 청송 | |||
정우일 | 권병노 | 김익기 | 임영신 | 김봉조 | |
영양 | 영덕 | 영일 갑 | 영일 을 | 경주 갑 | |
조헌영 | 오택열 | 박순석 | 김익노 | 김철 | |
경주 을 | 영천 갑 | 영천 을 | 경산 | 청도 | |
이석 | 정도영 | 이범교 | 박해정 | 박종환 | |
고령 | 성주 | 칠곡 | 김천 갑 | 김천 을 | |
김상덕 | 이호석 | 장병만 | 권태희 | 이병관 | |
선산 | 상주 갑 | 상주 을 | 문경 | 예천 | |
육홍균 | 한암회 | 전진한 | 조병한 | 박상영 | |
영주 | 봉화 | 울릉 | |||
최석홍 | 공석 | 서이환 | |||
* 안동 을
정현모 사퇴 (1948.10.18.) * 봉화 배중혁 자격상실 |
|||||
제2대 ▶
|
}}} }}}}}} |
{{{#!wiki style="margin: -7px -10px -10px;" {{{#!wiki style="margin: -6px 0px -1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ADFF2F><tablebgcolor=#ADFF2F> | }}} {{{#!wiki style="margin: -5px -2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ADFF2F><tablebgcolor=#ADFF2F>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
홍성하 | 이영준 | 지청천 | 김도연 | 김상돈 |
김동원 | 최국현 | 신익희 | 이진수 | 서정희 | |
조중현 | 신현모 | 최석화 | 홍길선 | 이재학 | |
원용균 | 홍범희 | 장기영 | 황호현 | 원장길 | |
최헌길 | 이만근 | 김교현 | 송필만 | 유진홍 | |
임석규 | 이상돈 | 나용균 | 김종문 | 백관수 | |
조한백 | 홍희종 | 이석주 | 정해준 | 진직현 | |
이정기 | 정광호 | 정균식 | 서우석 | 김종선 | |
김문평 | 이정래 | 조국현 | 김준연 | 김용현 | |
장홍염 | 김상호 | 조영규 | 김상순 | 최윤동 | |
서상일 | 백남채 | 박종환 | 김상덕 | 최석홍 | |
허정 | 한석범 | 박해극 | 최봉식 | 이원홍 | |
오용국 |
}}} }}}}}} |
[1]
이명은 최진(崔震).
[2]
1924년 11월 6일 형사사건부에는
[3]
#
[4]
#
[5]
아들인 최세창은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아버지외는 정반대로 휘하 병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하여 직속상관을 강제 연행하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기총소사를 지시하는 등 군사반란과 시민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
현
중화인민공화국
윈난성
다리 바이족 자치주
다리시
[7]
#
[8]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라고도 한다.
#
[9]
부림홍씨세보 권상 994쪽 참조.
[10]
당시 국회는 휴회였어서 어쩔수 없이 외무국방위원회실에서 모인것이라고 한다.
[11]
출처:제1대 국회 제1회 제94차 국회본회의
[12]
제1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