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5:47

복드 칸

젭춘담바 후툭투 8세에서 넘어옴
파일:복드 칸국 국기.svg
복드 칸국 대칸
<rowcolor=#fff> 제1대 대리
복드 칸 발링긴 체렌도리
몽골 제국 · · 몽강국 · 몽골 인민공화국 · 몽골국


복드 칸국 초대 대칸
복드 칸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 Bogd Khan
파일:292px-Bogd_Khan_(1).jpg
<colbgcolor=#004db1><colcolor=#ffffff> 출생 1869년 10월 13일
청나라 쓰촨성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리탕 현
사망 1924년 5월 20일 (향년 54세)
복드 칸국 울란바토르
묘소 몽골국 울란바토르 감단사 납골릉
재위기간 제8대 젭춘담바 후툭투
1871년 ~ 1924년 5월 20일
복드 칸국 대칸
1911년 12월 29일 ~ 1919년 12월 29일
복드 칸국 대칸(복위)
1921년 12월 29일 ~ 1924년 5월 20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4db1><colcolor=#ffffff> 부모 <colcolor=#373a3c,#ddd>아버지 곤치크세렌
어머니 오돕둘람
배우자 첸딘 돈독둘람
자녀 1남
잡잔담바 후탁트 보주 게겐 에젠 칸
(Jabzandamba Khutagt Bogd Gegeen Ezen Khaan)
종교 티베트 불교
신체 약 150~160cm[1]
존호 일광황제(日光皇帝)
별호 아왕로쌍최끼니마땐진왕축
ངག་དབང་བློ་བཟང་ཆོས་ཀྱི་ཉ་མ་བསྟན་འཛིན་དབང་ཕྱུག
연호 공대(共戴) }}}}}}}}}
파일:Bogd_Khan.jpg
복드 칸의 어진
[clearfix]
1. 개요2. 행적3. 여담4. 대중매체

1. 개요

복드 칸국 대칸이자 몽골 역사상 마지막 대칸.[2][3] 복드 칸은 당시 몽골 불교의 법왕(종교지도자)이기도 한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 8세이다.

2. 행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gdKhan.jpg

본명은 '아왕 롭상 최키 니마 텐진 왕축(ngag dbang blo bzang chos kyi nyi ma bstan 'dzin dbang phyug)[4]'으로 티베트인이었다. 1869년 청나라 쓰촨성 간쯔 티베트 족 자치주 리탕 현에서 출생하여 청나라 서장성 티베트소자치주 라싸에서 잠시 유소년기를 보낸 그는 5세 시절이던 1874년을 기하여 몽골 니슬렐 후레, 현 울란바토르로 이주하였다. 이후 청년기에는 젭춘담바 후툭투(몽골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직위) 8세로 봉직 직무하며 청년 시절의 전부를 보냈다. 1904년, 2차 영국-티베트 전쟁의 결과로 달라이 라마 13세가 망명을 오자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당시 내몽골 후금이 건국할 당시부터 합류해 원나라의 옥새를 후금 칸에게 바치고 숭덕제를 대칸으로 옹립해 만주와 일체화했다. 이와 달리 외몽골 준가르와 할하족이 청나라에게 대항하다가 18세기 때 청나라에게 정복당했으며 19세기까지 청나라 치하에 있었다. 물론 반 독립 지대였으며 내몽골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쇠약해지자 할하 몽골인들은 독립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11년 7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의 왕공들은 왕공 회의를 열어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복드 칸은 여기서 러시아 제국에 파견된 대표단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12월 29일 대표단의 한 사람인 젭춘담바 후툭투 8세를 대칸으로 추대하면서 외몽골은 독립하였으며 이것은 복드 칸국의 시작이였다. 연호는 공대(共戴)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내몽골 중화민국으로 합류, 흥안성과 차하르성이 되었다. 당시 내몽골의 칸은 칭기즈 칸의 후손을 자처하던 데므치그돈로브였다. 1915년 중화민국은 러시아 제국, 복드 칸국과 협의 끝에 6월 캬흐타 협정을 체결하여 몽골의 완전자치를 인정하고 몽골은 중화민국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 신강군벌 양쩡신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는 등 범몽골주의에 근거한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하지만 1917년 몽골을 지원하던 제정 러시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하자, 중화민국은 외몽골 복드 칸국의 자치마저 불허하게 되었다. 1919년 10월 안휘군벌 쉬수정의 변방군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 11월 17일에 복드 칸의 항복을 받아내어 11월 22일 굴욕적인 자치 취소식을 거행하게 하여 복속시켰고 복드 칸은 오십 노구를 이끌고 당시 중화민국 대총통 쉬스창의 사진에 세번이나 절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광경을 보고 몽골인들은 크게 분노했으며 이후 몽골은 1921년까지 투바와 함께 북양정부의 지배를 받는다. 쉬수정은 몽골이 중국에 상환해야 할 채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자를 수탈하여 몽골의 경제를 파탄지경에 몰아넣었다.

이에 복드 칸은 잠시 중국 밑에 들어가지만 2, 3년 안에 독립하겠다는 뜻을 천명하며 몽골 인민혁명당을 창설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1919년 12월 29일부터 1921년 12월 29일까지 몽골 국가 원수로 재임하는 동안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외몽골은 적백 내전으로 쫓겨다니다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들과 이들의 견제를 받는 북양 정부 군벌, 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몽골인들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 9월, 백군 잔당을 지휘하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몽골의 독립을 돕겠다는 뜻을 알려오자 복드 칸은 운게른과 합작을 결정했다. 운게른은 1920년 10월 몽골로 들어와 중국군을 격파하고 1921년 2월 몽골의 수도 후레를 점령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였던 담딘 수흐바타르가 1920년 11월 허를러깅 처이발상과 함께 몽골인민유격대를 조직, 운게른과 중국군벌 타도를 통전하면서 유목민들을 선동해 군세를 확장했고 정식으로 몽골 인민당을 창설하여 적군의 지원을 받아 3월에 캬흐타를 점령한 중국군 잔당을 소탕하고 6월 운게른의 군세를 격파했다. 운게른은 후레로 퇴각해 재기를 도모했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몰락했고 수흐바타르는 7월 8일 후레를 점령했다. 수흐바타르는 복드 칸에게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 인민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복드 칸은 수흐바타르의 조건을 수락하여 7월 10일 인민임시정부로의 정권 이양식이 거행되었고 7월 11일 제한군주로 복위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집권한 이후에도 복드 칸은 독립에 기여했고 몽골 민중으로부터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화 이후 대부분의 군주들이 공산화 직후에 추방 당하 거나 처형당한 것과 달리[5] 혁명 정부로부터 나름대로 존중은 받아서 1921년 12월 29일부터 1924년 5월 20일을 기하여 병사할 때까지 몽골 국가 주석을 역임하였다. 물론 명목상의 최고 지위이고 실권은 공산당에 있었다.

복드 칸이 사망하고 나서는 몇 달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군주제가 폐지되고 복드 칸국은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그의 환생으로 지목된 젭춘담바 후툭투 9세는 달라이 라마 13세에게 지위를 공인받았으며, 몽골의 공산화를 피해 티베트를 거쳐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생활하다 몽골이 민주화된 후 다시 몽골 불교의 위상이 회복되자 몽골로 귀환해 2012년 입적했다. 비록 쫓겨나다시피 했지만 바로 다음대에 명예를 회복한 셈이었다.

3. 여담

  • 의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던 이태준이 바로 이 사람의 주치의였다고 한다. 당시 몽골에서 활동했던 이태준은 뛰어난 의술로 몽골에 만연했던 매독 퇴치에 기여하였는데 그 소식을 들은 복드 칸이 이태준 선생을 자신의 어의로 임명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에는 2001년에 만들어진 이태준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이 있다.
  • 복드 칸은 아내가 2명 있었다. 첫번째 부인은 첸딘 돈독둘람으로,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1923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치엔필과 재혼한다. 치엔필은 이때 이름을 게네필로 이름을 바꿨다. 원래 치엔필은 루브산담바와 결혼해 딸이 있었지만 이혼해야 했다. 하지만 1년만에 복드 칸이 사망하고 몽골의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게네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전남편 루브산담바와 재결합한다. 하지만 1938년 허를러깅 처이발상에 의해 일본군의 스파이라는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된다. 이때 게네필은 임신 5개월이었다.
파일:Sharav_dondogdulam.jpg

복드 칸의 첫번째 부인 첸딘 돈독둘람.

4. 대중매체

  • 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다른 주변 국가들이 엉망진창인 내전과 정치변혁을 겪는 사이에 몽골을 개혁, 유목민들이 이웃나라에서 다양한 음식을 사먹으면서 광석 라디오를 들으며 목축을 하고, 대학에서는 승려들이 각종 사상을 토론하는 등 몽골을 현대적인 국가로 만든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만 결국 내부 혼란을 정리한 소련, 중국, 그리고 역사의 변화로 탄생한 대한민국에게 자주독립을 부정당하고 그나마 복종만을 요구한 대한민국에게 항복[6], 삼균주의 추종자 처이발상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티베트가 청나라에게 탄압받는것을 보고 독립을 결심한다. 원래 역사와 달리 청나라가 살아남아 독립을 못했으나 달라이 라마의 지원과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백군의 지원으로 청나라군을 크게 대파하지만 운게른을 끌어들인 대가로 운게른에게 권력을 상실한 상황, 친위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하고 병에 걸린 상태이다. 결국 역사대로 사망하지만 이승만의 공작에 의해 운게른에게 독살당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불교 방식대로 시신을 화장하여 진실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역사에서는 운게른에게 죽었다고 남을듯하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이홍장이 몽골족의 자치권을 훼손하는 번부 폐지 정책을 추진하자 이를 계기로 주권 회복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몽고 왕공들이 중앙에서 밀어붙이는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칼을 들었을 때 끝까지 말렸다. 그러나 내몽골 왕공족들은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북양군의 조선제 맥심 기관총에 쓸려나갔다. 이후 1900년에 동삼성의 만주족 젊은이들과 손을 잡고 초원 유목민들의 불심을 자극하여 몽골 독립 여론 조성에 나섰는데 경허의 "불법으로 나라를 세우면, 나라가 쇠할 때 불법도 쇠할 것이다. 불문에 위엄을 빌어 청국에서 떨어져 나오되 완전히 떠남이 아니라 형제나 이웃처럼 지내기를 원한다 하면 여러 백성들간의 우의가 오래 이어질 것이며, 경국하는 법도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이를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 바로 독립하기 보다는 일단 청나라의 틀 안에서 힘과 목소리를 길러 자립해야 한다는 법문을 몽골 전역에 내렸다.

[1] 사진에 나온 복드 칸의 어깨의 넓이를 보면 복드 칸의 키는 약 150~160cm 사이로 추측할수 있다. [2] 중국의 몽골족(차하르인)은 청나라 역대 황제들을 보르지긴 왕조 정통 대칸들에 버금가는 정통성을 가진 대칸으로 여기기 때문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면서 만주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이기도 한 선통제를 몽골의 마지막 대칸으로 여긴다. 대만의 극렬 대륙 중화민국 지지 성향의 외성인들은 외몽골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몽골족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선통제를 몽골의 마지막 대칸으로 여긴다. 물론 대부분의 외성인들은 그냥 몽골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복드 칸이 이끌던 외몽골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가장 큰 주체는 지금은 정치적 명맥이 끊긴 북양정부였고, 현 대만 정부의 직접적인 전신인 국민정부는 국부천대 이후 취소하긴 했으나 몽골의 독립을 승인한 역사도 있으며, 무엇보다 훨씬 큰 공공의 적을 눈앞에 두고 대만 외성인들이 굳이 몽골과 마찰을 빚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만 정부가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해 몽골을 대륙 미수복 지구에서 제외시킨 것도 국민당 집권기인 2012년의 일이었다. [3] 복드 칸이 황금씨족이 아니라서 대칸으로서 정통성이 없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으나, 복드 칸은 에센 타이시처럼 찬탈을 통해 대칸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당시 외몽골을 지배하던 왕공들의 추대로 즉위한 것이고, 이 왕공들의 대부분은 황금씨족이었다. 즉 정통성을 혈통에서 찾는 구식 사관으로도 복드 칸은 기존 왕족들에게 지도자로 인정받은 것이니만큼 정통성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4] 몽골어로는 악왕롭승초이지냠당증왕축(Agvaanluvsanchoijinyamdanzanvanchüg) [5] 개중 루마니아의 미하이 1세와 불가리아의 시메온 2세는 나중에 동유럽의 공산당 체제가 몰락하자 모국으로 귀국하였다. 특히 시메온 2세의 경우는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총리까지 역임했다. [6] 중국은 몽골 자체를 합병할 생각이었고 소련은 공산주의자답게 몽골 승려들을 죄다 처형시킬 생각이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2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2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