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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긍하

파일:조긍하.jpg
성명 조긍하(, Jo Keung-ha)
본명 조중하(趙重夏, Jo Jung-ha)
출생 1919년 8월 16일
경상북도 대구부 (현 대구광역시)
사망 1982년 1월 28일 (향년 62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잠실3동 주공아파트 자택
본관 풍양 조씨[1]
학력 대구고등보통학교[2] ( 졸업)
테이코쿠음악학교[3] ( 성악과 / 졸업)
가족 아들 조동완, 조동진, 조동익
딸 조동희
데뷔 황진이》(1957)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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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2. 생애

1919년 8월 16일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조병설(趙秉卨, ? ~ 1963.5.7.)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복남(金福男, 1904.10.28. ~ 1994.12.23.) 사이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와 일본 도쿄도 테이코쿠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해 1940년에는 성악가로, 1942년에는 피아니스트로 각각 데뷔하였다. 6.25 전쟁 이후 대구시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1957년 박재학, 서상만, 신달웅과 기획자 변종건 등과 함께 영남영화사를 설립하면서 사진과 영화 쪽으로 영역을 넓혀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이때 《 황진이》로 감독 데뷔했다. 이 영화에서 도금봉을 발탁해 스크린에 데뷔시키고 '도금봉'이란 예명도 지어주었다고 한다.[4]

1959년 연출한 《》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0년 황순원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과부》를 연출했다. 이 작품으로 신영균과 이민자가 스크린 데뷔했다. 소설 〈과부〉는 1962년 신상옥 감독과 1978년 조문진 감독에 의해 두 차례 더 영화화됐다.

미국 영화의 번안작인 《 육체의 길》을 1959년과 1967년 두 차례 연출했다. 1959년작은 11만여명의 관객으로 당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3위를 기록하면서 크게 성공했고, 1967년작도 67,000명으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공교롭게 원작 영화인 《 The Way of All Flesh》도 1927년 처음 만들어지고 1940년 리메이크되어 두 차례 만들어진 바 있다. 1967년작에서 김승호의 오줌싸개 막내아들 역으로 당시 6살이던 이승현을 아역으로 발탁해 데뷔시켰다. 이승현은 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고교얄개 이후 하이틴 스타로 부상했다.

1961년에는 레 미제라블을 번안한 《쟌발쟌》을 연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과정을 담은 정치 풍자 영화 《 잘 돼 갑니다》는 1968년 당시에는 촬영까지 무사히 마쳤으나 영화 개봉 하루 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도극장에 걸린 간판이 내려갔다. 이후 문제가 된 내용을 개작했지만 결국 필름을 강제로 압수당해 상영은 불발됐고, 20년 후인 1989년에 와서야 개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채 흥행은 실패했다.

극영화는 1973년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가 마지막 연출작이며, 1974년 문화영화 2편을 더 찍었다.

1982년 1월 28일 새벽 1시에 서울특별시 강동구 잠실3동 주공아파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5]

차남 조동진과 3남 조동익, 3녀 조동희가 모두 음악인이다.


[1] 사직학생공파(社稷學生公派, 별파). [2] 경북고등학교 [3] 1928년 설립, 도쿄 대공습 직후인 1945년 5월 25일 폐교되었다. [4] # [5] 1982년 1월 29일 매일경제 부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