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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0년 10월 6일 |
경상남도
웅천군 북부동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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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1년 1월 11일(향년 41세) |
평안남도
평양부 평양형무소 (現 평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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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 -119 |
본관 | 신안 주씨[2] |
배우자 | 이순이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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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해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경상도 웅천군 북부동 백일마을에서 출생했다.1913년 경화동에서 대서업을 개업, 1915년 진해에서 처음으로 민족운동을 하는 청년회를 결성했다.
1916년 대정학교의 운영을 지원하는 진해장학회의 회장이 되고 뒤에 생도보호회장도 되어 일제의 민족차별 교육정책 아래에서도 진해의 어린 학생들이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3.1 운동 후 창간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을 경영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3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소작회를 창립하여 일본인과 소작쟁의에 들어갔다. 소작회를 조직한 후 간악한 일본인과 그를 비호하는 일본관헌과의 투쟁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1927년 소작쟁의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민족운동가의 결속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창원군 지부를 결성하여 지회장을 맡았다.
1931년 마산에서 회의를 마친 귀로에 급성맹장염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시설이 좋았던 해군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한 군의관이 격렬한 항일 투쟁을 하는 독립운동가임을 연락받고 치료를 소홀히 하여 41세의 나이에 운명했다.
3. 여담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유공자로서 포상을 받았다.2016년 6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