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3:25:46

조르주 불랑제


파일:Georges_Boulanger_Nadar.jpg
이름 조르주 불랑제 (Georges Boulanger)
출생 1837년 4월 29일
사망 1891년 9월 30일

1. 인생
1.1. 청년기1.2. 정치 입문1.3. 불랑제주의의 위축
2. 역사적 의의3.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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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

1.1. 청년기

조르주 불랑제는 1837년 4월 29일에 태어나 1891년 9월 30일에 사망한 프랑스 정치인이다.

알제리 원정 (Campagne de Kabylie),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통킹 원정, 보불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여하면서 탄탄한 군사적 커리어를 밟는다. 1886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해 여러 개혁을 시도하고, 징병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축소, 군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등 군대 내에서 큰 지지를 얻는다.

1.2. 정치 입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패한 이후 프랑스의 반독 감정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상당한 군사적 위업을 쌓은 불랑제 장군은 프랑스의 구원자라 추대받는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뛰어난 언변 실력으로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독일 제국에게 보복을 가할 것을 약속했다.[1] 그는 국방부 장관으로써 프랑스-독일 국경에 군수물자를 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하는 등 프로이센을 노골적으로 도발하기 시작했다.

1887년 4월 20일 독일 군부가 프로이센-프랑스 접경지역의 지방감사였던 슈나에벨레 (Schnæbelé)를 정보원 혐의로 체포하면서 프로이센-프랑스 관계는 더욱 팽팽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불랑제의 도발이 2차전쟁을 유발할 것을 우려했던 내각은 불랑제를 해임한다.

불랑제의 해임 4개월 이후, 내각은 정치 스캔들에 시달린다. 이를 기회삼은 불랑제 지지자들은 왕당파, 보나파르트주의자 등 우파들과, 몇몇 급진파[2]와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들을 아우르는 민족주의적 "국가당"(Parti National)을 창당한다. 이들은 내각의 해산과 헌법의 개정을 요구한다. 공화주의자들은 국가당의 압력에 새로운 선거를 치루고 불랑제를 상대로 연합한다.

1.3. 불랑제주의의 위축

불랑제는 지방 민중의 대대적인 지지와 국가당의 프로파간다를 등에 업고 우세한 듯 하나, 미숙한 태도와 결정 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진다. 정부가 불랑제를 국가 안보에 위협 혐의로 구속할 것을 선포하자 불랑제는 지방으로 피신하는 것은 이미지가 실추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고, 또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을 이용해 정부는 공화주의의 효용을 설파하는 프로파간다를 적극 사용했다.

결국 불랑제주의자들은 1889년 선거에서 참패하고 유배당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랑제의 내연녀[3]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충격을 견디지 못한 불랑제는 내연녀의 묘석 앞에서 자살한다.

2. 역사적 의의

불랑제주의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부패한 정치인들과 민주주의에 실망한 민중들의 감정이 불랑제라는 전쟁 영웅을 일종의 메시아로 추대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위대한 군인을 찾는 현상은 제2차세계대전 초기에도 필리프 페탱에 의존하는 형태로 반복된다. 주요 우익 정파를 형성했던 왕당파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은 불랑제주의를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게 되었고, 공화정의 유약함을 깨달은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더욱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치를 펼칠 계기가 되었다.

3.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 레일웨이 엠파이어 프랑스 시나리오에서 등장한다. 역사적 행보와 비슷하게 플레이어에게 독일제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버건디(브루고뉴)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주장한다.

[1] 직접적으로 약속한 적은 없으나 리부른 지역에서의 연설은 전쟁을 할 것을 암시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오직 보호적인 정책만을 고수하고 있으나, 이제는 공격적인 노선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2] 급진파는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는 온건 진보에 속하는 이름만큼 급진적이지 않은 정파였다. 불랑제를 지지하는 것은 급진파들 중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반불랑제주의적 급진당에 소속한 상태였다. [3] 아내와는 별거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