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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8대 경희대학교 총장 조영식 趙永植|Young-Seek Choue |
|
|
|
<colbgcolor=#a40e17> 호 | 미원(美源) |
출생 | 1921년 11월 22일 |
평안북도 운산군 | |
사망 | 2012년 2월 18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 |
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선영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개신교[1] |
학력 |
도쿄체육전문학교 (중퇴[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 학사) 마이애미 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3] |
가족 |
아버지 조만덕(趙萬德) 배우자 오정명(吳貞明) 장남 조정원, 차남 조인원[4] 장녀 조여원[5], 차녀 조미연[6] |
경력 |
경희학원 제1·2·4·7·11-13대 이사장 경희대학교 제1·3·7·8대 총장 경희중고등학교, 경희여자중학교, 경희여자고등학교 초대 교장, 서울고등학교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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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경희학원 초대 이사장과 경희대학교 초대 총장 및 경희중고등학교와 경희여자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밝은사회운동을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계획할 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2. 생애
1921년 11월 22일 금 산지로 유명한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금광을 경영하던 조만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몸이 허약해 잔병치레가 많았던 탓에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복싱, 체조, 달리기 등 스포츠에 열심이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체육전문학교에 입학한다.1943년 10월 도쿄체전 졸업을 앞두고 잠시 귀국해 오정명과 결혼하는데, 신혼 3개월 만에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 48공병부대에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고 만다. 훈련소로 끌려간 그는 일제의 총알받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학도병들을 규합하여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정보가 유출되는 바람에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것이 '평양 학도병 의거 모의사건'으로 1945년 1월의 일이었다.
1946년 월남하여 서울고등학교[7]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다가, 안정된 교사 생활을 내려놓고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초한다'는 생각에 법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194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편입하였다. 재학 시절 '1만 시간 독서 계획'을 세우고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독서에 몰두하였고, 1948년 27세 나이로 <민주주의 자유론>을 펴냈다.
1950년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6.25 전쟁 발발 당시 그는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 원내교섭단체 중 하나인 '공화민정회'에서 조사국장 겸 법제사법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시영으로부터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신흥초급대학은 가인가로 설립된 2년제 대학으로 영어과, 중국어과, 체육과 3개 학과에 모집정원 각 50명씩 총 150명에 불과한데다 재정이 매우 어려워 건물도 대지도 없는 천막에서 졸업생조차 배출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학생모집을 진행하였고 그때 모은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했었다. (다만 그 당시 대학생은 징병 대상에서 제외되었기에 입학 경쟁률은 셌다고 한다.)
전쟁 중에 부실한 학교를 인수해 교육사업을 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으나 학교를 인수하고 사재를 털어 부산역 맞은 편에 부지를 마련하고 교사 건물을 신축하였다.[8] 학교가 안정되면서 1952년 문교부로부터 초급대학 정식 인가를 받았고 그해 말에는 4년제 대학 설립 인가를 획득하였다.
재정을 확충하고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등 종합대학 승격을 준비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여 교사가 잿더미로 변하면서 4년제 종합대학의 꿈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부산 동대신동에서 새 교사를 건립하고 재건에 나서 1953년에는 45명의 첫 졸업생(1회)을 배출하게 된다.
1953년 휴전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서울에서 학교 부지를 물색하던 중, 청량리역 인근에 위치해 있던 서울대 법대에서 편입시험을 볼 적에 홍릉 건너편 나지막한 산에 올라 산책하던 풍경을 떠올리고는 그 장소인 휘경동 천장산(고황산) 기슭으로 결정하고 은행에서 1,500만원을 대출 받아 30만평의 부지를 불하받는다.[9] 서울캠퍼스 조성에는 당시 국내 최대의 석조 건축물인 본관 석조전, 동양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포함되었다.
1955년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4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갖춘 종합대학교로 승격됨과 동시에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 학교의 이름을 경희대학교로 변경하였다. 영, 정조 때의 정궁인 경희궁에서 따온 것으로 상술한 경희궁터에 있던 서울고등학교에 재직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10]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아우르는 종합학원을 목표로 하여 1960년 경희중/고등학교 설립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경희학원이 설립되면서 경희유치원, 경희초등학교, 경희초급대학이 문을 열었다.
5.16 이후 군사정부 실력자들이 찾아와 오월동지회 회장직을 맡아주길 요청하였으나 이에 협조하지 않자 문교부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총장 승인을 취소하였고, 2년 후에야 3대 총장으로 복귀하였다.
2012년 2월 18일, 경희의료원에서 향년 9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3. 사건
1951년 발간한 두번 째 저서인 <문화세계의 창조>의 일부 구절이 문제가 되어 1955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 분실에 전격 구속되었다. 문제가 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레닌은 카우츠키의 민주주의관을 비판하는 가운데에서 '민주주의는 변증법적 발전과정에 의하여 이렇게 발전한다. 즉 전제정치로부터 부르죠아 민주주의에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에서부터 푸로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에로, 푸로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에서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에'라고 말하였는데 현재 푸로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까지는 도달하였다고 볼 것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라고 한 그 미도(未到)의 민주주의사회는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한 것일까.
즉 그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완성된 형식의 사회를 의미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요...(중략)...우리의 맞이할 다음의 세계라는 것은 레닌의 말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사회 즉 완성된 고도문화국가사회라는 것이 자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 여론이 들끓자 수사 당국은 6일만에 석방하였으나 저서 내용에 대한 감정을 학술원에 위촉하였고 학술원은 용공 사상이 없다고 판정하였다. 결국 무혐의
불기소처분으로 종결되었다. 이 당시 조영식의
김일성대학 교수 이력 루머[11]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즉 그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완성된 형식의 사회를 의미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요...(중략)...우리의 맞이할 다음의 세계라는 것은 레닌의 말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사회 즉 완성된 고도문화국가사회라는 것이 자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4. 평가
그의 저술 등에 나타난 민주주의론이나 세계평화론 등의 주장은 그 개념의 깊이나 현실적 적용의 측면에서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며 대한민국 사상계나 학술계에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고 평가된다.그러나 학원 경영에 있어서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 폐교 직전의 학교를 인수하여 경희대학교를 크게 성장, 발전시켰다. 동양의과대학을 인수해 한의과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약학과, 한약학과), 간호학과 등 의약 계열 모든 학과를 아우르는 종합의약체계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갖춘 종합학원의 면모를 만들었다.
5. 경력
- 서울고등학교 교사(1946) - 월남 후 체육교사였으며 이때 서울고가 경희궁 내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중에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하여 경희대학교로 명명
- 경희학원 초~2, 4, 7, 11~13대 이사장
- 경희대학교 초, 3, 7, 8대 총장
- 경희중고등학교 초대 교장
- 경희여자중학교 초대교장
- 경희여자고등학교 초대교장
6. 주요저서
- 《민주주의 자유론》(1948년)
- 《문화세계의 창조》(1951년)
- 《인간과 창조》(1960년)
- 《우리도 잘 살 수 있다》(1963년)
- 《교육을 통한 세계평화의 구현》(1971년)
- 《새 한국 국민상의 모색》(1972년)
- 《인류사회의 재건》(1975년)
- 《창조의 의지》(1976년)
- 《오토피아》(1979년)
- 《하늘의 명상》(1981년)
- 《21세기 인류사회의 과제와 선택》(1991년)
-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1991년)
- 《인류사회는 왜, 어떻게 재건되어야 하는가》(1993년)
-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4년)
[1]
#
[2]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했으나 징집과 해방으로 복학하지 못하고 중퇴했다.
[3]
출처 1959년 처음 수여받은 이 명예박사를 포함해 총 3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4]
전 총장, 현 경인학원 이사장, 경희의료원 총장
[5]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 교수
[6]
학교법인 경희학원 이사
[7]
서울고가 경희궁터에 있던 것에 착안한 것이 훗날 경희대학교의 명칭에 영향을 준다. 서울고의 교내 신문은 이 점에서 여전히 경희신문사로 불린다.
[8]
교사 경력이 전부이고 학생 신분에서 갓 벗어난 그가 대학을 인수하면서 큰 자금을 투자할 수 있었던 정황으로 볼 때 금광을 경영했던 부친과 집안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9]
당시 고황산 일대는 과거 조선왕실 재산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불하중이던 토지이다.
[10]
정확히는 당시 서울고 동창회 모임의 이름인 '경희회'에서 따온것이다.
[11]
김일성대학(현 김일성종합대학) 개교일은 1946년 10월 1일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된 것도 1946년 5월이다. 1946년에 월남하여 서울고 교사를 했다는 것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또 김일성대학 개교 당시 학부를 봐도 체육 관련 전공은 없다. 다만 교양과목을 맡았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