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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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일 | 반일 | 지일 | 친일 | 일뽕 |
1. 개요
지일( 知 日)은 일본인이 아니면서도 일본 관련 지식이 전문가 수준인 사람. 지일파는 중도에 가깝다. 친일, 반일 등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으로, 어느 쪽에 가깝다고 할 수도 없다.굳이 구분을 하자면, 학술적인 측면이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설정 및 발전[1]을 위한 측면이든,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강조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무턱대고 일본을 옹호하는 일빠나 증오하는 혐일과는 다르다. 오히려 중도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비교적 굉장히 조용하고 이성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겉으로 자기들이 일본에 대한 관점이나 논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꺼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의 극우 성향의 인물들은 지일을 용일(요니치/用日)이라 부르고, 일본(日)을 써먹을(用) 생각으로 접근한다며 경계대상으로 보고있다. 일본 위키피디아의 용일 항목
동해/일본해 논란에 일본의 의견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의견 또한 비판하는 양비론을 주장하는 지일도 한국 측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하여 친일파로 몰리기도 한다. 동해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해는 대부분이 공해라 양쪽의 주권 문제와 상관없다.
역사학자중에서도 지일파들은 친일파로 매도당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예시로 김현구 교수가 있다.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 참고.
2. 지일과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6공화국 출범 이후로는 문민정부[2]를 제외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대일 정책이 대체로 이쪽에 속한다. 민주당계 정당 출신 정부 중에서는 국민의 정부[3]의 대일 정책이 여기에 속한다.3. 실존 인물
3.1. 역사상의 사례
- 세종대왕 - 일본과의 교류가 많았으며 일본의 일부 기술이 조선보다 뛰어나다며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 신숙주 - 조선시대의 외교부 장관 격인 예조의 판서로 재직하면서 조선통신사의 일원 내지 쓰시마 섬 교섭 등을 위해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또한 임종을 앞두고 "일본과의 화친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4]
- 신익희 -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해방 후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했으며 이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게 친일 몰이를 당했다.
- 여운형 -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일본어에 능통했고 해방 후에도 일본인을 위로하고 한일관계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 상당수의 조선통신사들 - 간혹 반일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도 있었으나, 이들이 남긴 기록인 사행록을 보면 상당수가 지일, 심지어는 (온건한 의미의) 친일 성향을 보인다. 애초에 조선통신사라는 것 자체가 일본과의 우호를 다지는 한편으로 일본을 더 잘 알기 위해 사정을 살펴볼 목적으로 파견된 것이기도 하다.
- 이익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일본의 정치 체제와 장래에 대한 통찰력 있는 저술을 남겼다.
3.2. 역사학자
- 김현구: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설 연구 학자. 대표적인 교양서로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한일분쟁의 영원한 불씨를 넘어서)'가 있다.
- 정재정: 한일관계사 전공. 대표적인 교양서로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가 있다.
- 하종문: 일본 근대사 전공 학자. 대표적인 교양서로 '일본사 여행 (역사기행으로 읽는 일본사)'이 있다.
-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를 저술하기 전인 2000년대까지는 지일파로 유명했다.
3.3. 정치학자, 정치인, 관료
- 김종필 - 1965년 한일수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현직 시절인 2001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에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한일의원연맹 초대 회장이기도 하며 젊은 시절에 일제강점기를 보냈기 때문에 일본어에 매우 능통했다.
- 김대중 - 대통령 취임 첫해인 1998년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수상과 한일 양국의 파트너십 공동 선언을 채택했다. 또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도 이루어졌다. 김종필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 일제강점기를 보냈기 때문에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 이낙연 - 동아일보 기자 시절 수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네이티브급으로 구사할 수 있다. 국회의원 시절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을 지냈다.
- 마이클 그린 -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정치인.
- 빅터 차 - 미국의 정치학자.
- 리처드 아미티지 - 미국의 정치인.
- 조지프 나이
- 브래드 글로서먼 - 미국 CSIS 퍼시픽 포럼 선임고문. <피크 재팬>(2019)의 저자.[5]
- 조세영 - 前 외교부 제1차관. 한국 외교계의 대표적 일본통으로 손꼽힌다.
- 박철희 - 서울대 교수. 국내 일본 외교, 대외정책에 관한 대표적 전문가들 가운데 한명. 2023년 현재 국립외교원 원장.
- 윤덕민 - 주일대사, 한국외대 LD학부 석좌교수.
3.4. 기타
[1]
대체로 우호와 협력에 방점이 찍히지만, 때로는 경쟁 및 극복이 강조되기도 한다. 당연한 게,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다 보면 화친이 정답이 아닌 경우도 종종 발생하며, 이 때 싸워 이기기 위해선 일단 적을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한일 무역 분쟁 당시 소부장 자립이다.
[2]
문민정부는 대일 강경책을 일관되게 추진했기에 따라서 지일을 하지 않았다.
[3]
국민의 정부의
대통령인
김대중과
국무총리인
김종필이 지일파로 분류된다.
[4]
이 말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전시재상
류성룡이 자신의 회고록인
징비록의 바로 첫 내용으로 인용했으며, 그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말이 되었다. 가령
아메노모리 호슈가
신유한에게 이 말을 하며 양국 간의 우호를 강조하기도 했다.
[5]
한국에서는 출간 이듬해인 2020년 6월 번역 출간되었다.
[6]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정확도와 객관성 면에서 비판 받지만, 유독
일본관련 영상 만큼은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