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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쿼리 Jerry Quar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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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5년 5월 15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이커즈필드 | |
사망 | 1999년 1월 3일 (향년 53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템플렌턴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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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전적 |
66전 53승(32KO) 9패(6KO) 4무 |
신장/리치 | 183cm / 183cm |
체급 | 크루저, 헤비급 |
스탠스 | 오서독스 |
링네임 |
Irish The Bellflower Bomb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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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2. 전적
- 주요 승: 브라이언 런던(2), 조지 존슨(3), 플로이드 패터슨, 태드 스펜서, 버스터 매티스, 맥 포스터, 토니 도일, 잭 보델, 에두아르도 콜레티, 랜디 뉴먼, 론 라일, 어니 셰이버스
- 무승부: 토니 알론지(2), 토니 도일, 플로이드 패터슨
3. 커리어
3살 때 아버지 잭 쿼리로부터 첫 복싱 글러브를 선물받았고 5살 때 첫 경기를 치렀다. 10살 때 주니어 골든 글러브 타이틀을 획득했고 그 후 3년 동안 계속해서 타이틀을 차지했다.1965년 내셔널 골든 글러브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토너먼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상대 5명을 모두 KO시켜 토너먼트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준결승에서 린 파를, 결승에서 짐 돈링거를 꺾었으며 두 선수 모두 턱뼈가 부러졌다. 아마추어 총산전적은 170승 13패.
아버지와 베테랑 파이트 매니저인 조니 플로레스의 관리를 받은 쿼리는 1965년 5월 19세의 나이로 프로로 전향했다.
12연승 후, 1965년 11월 토니 도일과의 시합에서 10라운드 무승부를 기록했다.
1966년, 토니 알론지와 10라운드 무승부를 두 번 기록했고, 에디 메이컨에게 10라운드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하며 프로 경력 첫 패배를 당했다. 쿼리는 자신의 패배를 컨디션 불량에 기인했고, 컨디션 불량으로 인해 싸움에서 지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무하마드 알리가 미국 육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하여 1967년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박탈당하자, 쿼리는 공석이 된 타이틀을 채우기 위해 WBA가 기획한 8강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967년 10월 첫 토너먼트 경기의 상대는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 쿼리는 4개월 전 패터슨과의 1차전에서 10라운드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2차전의 결과는 쿼리의 12라운드 머저리티 판정승이었다. 3개월 후, 준결승에서 태드 스펜서를 상대로 12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다.
1968년 4월, 공석인 WBA 헤비급 챔피언십을 놓고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지미 엘리스와 맞붙었고 15라운드 머저리티 판정패를 당했다. 자신의 퍼포먼스에 실망한 쿼리는 나중에 "그들이 판정을 나에게 내렸다면, 나는 그것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 직후 쿼리는 자신이 척추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엘리스와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9년 3월 버스터 매티스를 상대로 12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이변을 일으킨 후, 또 다른 타이틀 도전권을 얻어 1969년 6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에서 조 프레이저와 맞붙었다. 프레이저는 뉴욕, 매사추세츠, 일리노이, 메인, 펜실베이니아, 텍사스의 6개 주에서 챔피언으로 인정받았다. 쿼리의 오른쪽 눈 아래 커팅으로 인해 7라운드 이후 경기가 중단되면서 프레이저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이 경기는 The Ring에서 올해의 경기로 선정되었다.
두 번의 빠른 녹아웃 승리에 이어, 1969년 12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추발로에게 7라운드 TKO로 패배했다. 쿼리는 6개월 후 가든으로 돌아와 프로 전적 24승 0패 24KO의 맥 포스터를 상대로 6라운드 KO승을 거두었다.
1970년 10월, 쿼리는 3년간의 활동 중단 후 링으로 복귀한 알리의 첫 복귀 상대로 지목되었다. 쿼리의 왼쪽 눈에 난 커팅으로 인해 3라운드 이후 경기가 중단되었고, 알리가 승자로 선언되었다. 쿼리는 그 다음 6번의 경기에서 승리한 후 1972년 6월 알리와 재경기를 가졌지만 알리는 이번에도 우위를 점했고 7라운드 TKO로 승리했다.
론 라일을 상대로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어니 셰이버스를 1라운드 만에 KO시키는 등 6연승을 거둔 후, 1974년 6월 조 프레이저와 재경기를 가졌다. 프레이저는 쿼리를 구타하며 5라운드 만에 그를 꺾었다.
복싱 선수로서의 경력이 쇠퇴해지자 쿼리는 술과 코카인에 손을 대었고, 그의 반사신경은 둔화되었고 링에서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1975년 3월 켄 노턴에게 5라운드 TKO패를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쿼리는 그동안 210만 달러를 벌었지만 마약과 알코올 남용, 그리고 세 번의 결혼으로 인해 전부 탕진했다.
1977년 11월 링으로 복귀하여 로렌조 자논을 상대로 처음 7개의 라운드를 지던 중 9라운드 KO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 경기 이후 두 번째 은퇴 선언을 하였다.
1983년 다시 복귀하여 두 명의 평범한 상대를 물리쳤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10라운드 머저리티 판정승으로 두 번째 경기에서 승리한 후 쿼리는 다시 글러브를 내려놓았다.
1992년에 마지막으로 복귀를 시도했지만 클럽 파이터 론 크랜머에게 6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 쿼리는 이 경기에서 대전료 1,050달러를 받았다.
1983년 복귀 전, 복싱으로 인한 뇌 손상에 대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기사를 위해 검사를 받았다. 그의 신경학적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CAT 스캔과 신경심리학적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심지어 불과 50세의 나이에 치매 증상을 보였고, 이 때문에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1999년 1월 5일 사망했다. 그는 12월 28일에 폐렴으로 입원했고 심장마비를 겪었다. 쿼리가 침상에 누워서 튜브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은 의사들에게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4. 파이팅 스타일
앞손 위주의 아웃파이터로 부지런한 풋워크와 잽을 계속던저 상대의 움직임을 끌어내다가 상대가 들어오면 피벗으로 사각을 먹고 오른손 카운터를 던졌다. 상대가 거리를 뚫고 들어오면 화끈하게 포켓 난전을 걸어 상대를 박살내는 능력도 갖췄다.단점은 헤드 무브먼트는 괜찮으나 가드를 활용한 안면 방어자체가 크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정타가 생각보다 많은 편이였다.
5. 여담
- Boxing Illustrated는 1968년과 1969년에 쿼리를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 복서로 선정했으며, 쿼리는 1970년에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이 영예를 공유했다.
- 1988년 링 매거진은 쿼리를 역대 가장 위대한 헤비급 복서 27위로 선정했다.
- 제리의 맏형인 지미 쿼리는 1994년에 권투 치매를 위한 제리 쿼리 재단(Jerry Quarry Foundation)을 설립했다.
- 남동생 마이크[1]와 바비 쿼리도 복싱선수로 활동했으며 두 형제 모두 치매에 걸려 마이크는 2006년에 사망했고 바비는 투병중에 있다.
- 쿼리의 묘비에는 'Great White Hope'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1]
한때 라이트헤비급 컨텐더였었다.