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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권보장동맹

중국민권보장동맹
中國民權保障同盟
China League for Civil Rights
파일:쑹칭링의 중국민권보장동맹 주석 인장.png
쑹칭링의 중국민권보장동맹 주석 인장
주석 쑹칭링
부주석 차이위안페이
창설 1932년 12월 17일(발기일)
1932년 12월 30일(정식 결성일)
해체 1933년 6월 이후[1]
1. 개요2. 배경3. 활동
3.1. 중국민권보장동맹의 성립3.2. 후스의 제명과 흔들리는 동맹3.3. 양싱포의 암살과 최종적인 와해
4. 주요 구성원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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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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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권보장동맹 회의 장면

중국민권보장동맹(中國民權保障同盟), 약칭 민맹(民盟)은 1932년 말부터 1933년까지 국민정부에 의해 체포된 정치범의 석방과 민권 신장을 위해 활동한 조직이다.

2. 배경

4.12 상하이 쿠데타 후 시민과 지식인들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정부의 무분별한 공산당 색출과 처벌로 인해 사회적 공포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민정부는 1928년 3월 9일 중국국민당과 국민정부를 전복하려는 이들을 '반혁명'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도록 하는 <잠행반혁명치죄법>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법은 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정치범을 체포할 때면 고소는 국민당부, 지명수배는 경비사령부, 구금은 공안국이 하는 등 정부가 내린 훈령이 무시되기 일쑤였고[2] 1929년 12월 2일 공포한 <반성원조례>에 따른 특수감옥인 반성원을 설치하여 그들을 가두었다. 또한 공산당원이라는 의심도 무분별하여 심지어는 공산당원만 맡을 수 있다는 우창 정치부의 중요직무를 맡았다는 이유, 국민당원의 소개 없이 직업을 구한다는 이유, 공산당원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 의심당하기도 하였다.

1931년 1월 31일 국민정부는 이전의 <잠행반혁명치죄법>을 대체해는 <위해민국긴급치죄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말 그대로 중화민국에 위해를 가하는 정치범의 처벌을 위해 반포된 법이었다. 그러나 그 정치범의 판단기준이 국민당 마음대로였기에 증거가 없음에도 국민당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정치범으로 몰아서 멋대로 체포, 구금할 수 있었고, 설령 실제로 정치범이더라도 인권이 침해받을 수가 있었다. 또 정부는 같은 날 발표된 <출판법>을 통해 국민의 언론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만주사변 이후 국민정부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 부저항주의에 대한 비토여론이 높아지자 장제스는 특무대인 남의사 조직은 물론, 앞선 <위해민국긴급치죄법>을 적용해 공산당, 반장인물과 더불어 항일애국운동까지 탄압하고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반혁명죄조례>,[3] <잠행반혁명치죄법>, <위해민국긴급치죄법>, <출판법>까지 이어온 당과 정부의 사법간섭과 인권유린에 지식인들은 감옥의 개선과 인권의 보장을 주장했다.

실제로 허베이성 제2감옥은 공산당 혐의자를 너무 잡아들인 나머지 1929년은 1,900명에 불과했던 수감자가 1932년에는 두 배에 달하는 3,500명으로 증가했고,[4] 감옥환경도 썩 좋지 않아 1930년 6월 2일 한 정치범이 병원을 가지 못해 감옥 안에서 사망하는 일도 있었으며, 한 달 뒤인 7월 2일에는 정치범 120명이 집단으로 단식하며 생활개선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에도 정치범들은 '더울 때는 면 옷 대신 홀 옷 제공, 매주 2회의 목욕, 봄에 종두 접종, 중환자의 외래진료와 환자에게 의약품 제공, 음식의 원상회복,[5] 주기적인 물 섭취, 신발 보급'의 기초적인 7가지 항목을 제시하며 최저한의 생존권을 요구하였다.

3. 활동

3.1. 중국민권보장동맹의 성립

사실 유명인사들의 민권활동은 동맹 결성 이전부터 있어왔다. 차이위안페이는 1927년 4~5월 공산당원에 대한 암살 정보를 입수하자 사람을 보내 피하도록 하기도 했고, 1928년 6월 29일에는 탄옌카이와 함께 옌시산에게 연락하여 체포된 사람을 풀어달라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쑹칭링도 1932년 6월 17일 코민테른 극동국 국장이자 범태평양직공회(노동조합) 비서였던 누란(Noulens) 부부가 상하이 영국조계에서 체포되자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사법부장 나문간을 만나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6] 10월 천두슈 등이 상하이에서 체포되자 차이위안페이, 린위탕과 함께 구조를 시도하기도 했다.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한 이들은 1932년 12월 17일, 쑹칭링, 차이위안페이, 양싱포, 린위탕, 려조실 등이 중국민권보장동맹을 발기하였고, 30일에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세워지게 된다.[7] 동맹은 상하이에 총회를 두었고 쑹칭링이 주석, 차이위안페이가 부주석, 양싱포가 총간사로 임명되었다. 동맹이 발기될 때 이들은 중국민권보장동맹 주비위원회의 명의로 선언을 발표하고 아래의 3가지를 목표로 잡았다.
1. 국내 정치범의 석방과 불법적인 구금, 혹형과 학살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고, 대다수 이름 없는 죄수를 위해 힘쓴다.
1. 국내 정치범에게 법률과 기타 원조를 하고 감옥 상황을 조사하며 국내에서 민권을 억압하는 사실을 공표하고 여론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1.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 등 민권을 위하여 노력 분투한다.

당시 국민정부는 천부적 인권 대신 쑨원의 혁명민권을 선전하였는데, 만약 천부적 인권을 실현한다면 공산당과 같은 반혁명분자까지 인권을 요구하게 되어 결국에는 혁명이 파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민당의 말을 잘 듣는 국민들만 인권을 주었고 국민당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는 인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혁명민권만을 주장했다. 이에 민권보장동맹도 자신들의 목적은 출판과 인신의 자유 등 초보적인 민권만을 주장한다며[8] 국민정부와 대립하지 않으려 했다.

동맹은 정부에 의해 체포·구금된 학생, 지식인, 공산당원 등이 겪은 불법행위나 가혹행위, 인권탄압을 언론에 폭로하였다. 또한 법률적 지원, 정부에 항의하는 등 직접적으로 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고, 해외의 유명인사인 아인슈타인, 존 듀이, 버트런드 러셀과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동맹은 이를 통해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얻으려 했고, 궁극적으로는 자유 휙득을 통해 국민과 국가의 역량을 총결집하여 효과적인 항일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까지도 목표로 생각했다.

동맹이 설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3년 1월 17일 중앙연구원에서는 상해총회에 이어 상해분회 창립대회가 열렸고, 30일에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모여 북평분회가 설립되었다. 상해분회와 북평분회에는 각각 차이위안페이 후스가 주석이 되었다. 북평분회는 2월 1일 제1차 집행위원회를 열어 다음과 같이 정부에게 요구했다.[9]
1. <위해민국긴급치죄법>을 폐지한다.
1. 형법 이외 인민의 권력을 위협하는 여러 법률을 폐지한다.
1. 불법으로 구속된 모든 정치범을 구명한다.
1. 유욱생을 살해한[10] 장쑤성 주석 구주퉁을 수사하고 감찰원은 그를 탄핵한다.

그러나 같은 날 중국국민당 베이핑시 당무정리위원회는 베이핑시와 공안국에 연락해 동맹의 북평분회가 불법조직이라고 통보하여 활동을 억압했다. 이에 후스는 동맹의 활동은 다 너희 국민당이 만든 약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반박했으나 2월 10일 국민당 베이핑시당부와 난징시당부는 연이어 집행위원회를 열어 민권보장동맹이 공산당을 보호한다며 중앙에 동맹의 해산을 요청하고 쑹칭링, 차이위안페이에게 경고해야 한다며 받아쳤다. 이에 차이위안페이도 나서 동맹은 약법에 근거하고 있기에 동맹에 반대하는 모든 주장이 오히려 불법이며, 난징시정부는 분회를 이미 승인했기에 베이핑시당부가 간섭하는 것은 약법 위배라고 비판했다.

3.2. 후스의 제명과 흔들리는 동맹

그래도 동맹은 1월 7일 "국민당은 인민의 모든 자유를 보장하고 민주정치를 부식시킨다고 여러 차례 말했으나 실제로는 14세의 소학생과 16·17세의 중학생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다"고 질책하고 정부에 압력을 넣어 2년 형이었던 정치범들을 1년 안에 석방시키는 등 무사히 순항하는 듯했으나 2월 초 아그네스 스메들리가 베이핑의 육군감옥에서 수감자를 학대한다는 자료를 가지고 와 민권보장동맹의 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사건으로 인해 사건이 시작되게 된다. 동맹의 북평분회 주석이었던 후스는 이 자료를 본 뒤 진위를 의심했고, 2월 5일 차이위안페이와 린위탕 등에게 편지하여 자신은 육군감옥 시찰 때 이러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항의했다.[11] 그러나 편지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해당 자료가 즉시 언론에 게재되자 위조를 직감한 후스는 뒤이어 2월 6일 신문 <자림서보>를 통해 정부의 정치범 체포에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되지만, 정부가 정치범을 체포하려면 아래 4가지 항목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1. 체포 전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1. 체포 후에는 약법을 준수하여 24시간 내 법원으로 이송해야 한다.
1. 법원은 증거가 있으면 공개 재판을 하고, 증거가 없으면 즉시 보석 석방해야 한다.
1. 재판 후에는 인도적 대우를 해야 한다.

2월 19일에는 <독립평론>에서 발표한 글인 <민권의 보장>에서 동맹이 내세우는 국내 정치범의 석방과 구금·혹형의 폐지에는 찬성하지만 즉시 모든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 주장에는 반대하며, 이는 "민권보장이 아니라 정부에 혁명의 자유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정부가 존재하려면 정부를 전복하려 하거나 정부에 반항하는 일체의 행동을 제재해야 한다"며 동맹의 집행위원회가 민권보장을 법률의 문제로 하지 않고 정치문제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2월 20일에도 후스는 계속하여 민권보장운동은 정부가 법률을 존중하는지 감독하고 정치범에게 법률이 정한 보장을 하도록 정부를 감독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민권보장은 어디까지나 법치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21일 역시 <자림서보> 기자에게 당시 죄수들은 자신이 겪은 모욕을 자유롭게 말했지만 혹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혹형의 증거를 찾지도 못했다며 스메들리가 제출한 문건이 조작되었음을 고발했다.

갑작스런 후스의 기습비난에 당황한 쑹칭링과 차이위안페이는 2월 22일 편지를 써서 주장의 진실을 자세히 설명해달라 요청했고 양싱포도 내부 분열을 피해보자는 편지를 보냈으나 후스는 답변하지 않았다.[12] 이에 쑹칭링은 2월 28일 전보를 쳐서 동맹 정관의 '정치범 석방'은 변경할 수 없으며, 회원이 신문으로 동맹을 공격하는 것은 동맹 규칙에 어긋나므로 공개적으로 이를 정정하라고 후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후스로부터 만족스런 답변을 받지 못하자 1933년 3월 3일, 동맹은 차이위안페이, 린위탕 명의로 임시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후스의 제명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와 동시에 쑹칭링과 루쉰은 후스를 비판했는데, 쑹칭링은 직접적으로 깠고 루쉰은 작가 출신답게 해학적으로 깠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제명되었다는 소식에 후스는 실망하여 다음 날인 3월 4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일은 웃기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일을 하다니, 당초에 가입했던 것은 우리 스스로 욕먹을 일을 자초한 것이다. 혈민 선생도 그 속에서 흐리멍텅하게 있으니 더 우습다.

그리고는, 그날 밤 차이위안페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염려하고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선생이 이러한 망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장래 어떻게 될까를 모르는 것이다.
후스가 차이위안페이에게 보낸 편지.

그러나 차이위안페이는 3월 17일 후스에게 보낸 답장에서 자신이 비웃음당할 것을 우려하는 후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나와 위탕 역시 이 단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급히 탈퇴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당연히 차차 벗어나려고 할 뿐이다.
차이위안페이가 후스에게 보낸 답신.

이렇게 차이위안페이는 동맹의 입장 때문에 공개적으로 후스를 지지하지 못한 것일 뿐 개인적으로는 후스의 비판에 동조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전후부터는 동맹은 점차 쑹칭링의 의견대로 급진화되고 있었다. 1933년 3월 이후부터는 공산당원에 대한 구명활동에 집중되었고 동맹의 입장도 본래 법의 테두리 안에서 민권을 보장하려고 했던 기존의 주장을 버리고 점차 약법을 불신하고 천부적 인권을 주장하는, 즉 법을 넘어서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결국 국민정부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인권관을 갖게 되어 국민정부는 동맹을 더욱 아나꼽게 보게 되었고, 동맹의 활동 또한 반장제스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동맹 내부의 자유주의 성향의 회원들도 동맹의 목적이 국민정부의 '개혁'에 있는지 국민정부를 파괴하는 '혁명'에 있는지를 따져 물었고 창립 멤버였던 임어당도 동맹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13] 결국 부주석이던 차이위안페이는 6월 16일 전 동맹을 빠져나오게 된다.

이러한 내분의 원인은 동맹은 법치와 민권의 보장을 중심으로 한 민권신장을 주장했기에 조직을 확대하면서 정파·계층·직업·당파·정치성향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성향의 회원들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동맹에는 우파 지식인, 중국 청년당, 제3당의 인물들이 포진해있었는데, 이들은 민권보장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뭉쳤지만 방법상의 차이로 인해 차차 반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법치주의를 주장하던 후스, 차이위안페이, 린위탕 및 자유주의 지식인과 점차 급진화되어 모든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을 주장한 쑹칭링과 상해분회, 그리고 대다수의 나머지 동맹회원들의 갈등 결과 상해총회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후스는 쫓겨나고, 무엇보다도 국민당이 동맹을 탄압할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동맹이 급진화되었다고 해서 동맹이 애초부터 공산당과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위해민국긴급치죄법>을 구실로 국민정부가 탄압하고 이에 따라 민권이 침해되는 이들은 주로 공산당원과 공산혐의자였고, 때문에 정치범들을 도와주는 민권보장동맹의 활동이 공산당에 집중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공산당 또한 민권보장동맹과 같은 제3세력은 중국혁명의 적으로 여기고 동맹에 대해 주목하지도 않고 이용하지도 않았다.[14]

3.3. 양싱포의 암살과 최종적인 와해

그러나 차이위안페이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동맹에 대해 회의를 품으면서도, 억울하게 체포된 젊은 정치범들의 구명은 또다른 문제였기 때문에 당장은 그만둘 수 없었다. 차이위안페이는 후스의 거침없는 비판이 한참이던 2월 18일 상하이 중국청년회 강연에서 목전의 정세 때문에 민권보장활동을 줄일 수 없다고 하였고,[15] 좌익작가가 상하이에서 체포 중 추락사한 사건에 대해 동맹의 명의로 선언을 발표하거나 독일 공사관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치하에서의 진보인사와 유대인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문건을 보내기도 했다.[16]

1933년 4월 5일에는 쑹칭링, 양싱포, 심균유, 해롤드 아이작 등이 베이핑에서 행정원장 왕징웨이와 사법부장 나문간을 만나 동맹의 명의로 '즉각 모든 정치범 석방, 혹형 폐지, 독서의 자유, 수갑과 족쇄 사용 금지 및 옥중 대우 개량, 교도관의 정치범 수탈과 뇌물수수 처벌'의 4가지 항목을 제안했다. 여기에 왕징웨이는 국민당 중앙정치회의에 이를 제안해보겠다고 답했고, 나문간은 사적으로는 민권보장에 적극 동의한다고 말했다.[17] 5월 14일에도 좌익작가와 중국좌익작가연맹 맹원이 상하이에서 체포되자 차이위안페이, 양싱포, 린위탕 등 37명이 왕징웨이와 나문간에게 편지를 써 구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활동도 6월까지로, 양싱포의 죽음으로 동맹은 급정거하게 된다.

민권보장동맹의 총간사였던 양싱포는 동맹의 인물들 중 가장 급진적이었던지라 국민정부에게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그는 국민정부로부터 여러 위협과 협박은 물론 출국을 권유받기도 했고, 4, 5월에는 난징의 주변인들로부터 체포의 가능성을 듣기도 했지만 계속하여 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끝내 1933년 6월 18일 새벽, 양싱포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중앙연구원 정문 앞에서 아들과 함께 흉탄에 맞아 비명함으로써 죽음을 맞게 되었다.[18]
파일:1933년 6월 20일 양싱포의 장례식.jpg
1933년 6월 20일 양싱포의 장례식

이에 쑹칭링과 루쉰은 국민정부를 몹시 비난하며 암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6월 20일 양싱포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9] 또한 그들안 양싱포의 사망은 동맹의 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동맹의 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라 말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미 후스의 제명 당시부터 동맹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양싱포의 살해 직후 차이위안페이가 소집한 긴급회의도 더 이상 민권보장동맹 부주석 명의가 아닌 중앙연구원 원장 명의로 소집했고, 임어당은 동맹이 활동을 정지하지 않으면 동맹회원 모두가 암살될 것이라고까지 말했으며, 그들과 같은 자유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이미 동맹에서 발을 뺀 상황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쑹칭링이 상하이를 떠나 톈진으로 가버리고, 한달 뒤 집행위원인 왕조시마저 교수직을 박탈당하게 되자 활동이 사실상 정지되며 그렇게 중국민권보장동맹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4. 주요 구성원

  • 쑹칭링 - 민권보장동맹 집행위원회 주석.
  • 양싱포(양취안) - 민권보장동맹 총간사, 중앙연구원 총간사.[20] 1933년 6월 암살당한다.
  • 후스 - 민권보장동맹 북평분회 주석. 1933년 3월 제명된다.
  • 루쉰 - 민권보장동맹 집행위원. 후스의 제명을 건의했다.
  • 왕조시 - 민권보장동맹 집행위원.
  •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史沫特萊) - 코민테른 연락원, 쑹칭링의 영문비서. 미국인이다.

5. 참고문헌

  • 남경국민정부시기 정치범 문제를 둘러싼 법률과 民權 논의 - 中國民權保障同盟의 성립과 활동을 중심으로 -, 윤숙현, 중국근현대사학회, 2019.6.
  • 蔡元培와 中國民權保障同盟, 김정화, 중국사학회, 2008.
  • 1930 년대 초 민권운동을 통해서 본 국민정부의 성격, 김창규, 호남사학회, 2000.6.
  • 1930 년대 중국 지식인의 민권문제에 관한 인식과 대응 - 언론 결사의 자유를 중심으로 -, 이재령, 사학지, 1998.12.
  • 中國民權保障同盟의 性格變化와 瓦解, 윤숙현,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6.

[1] 총간사 양싱포의 암살 후 점차 활동이 정지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해체일은 알 수 없다. [2] 국민정부는 1929년 2월 19일부터 군사기관이 소송을 접수하여 사법을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었기에 원칙대로라면 경비사령부가 형사범을 지명수배할 수가 없었다. [3] 1927년 3월 13일 우한 국민정부 시기에 발표된 법이다. 공산당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4] 더 자세히는 1928년 7~12월에 900명, 1929년에 1,900명, 1930년~1931년에 2,500명, 1932년에 3,500명으로 우상향하였다. [5] 당시 음식의 질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6] 폴란드인인 누란 부부는 위해민국긴급치죄에 의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당해 10월 난징 제1모범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도 쑹칭링은 특별사면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누란 부부는 중일전쟁 후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1937년에야 석방된다. [7] 발기일이 17일이 아니라 18일이라는 자료도 있고, 설립일도 30일이 아니라 29일에 설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8] 민권보장동맹의 집행위원 왕조시는 동맹은 천부적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민권을 참정권, 노동권, 교육권의 '적극적 민권'과 인신·출판·집회·결사의 '소극적 민권'으로 나누고 동맹은 후자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9] 그러나 아래의 내용이 2월 1일 제1차 집행위원회 때가 아니라 1월 30일 북평분회 성립대회에서 결정되었다는 문건도 있다. [10] 장쑤성 신문의 사장 겸 발행인으로 신문에 게제된 소설 4편이 계급투쟁을 조장한다며 1932년 7월 26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훈정시기약법>에 따르면 체포 후 24시간 이내에 법원으로 이송해야 했지만 5개월이 넘도록 법원에서 재판받지 못하고 장쑤성 보안처 계엄사령부에 의해 1933년 1월 21일 총살당했다. 유욱생이 체포당했을 때 감찰원은 수사의 부당성과 장쑤성정부의 인권유린과 언론탄압을 명목으로 조사를 시도했으나 성 주석 구주퉁의 방해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욱생의 절명 사실이 밝혀지자 전국의 여론이 들끓었고 행정원장 대행 쑹쯔원도 구주퉁이 법률을 따르지 않고 살해한 것에 대해 화를 냈지만 구주퉁은 자신은 정당하다며 뻔뻔하게 나왔다. 감찰원도 이는 약법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감찰원의 영역이라고 말했고 구주퉁의 탄핵도 거론하였지만 현역 군인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민권보장동맹은 이때 이후부터 인권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다. [11] 본래 북평분회는 창립 다음 날인 1월 31일 후스, 양싱포, 청서워를 파견해 해당 육군감옥을 시찰하였는데, 그곳에서 정치범들은 족쇄를 차는 등 대우가 좋지는 않았으나 책을 읽을 수 있었고, 글과 관련된 업무가 있으면 교도관들은 박식한 정치범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같이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스메들리가 제시한 자료는 훗날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 [12] 쑹칭링과 차이위안페이 모두 후스를 비판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지만 두 사람의 쟁점은 달랐다. 쑹칭링은 모든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을 반대하는 후스의 민권관을 비판했으나, 차이위안페이는 후스의 폭풍비난에 동맹이 무너질 것을 우려했다. 차이위안페이는 또한 린위탕과 함께 자료의 진위를 살피지 못한 것은 잘못이 맞지만, 이 잘못은 몇 사람의 잘못이 아닌 동맹회 전체의 잘못이라는 통전을 보내어 후스를 진정시키려 했다. [13] 임어당은 3월 17일 후스에게 편지하여 동맹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전했고, 18일 동맹에서 후스 제명이 공식적으로 추인될 때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14] 양싱포의 아들 양샤오포는 1978년 "동맹의 언론과 공작 모두는 공산당이 진행한 혁명투쟁과 긴밀히 합치된다. 쑹칭링의 글 <민권보장의 임무>를 읽어보면 공민권리의 쟁취, 소련의 무산계급독재 찬양, 자산계급 민주의 비판, 항일호소, 내전반대는 모두 마오쩌둥의 지도와 공산당의 정책에 부합된다. 만약 공산당의 영도와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다면 민맹의 활동이 이처럼 공산당과 긴밀히 합치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외에 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이기고 대륙을 접수한 뒤였기에 양샤오포의 이러한 말은 단순히 정치적인 발언으로 풀이된다. [15] 사실 차이위안페이는 이때 개회식에서도 “삼민주의의 최고원칙 하에서 정부 법령에 의거해 합리적인 요구를 해야 하고, 중앙의 입장과 벗어나는 다른 길을 모색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여 사실상 후스와 뜻을 같이했다. [16] 이에 국민정부는 <사회신문>을 이용해 "너희들이 숭배하는 무산계급 독재의 소련은 공공연히 1924년의 중소협정을 묵살하여 국제신의를 위반하였다"고 공산당과 동급 취급하며 비판했다. [17] 나문간은 당시 사법기관을 당의 수족으로 만들려는 국민당의 정책에 반발하고 사법독립을 주장하며 재판을 받지 못한 정치범을 정식 사법기관으로 옮겨 오려고 했으나, 나문간의 요청을 받은 국민당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정치범들을 그대로 군사기관인 위수사령부로 보내버렸다. [18] 이러한 암살은 남의사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양싱포의 목숨만을 노린 것은 아니었는데, 초기에는 쑹칭링, 차이위안페이 등도 암살 명단에 있었다. 그 중 쑹칭링은 무려 쑨원의 아내인지라 직접 죽이기는 부담이 엄청났기에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뇌사 상태로 숨만 붙어있게 만드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위험부담이 큰 이 계획 대신 '적당한 인물'을 선택해 암살하여 쑹칭링에게 경고하자는 계획이 세워져 실현되지는 않았다. [19] 루쉰은 실제로 죽음까지 각오했는데, 그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 집 열쇠를 그대로 집 안에 두고 나온 것이 그 증거이다. [20] 중앙연구원 부원장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아들 양샤오포는 그가 중앙연구원 총간사라고 지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