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4E6FA><colcolor=gold> 천관녀 | 天官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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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관사지터 전경 | |
생몰년 | 미상 |
이름 | 천관(天官) |
등장 문헌 | 이인로의 《 파한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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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진평왕 시대, 김유신이 아직 화랑이던 시절 사귀었던 기생 혹은 신녀. 녀( 女)는 성별을 나타내기 위해 붙었으니 정확히는 '천관'이라고 해야 맞을 수도 있다.[1] 일반적으로 '천관녀'로 저명성이 있고 나무위키도 이를 따랐지만 몇몇 백과사전에서는 이름을 '천관'으로 소개하고 있는 곳도 있다.
2. 생애
고려 시대의 문인 이인로가 지은 《 파한집(破閑集)》에 적혀 있는 이야기다. 화랑이던 젊은 시절의 김유신은 천관녀를 사랑해 그녀와 교제했다.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공을 세워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 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김유신은 그 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해서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말에 타고 집에 돌아가던 중 자신의 말이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서는 일이 생겼고 천관녀는 반갑게 김유신을 맞이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천관녀를 부르짖으며 말의 목을 그대로 베어 죽여 버렸다고 한다.
현재 김유신의 집이었던 제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천관사는 직선 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2]
천관녀는 김유신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하며[3] 한편으로는 김유신의 결단에 감동하여 신녀직을 그만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김유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천관사라는 절을 그녀의 집 자리에 지어서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천관사라는 절은 500여 년이 지난 고려 중기 이공승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쓴 것이 남아있어 그때까지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고 대한민국의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었다. 천관사지에는 반쯤 무너졌던 석탑을 재건해놨 고 말의 목을 자른 그림이 걸려 있다.
한편 '대태각'이라는 문구가 쓰인 신라시대 돌조각이 1974년 경주시 교동 천관사지 동편에서 발굴되었다. 이는 태대각간을 의미하는데 신라 최고의 관직으로 너무 높은 지위라서 중국의 상국처럼 신라 역사를 통틀어 생전에 이 관직에 오른 사람은 김유신밖에 없다.[4] 사실상 김유신 전용 관직이다. 이 문구가 천관사의 옛 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 천관사를 지은 것이 김유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천관녀가 나오는 이공승이 지은 시를 보면, 고려시대 사람이 보기에도 김유신이 말을 베어 죽인 게 너무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寺號天官昔有緣
忽聞經始一悽然
多情公子遊花下
含怨佳人泣馬前
紅鬣有情還識路
蒼頭何罪謾加鞭
唯餘一曲歌詞妙
蟾兎同眠萬古傳
절 이름 '천관'은 예로부터 사연이 있다더니
홀연히 듣고 나니 처연하다.
정이 많은 공자가 꽃 아래에 노닐 때
원망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더라
말은 정을 알아서 도리어 옛 길을 기억했는데
노복은 그것이 무슨 죄라고 부질없이 채찍을 때리는가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게 남아
세월을 따라[5] 만고에 전한다
忽聞經始一悽然
多情公子遊花下
含怨佳人泣馬前
紅鬣有情還識路
蒼頭何罪謾加鞭
唯餘一曲歌詞妙
蟾兎同眠萬古傳
절 이름 '천관'은 예로부터 사연이 있다더니
홀연히 듣고 나니 처연하다.
정이 많은 공자가 꽃 아래에 노닐 때
원망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더라
말은 정을 알아서 도리어 옛 길을 기억했는데
노복은 그것이 무슨 죄라고 부질없이 채찍을 때리는가
다만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게 남아
세월을 따라[5] 만고에 전한다
이걸 보면 고려 시대에 남아있는 천관사는 불교의 사찰이니 설사 신녀설을 따라 원래 천관사가 토속 신앙의 신궁이었다고 할지라도 김유신이 나중에 새로 지은 천관사는 사찰으로 만들었음이 맞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천관녀에 대한 사연은 없지만 천관사라는 절이 언급되기는 한다.
661년 2월 김유신이 김인문, 김양도 등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우회하여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에게 군량을 공급할 때[6] 서자 김군승(金軍勝)이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김군승을 김유신과 천관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김유신이 늦은 나이에 김춘추의 딸과 재혼하기 전에 이미 장성한 자식을 뒀을 것이라는 것. 김유신이 지소부인 이전에 교제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천관녀뿐이고 결국 정식 혼인은 하지 못해 아들을 낳았다면 서자가 되었을 테니 현재로선 추정 가능한 후보는 천관녀뿐이다.
3. 출신에 관한 논란
천관녀의 출신에 대해 기녀설과 신녀설이 있다. 기녀설이건 신녀설이건 그 출신을 해석하는 근거는 고려시대에 쓰인 이인로의 ' 파한집' 이다. '동국여지승람', '낙하생집', '동경잡기'등 조선시대의 사료도 있으나 너무 후대의 사료라서 생략한다.[7] 사료 해석을 위해 파한집 원문을 기재한다.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더하여 교유(交遊)함에 잊지 말도록 하였다. 하루는 천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만명부인은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의 자라남을 바라보고 있다. 공명을 세워 군친(君親)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음방에서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구나" 하면서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다시는 그 집앞 문을 지나지 않겠다" 고 하였다. 하루는 피로에 지쳐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김유신이 탄 말은 옛길을 따라서 잘못하여 창가(倡家)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천관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깨달은 바가 있어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은 버리고 되돌아왔다. 천관이 원망하는 노래를 한 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는데 즉 그 집이다.[8]
3.1. 기녀설
학계의 통설. 원 사료인 파한집에 술을 파는 기녀라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며 신녀라는 사료는 전무하다. 분명히 기녀라고 쓰여진 사료를 무시하고 몇 가지 구절만 뽑아내어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역사적 진실이라고 호도하는 것은 역사학계에서 경계하는 일이다. 그리고 천관이란 이름은 신라시대 인명으로 사용된 례가 존재한다. 참고, 참고23.2. 신녀설
사료상 직접 근거는 없으므로 여러모로 해석해야 되니까 내용이 길다.여기서 천관녀의 집이 천관사라고 불린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관사(寺)의 사(寺)는 불교의 사찰만이 아니라 신선교나 도교의 사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천관녀의 집을 천관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하다. 왜 그녀의 집에 사원을 뜻하는 사(寺)가 붙었을까? 이 점을 보면 천관녀의 이름이 천관이라서 천관사라 불렀던게 아니라 그녀가 있던 곳이 천관사라서 천관녀라 불렸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를 수 있다. 천관녀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이 '천관'이라서가 아니라 천관사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신궁의 여사제라서 천관녀라 불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천관녀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직업을 나타내는 명칭이라는 말이다. 사실 천관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관리라는 뜻인데 기녀의 이름치고는 너무 거창하다.
천관사 뒤편에는 도당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신라의 귀족들이 모여서 정사를 논한 곳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귀족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사령지라는 신령스럽게 여겨지는 곳에서 하므로 천관사가 신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신라시대 여사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박혁거세의 누이인 아노가 제사장이었다는 점, 화랑의 기원인 원화가 처음 담당했던것도 제사라는 점에서 분명하다.
천관녀가 기생으로 알려진 것은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토속 신앙인 여사제를 비하하기 위해 기녀라고 낮추어 보았을 가능성 또는 여자가 제사장이라는것이 고려나 조선의 사회에서 불경하게 비추어져 기녀로 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KBS에서 방송된 역사스페셜 '김유신은 왜 천관녀를 버렸나?' 에서 신녀설을 주장했다. 나중에 KBS 사극 대왕의 꿈에서도 신녀설을 택했으니 KBS는 이 설이 마음에 드는 듯하다. 한국여성학회에서는 아예 천관녀가 첨성대의 여사제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세계적으로는 무녀가 매춘 행위를 하는 것도 그리 드문 건 아니라서 기녀이자 신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딱히 근거는 없다.
3.3. 가야 출신설
김유신이 천관녀에게 반한 이유가 그녀가 김유신과 같은 금관가야 출신이라 가능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래도 신라에서 이방인과 같은 가야 출신이라 홀대를 받던 김유신을 유일하게 보듬어 주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김유신이 넘어갔다는 것이다.이는 김유신과의 사랑을 깨는 족쇄로도 작용하는데 만명부인 입장에서는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라 출세가 힘든 상황에서 애인까지 같은 가야국 출신일 경우 김유신에게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소설에서 가져온 설정으로 천관녀가 가야 출신이라는 것 혹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어떤 사료상에도 나타나있지 않다. 물론 어쩌면 정말 가야출신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증명해줄 사료가 전무하다. 가야 출신이라는 근거는 김유신이 천관녀에게 반했다는 것 뿐인데 남자가 여자와 고향이 같아야만 좋아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고향이 달라도 외모나 성품이 맘에 들어 반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 이게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창작물의 설정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설정이고 가야 출신이 아니라는 명시적인 사료도 없으므로 매체에서 이 설정을 따른다고 해도 고증오류까지는 아니지만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성(돌림자??)이 같은 천존, 천품 등과 혈연관계+가야 출신으로 묶어 버리는 창작물도 있다.
4. 대중매체에서
각종 창작물에서는 아무래도 술 파는 기녀보다는 신녀 쪽으로 러브스토리를 전개하는 편이 매력적이므로 대부분 신녀설을 택하는 편이다. 가야 출신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스토리가 될 수 있어서 이것을 택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위인전, 드라마 등 김유신의 소싯적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거의 항상 등장한다.4.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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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서는 김서라가 연기한다. 김유신과 같은 가야 출신 유민이며 가야금에 뛰어난 기녀로 나온다. 눈보라치는 산속에서 혼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죽을 뻔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김유신에게 구조되었고 나중에 서라벌에서 재회하여 정인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김유신 모친의 반대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그 후 김유신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낳아 군승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혼자 키운다. 훗날 군승은 무인이 되어 김유신 휘하로 들어가 김유신의 신임을 받게 되는데 김유신이 어떤 일로 군승의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옛날 정인 천관녀라는 걸 알고 놀라고 군승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 후로 군승은 이복동생이자 김유신의 적자인 원술과도 형님 아우하며 원만하게 지내다가 석문 전투에서 패전할 때 원술을 피신시키고 본인은 전사한다. 그런데도 천관녀는 원술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김유신에게 원술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말년에는 홀로 암자에서 지내며 불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에, 김유신의 영혼이 천관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김유신의 사망을 직감하며 애통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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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기타 창작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2절에 등장하는 '말 목 자른 김유신'도 이 일화를 말하는 것이다.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관련 2차 창작에서 등장할 때가 있다. 정확히는 천관녀 본인이 중심이기보다는 김유신을 천관녀에게 데려간 애마가 우마무스메로 등장하는 형태다.
[1]
같은 맥락으로
연오랑과 세오녀만 해도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는 '연오와 세오'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다.
[2]
사람이 천천히 걸어가면 약 10분 안에(열심히 걸으면 7분 안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천관사터에서 재매정택이 바로 내다보일 정도다. 가운데에 남천이 흐르는데, 김유신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이 걸어서 지나왔다는 것을 보아
월정교 근처에 있던(월정교는 아직 없었다)
유교(교량) 다리를 걸어서 왔을 것이다.
[3]
현대에는 전하지 않으나 이것이
원가와 같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4]
살아서 오르지는 못했지만
김인문이 사후 추증된 적이 있다.
[5]
원문은 蟾兎同眠(섬토동면)으로 두꺼비와 토끼가 함께 잤다는 뜻인데, 옛날 사람들은 달에 두꺼비와 토끼가 있다고 믿어서 蟾兎가 곧
달을 의미했다. 자세한 건
달두꺼비,
달토끼 문서 참고. 하여 달이 잤다는 뜻이니
태음력이 기준 역법인 시절이라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시적으로 뜻한 말이다.
[6]
이때 김유신이 소정방을 구원하지 않았다면 고구려군에게 죽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7]
참고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도 기생으로 나오며 낙하생집에서는 아예 기생집 여자 노비라고 나온다.
[8]
원문 : 金庾信鷄林人 事業赫赫布在國史中 爲兒時 母夫人日加嚴訓 不妄交遊 一日偶宿女隸家 其母面數之曰 {我已老 日夜望汝成長 立功名爲君親榮 今乃爾與屠沽小兒 遊戱 房酒肆也} 號泣不已卽於母前自誓不復過其門 一日被酒還家 馬遵舊路 誤至倡家 且欣且怨 垂泣出迎 公旣悟 斬所乘馬棄鞍而返 女作怨詞一曲傳之 東都有天官寺 卽其家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